▲ 담준 스님.

불교에서는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는가?

부처님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며 왕자의 자리까지 버렸지만, 경전에서는 장애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드러나기도 하고 또 일부 스님들은 장애를 ‘전생의 업’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자로서 장애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자리가 마련됐다.

지난 1월 26일 오후 2시, 불교 장애인단체인 ‘보리수아래’가 신년 작은 세미나를 마련했다. 주제는 ‘스님과 신부가 만나 종교와 장애를 말하다’였다.

불교의 장애인식에 대해서 중앙승가대학교 비구수행관 관장 담준 스님이 〈장애에 대한 불교윤리학적 이해〉를 발표했다.

스님은 불교에서 ‘장애’는 신체적 결함이 아니라 주로 탐·진·치에 의거한 마음의 장애를 지칭하지만, 일부 경전에서는 ‘부처님 법을 부정하거나 비방한 자들이 신체적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며 부정적으로 묘사한다고 지적했다. 스님은 경전에서 이렇게 모순되는 요소가 있을 때, 자신에게 유리한 특정 부분만을 인용하여 그것이 곧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붓다의 가르침’과 ‘시대정신’에 부합한 진리를 기준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도 장애아 살해와 유기 찬성

시대정신은 역사가 흐르면서 변하기 마련이다.

발표문에서 고대의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언, 스파르타나 로마의 장애에 관한 제도, 중세의 시각이나 동아시아 전통까지, 장애인에 대한 입장을 훑어서 중요 내용을 기술한 것도 시대정신의 변화를 드러내기 위한 담준 스님의 의도다.

플라톤은 “불구로 태어난 경우 밝힐 수 없는 은밀한 곳에 숨겨둔다”고 했는데 은밀한 곳은 영아 유기(遺棄)를 뜻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장애가 있는 아이의 양육은 법으로 금해야 한다”고 했다. 강한 군대를 기반으로 한 스파르타는 “신체가 기형(장애)인 영아에 대해서는 경제적인 이유와 관계없이 살해”하는 제도가 있었고, 로마도 “모체에서 출생한 것이 인간의 형체를 갖추지 못한 경우에 이를 살해하거나 유기”하는 게 법으로 인정됐다. 서구의 중세시대에는 정신이상자에 대해 “악마에게 사주를 받거나, 혹은 악마와 계약을 한 사람”이라며 죄인으로 처벌했다. 장애인에 대한 복지개념이 생긴 것은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장애아동교육이 이뤄지고, 19세기 초기 유럽 각지에 장애인 수용시설이 갖추어지면서다. 1,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적 의미의 장애인복지의 형성기를 맞았고 1960년대 이르러 장애인 복지의 기본적 틀이 마련돼 의료재활, 직업재활 중심의 장애인 제도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담준 스님에 따르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시각이 서구와는 대단히 달랐다”라며, “특히 불교에서는 생명을 개체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주는 연기적 존재로서 이해하기 때문에 장애가 차별의 근거가 되지는 않았다.”고 불교가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은 사상의 밑받침이 되었음을 밝혔다.

《장자》에 등장하는 장애인을 살펴봐도 “결코 불행하지 않고 심지어 유쾌하고 즐겁게 사는 인물들로 묘사”된다며 “이는 장애인을 비롯한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장애/비장애’의 구분이 무화되는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원리에 근거한 삶의 모습”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전통사회 속에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동정과 혐오라는 양가적 태도가 공존”했다며,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장애인에 대한 구제사업, 조선시대의 장애인에게 직업을 줘서 생계를 잇게 한 정책 등을 소개했다.

담준 스님은 “구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장애인들이 집안에서 밀려나기 시작했으며, 가난하고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거리로 밀려나 방황하게 된다. 현대로 넘어오면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장애인들이 사회복지시설에 강제로 수용되어 왔던 것”이라는 정창권의 인터뷰(〈전통사회에는 장애인 차별 없었다〉, 《주간조선》 2011)를 인용하며 근현대 한국의 장애인정책을 설명했다. 덧붙여 “지금까지도 장애인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시선과 의식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며 한국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평가했다.

“날 때부터 천한 사람 없어” 대 “죄업으로 장애인 된다”

담준 스님은 불교가 일체의 생명을 연기된 관계에서 드러나는 상호의존적이고 평등한 존재로 파악하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빈부나 출생에 따른 신분의 차이, 장애와 비장애의 존재론적 차별을 부정한다고 보았다.

그 예로 스님은 《숫타니파타》의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한다.”등을 인용했다.

또한 부처님의 제자 중, 시각장애가 생겼지만 천안제일(天眼第一)의 지혜의 눈을 얻은 아나율과 지적 능력이 떨어지지만 끊임없는 정진을 통해 아라한의 지위까지 오른 주리반특을 예로 들며, 불교에서 말하는 장애는 신체적 결함을 말하기보다는 탐·진·치에 의거한 마음의 장애를 지칭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실의 삶에서 ‘무차별성’, ‘절대평등’이라는 불교의 가치가 제대로 실현되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며 “여전히 많은 불교인들은 현실에서의 장애의 원인이 장애인 당사자의 과거의 바르지 못한 행위, 즉 ‘장애가 전생의 업의 결과’이며, 이를 불교적 가르침이라고 잘못 받아들이는 경향도 있다”고 했다.

더구나 불교 경전이 워낙 방대하다보니, 부처님 법을 부정하거나 비방하는 자들이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고 묘사한 것이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대반야바라밀다경》에는 “법을 무너뜨린 업의 남은 세력이 다하려 할 때에 아귀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에 태어나나니, 비록 사람이 되었으나 천한 무리 즉 소경이나 벙어리의 집에 태어나고 (중략) 혹은 받은 몸에 눈·귀·코·혀·손·발이 없거나 소경·사팔뜨기·귀머거리·벙어리거나 (중략) 왜냐하면 선현아, 그들은 법을 무너뜨린 업을 짓고, 자라게 함이 지극히 깊고 무거운 까닭에 이와 같이 사랑스럽지 못하고, 지독한 고통의 과보를 받나니”라고 했다. 비슷한 내용은 다른 경전에서도 보인다.

스님은 경전이 “워낙 방대한 양이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거나 중복되는 내용들이 심심찮게 발견된다”면서 “경전상의 모순된 기술에 직면해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경전에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만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특정 부분만을 인용하여 그것이 곧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경전의 모순 내용을 취사선택할 때 기준을 ‘붓다의 가르침’, ‘시대정신’ 등 두 가지로 삼으라고 제안했다.

스님은 장애를 업으로 보는 생각을 “일종의 ‘결정론적 혹은 숙명론적 업보설’”이라며 “붓다는 다른 인도 전통에서 주장하는 업보나 윤회에 대한 결정론/숙명론적 해석을 거부한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이어 “한 사람의 정체성은 전생에 의한 것이거나 어떤 지속적인 실체나 자아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위[業]속에 깃들어 있다”고 덧붙였다.

담준 스님은 장애문제에 있어서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불교윤리적 입장은 “장애/비장애에 대한 구분 없이 뭇 존재들의 삶을 번영으로 이끌기 위한 일상에서의 자비의 실천”이라고 피력했다.

스님은 ‘거울뉴런’의 존재를 들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했다. 거울뉴런은 타인의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가 그 행동을 하는 것처럼 활성화된다. 영화를 보면서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을 자신이 겪는 것처럼 받아들이거나, 신생아가 다른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따라 우는 것 등이 거울뉴런의 활성화 결과이다.

거울뉴런의 존재로 인간에게 타인을 이해, 공감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해도, 그 능력이 저절로 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 스님의 지적이다. 이를 위해 “현상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종교적 수행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자비의 윤리 “모든 사람들을 나 자신이라 생각하라”

스님은 대승보살 보리심 수행으로 ‘자타평등법’과 ‘자타상환법’을 소개했다. 그중 자타상환법은 “공감적 상상력을 통해 자신과 타자의 입장을 바꾸어 보는 것”으로 “자타의 동일성에 의거하여 다른 존재의 고통이 결국 자신의 고통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담준 스님은 상호치환법의 예로 산티데바의 《입보리행론》을 들었다.

나와 남의 행복을 바란다는 점에서 같은데 우리들을 차별할 무슨 차이가 있다고 나는 나만의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가? (8-95)

나 자신보다 더 낮거나 높거나 동등한 모든 사람들을 나 자신이라 생각하고 나 자신을 남이라 생각하며, 딴 생각하지 말고, 시기·교만·경생심을 겪어봐야 하네. (8-140)


담준 스님은 산티데바의 ‘자신과 같이 타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비의 윤리”라고 명명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또 어떤 특수한 경우에서뿐만 아니라 언제나 모든 사람들 상호간에, 나아가 모든 유정적 존재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고귀한 태도”라고 설명했다.

스님은 “동정과 시혜”를 벗어나 장애인을 보길 여러 번 주문했다. “자기 삶의 결정권을 가진 당당한 주체이자 시민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라는 헌법 제34조의 조문을 내보였다. 국가가 보호를 하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특혜나 온정주의가 아니라 헌법적 의무라는 것이다.

스님은 “장애인의 권익 보호조치 등을 비롯한 사회의 다각적인 노력과 함께 개개인의 높은 수준의 윤리적 의식이 필요하다”면서 이는 “자비의 마음이 자라나고 깊어질 때”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담준 스님은 아무리 좋은 담론도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의견을 부각했다. 스님은 “자비의 마음과 그 실천을 통해 장애인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모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윤리적 감수성은 자란다”고 주장하며 “그 형성된 성품이 자연스럽게 사회적 실천으로 드러난다”는 말로 결론을 맺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이수철 신부(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의 전 원장)가 자신이 겪거나 느낀 장애인에 대한 생각을 발표했고 이계경(조계종 전문포교사) 씨가 〈불경과 성경에 나타난 장애〉에 대해 발표했다. 또 ‘보리수아래’ 회원인 장애인 홍현승, 이상복 씨의 〈내가 바라는 종교〉에 관한 시와 산문 낭독시간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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