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는 ‘위기의 한국 불교-개혁 방향을 탐색하다’ 주제로 13일 서울 시민청에서 포럼을 열었다. 박경준 정평불 고문 사회로 1. 총론: 한국 불교개혁의 방향과 방안(이도흠 정평불 상임대표) 2. 행정과 재정: 운영원리의 창조적 파괴와 재구성(김경호 지지협동조합 이사장) 3. 종헌과 종법-어떻게 개혁을 담을 것인가(김형남 참여불교재가연대 공동대표) 4. 계율의 현대화: 한국불교의 미래와 계율정신(박병기 직선제 대중공사 재가위원장) 등의 발표하고 종합토론을 진행했다. 

■ 종단 개혁의 방향과 방안
이도흠(정평불 상임대표)

종단의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확고히 착근시키려면, 수행과 재정을 분리하여 권승들의 권력과 자본 독점과 전횡을 근본적으로 막고, 궁극적으로는 청정 승가 공동체를 회복하려면 사찰운영위원회의 거버넌스 시스템을 확고히 해야 한다.

지난 10년 사이에 승가에서 굳건하게 행해지던 삼의일발(三衣一鉢)과 객실문화가 사라졌다. 수많은 전각이 즐비함에도 행각을 할 때 바랑을 풀 절이 없고 모두가 개인 토굴 갖기를 희망하고 가사와 다비 비용마저 개인이 준비해야 한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탐욕을 내면화하고 이것이 권력과 결합한 때문이다.

지금 한국 불교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은처, 도박, 공금횡령, 폭행, 성폭력 등 총무원장을 비롯한 지도층 승려들의 범계 및 비리 행위가 임계점을 넘어섰음에도 이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장치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승 전 총무원장을 핵심고리로 하는 권승카르텔이 과도하게 권력과 재정을 독점한 채 이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사찰 안과 밖의 장치를 무력화하거나 포섭하였기 때문이다.

자승 전 총무원장은 적광 스님 폭행, 용주사와 마곡사 사태, 해종언론, 명진스님 제적, 정교유착 등 조계종 적폐를 쌓은 장본인으로서, 설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를 단행한 종단의 수장으로서 무한 책임이 있다. 자승 전 총무원장은 은처, 억대 도박, 신밧드 룸쌀롱 출입 및 상습 성매매 의혹에 대해 아직 해명하지 않고 있다.

자승 총무원장은 포섭과 배제의 전략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정치인이다. 그는 불교광장으로 통합하여 종회를 장악하고 호법부, 호계원을 무력화하고 원로와 정부와 언론을 포섭하였다. 이용할 가치가 있는 스님과 재가불자, 언론인, 정치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편으로 포섭하였으며, 자기 편은 무조건 두둔하고 자신에게 해가 되는 자는 단호하게 내쳤다. 그는 그와 가까운 동국대 총장, 용주사 주지, 마곡사 주지는 죄가 드러났는 데도 비호하여 조계종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인 종헌과 종법을 무력화하였으며, 종회와 호계원은 물론 교구본사를 자신의 의지 관철기관으로 전락시켰다. 그야말로 조계 종단을 마구니 소굴로 전락시킨 장본인이다. 촛불혁명의 동력이 작동하고 정권이 교체되고 불자들의 분노가 점차 상승하자 자승 총무원장은 하수인인 설정 스님을 총무원장에 앉히고 상왕노릇을 하고 있다. 모든 적폐의 주도자 및 책임자로서 자승 전 원장을 승려대회를 통하여 멸빈시키거나 사찰방재 시스템에 대한 수사를 올바로 하여 구속시켜서 권승 카르텔의 핵심 고리를 끊고 판을 새롭게 짜야만 청정 승가를 구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종단은 빠른 시일 안에 4부대중이 공히 참여하여 직접, 평등, 보통선거를 하는 것과 관련한 종헌과 종법을 만들어 통과시켜야 한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적극적 복지와 구조적 폭력을 제거하는 적극적 평화 개념을 불교에 맞게 전환하여 종단의 복지이념을 정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제의 핵심은 재정이다. 이번 기회에 ‘사유재산의 종단귀속’을 단행하여 이를 종자돈으로 삼아 종단 차원의 요양원과 병원을 짓고 수익사업을 한다. 노스님들이 대부분 교구 본사에서 머물며 수행하기를 원하는 만큼, 교구 본사와 협력하여 교구 본사 안에 공동주거 및 수행처를 짓는다. 남는 돈은 적립하여 이자를 복지비용으로 전용한다.

장기적으로 볼 때, 기능주의 복지 이념보다는 협동주의 이념에 부합하는 ‘공제조합 방식’의 제도로 발전시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종단은 차제에 승단의 문화와 계율 및 청규, 사회법 사이에 괴리를 빚고 있는 것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고 이 괴리를 메워야 한다.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경우에는 문화를 계율에 맞추어 바꾸어야 할 것이고, 다른 경우에는 계율을 바꾸는 경우도 있어야 할 것이며, 양자 모두 조정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궁극적 대안은 중앙의 총무원과 지방의 교구 본사제를 해체하고 지역에 기반한 자율적인 승가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총무원과 교구본사제는 일제의 식민지적 근대의 잔재이자 국가가 종교를 제도 안으로 편입하여 관리하자는 근대적 유산이다. 승가는 자율적인 공동체이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각 절별로 역사와 능력, 승려들에 맞게 수행중심, 전법과 포교 중심, 중생 구제 중심 등으로 특성화하여 자율적인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

개량적 방안으로는 총무원장을 직선제로 선출하고 중앙종회와 호계원의 종헌에 규정한 실질적 역할 수행을 통한 삼권분립을 구현하며, 수행과 재정의 분리 등 제도개혁을 단행하여야 한다. 중앙종회의원 또한 해당 교구의 비구니를 포함한 모든 종도들이 참여하여 선출할 수 있도록 한다. 중앙종회는 상임분과위원회를 중심으로 종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제도를 만들고 법제화를 하여야 하며, 종단의 행정은 물론, 수행, 포교, 교육 등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중앙종회가 먼저 나서서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번 기회를 통하여 모든 일과 행사에 사부대중이 함께 하는 평등하게 참여하는 공의제를 정착시키고 구체화, 활성화하여야 한다. 원로원만이 아니라 중앙종회를 근본적으로 양원제로 나누어, 상원은 계율대로 대덕 이상의 출가자로 자격을 한정하고, 하원은 출가자와 재가자들을 함께 구성하여 상호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호계원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호계위원은 도덕성, 경력 등에서 일정한 자격기준을 부여하고 이에 합당하는 자 가운데 중앙종회에서 선출하되, 중앙종회의 일반 의결이 아닌 중앙종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도록 하여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 일정 부분(최소한 1/3)은 불자 법조인으로 구성하거나 배심제도를 도입하여 심판은 호계위원이 하고 유죄/무죄의 판단은 배심에서 결정하도록 한다. 호법부는 중앙종회 직속으로 독립시키며, 호법부는 사전예방과 진상조사의 업무에 주력하고 호계원은 심판에 주력하도록 기능을 분할한다. 원로원에 사회의 헌법재판소와 같은 역할을 부여하여 총무원장이 종헌을 위반하였다고 판단하였을 경우 바로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 행정과 재정-운영원리의 창조적 파괴와 재구성
김경호(지지협동조합 이사장)

비구 1부중 독점 한계, 민주 대중공의 전통 되살려야

조계종단의 구성 기조는 대한민국 국가 구성의 입법은 중앙종회, 사법은 호계원, 행정은 총무원으로 3권분립을 흉내내었다. 동시에 자본주의적 소유질서를 인정한다. 사찰의 관리인인 주지는 임기동안 절대적 권리를 행사한다. 이들 권리와 운영원리는 사실 율장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평등한 승가공동체의 전통에 위배될뿐더러, 무소유에 기반한 수행자여야 할 승려를 불교자산가로 만들었다. 불교자산가가 된 승려들은 부패의 위험에 늘 노출되고 있다. 제대로 된 견제와 감시장치조차 없는데 청정함을 유지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다.

또한 근대 민주국가의 구성원리를 흉내내었지만 내부 원리는 비민주적이다. 대표적인 것이 성불평등이다. 총무원장을 비롯한 종단의 주요 직위는 ‘비구’만이 맡을 수 있다고 명문화되어 있다. 중앙종회 81석 가운데 비구니 의석은 10석뿐이다. 호계원에는 비구니 자리가 아예 없다.

출가 2부중의 하나인 비구니가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데 재가2부중의 몫이 온전히 있을 리 없다. 종단의 주요 자리에 재가불자의 자리는 없다. 종헌에서 “본종은 출가와 재가로 구성한다.”고 하였고, 종헌 제10조에 “신도는 삼귀의계, 재가5계 및 보살계를 수지하고 삼보를 호지하며 본종의 종지를 신수봉행 하는 자라야 한다.”고 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제12조 “승려 및 신도의 권리 의무와 분한, 법계, 의제는 종법으로 정한다.”고 하여 신도법이 있으나 이는 종단운영의 주체로 대접하는 규정이 아니다.

비구 1부중에 독점된 종단 권력의 해체, 사부대중의 공동관리가 필요하다. 종단 위기상황 때마다 종단권력의 재편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이른바 혁신기구가 아니라 100년을 대비하는 기구를 사부대중의 긴 호흡으로 해야 한다. 문제는 100인대중공사, 백년대계위원회 등으로 좋은 이름이 오염되었다는 점이다. 권력기구의 보호막으로 기능하는 위장기구를 척결하고, 사부대중이 동참하는 21세기의 열린 결집을 통해 종단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승려는 수행 중심으로, 관리는 재가 참여로 종단 미래를 공동으로 책임져나가야 한다.

대중공의가 파괴된 자본주의적 재산관리인인 사찰주지의 독점적 권한을 해체. 가톨릭 모델처럼 최소한 교구차원의 공동경제체제 추진 필요. 주요 전통사찰의 수익을 사유화할 수 있는 현 구조는 중단되어야 하며, 전체 공동체를 위한 공동경비로 이용되어야 한다.

교구 재획정이 필요. 종단 성립 뒤 수십 년이 경과하면서 한국사회 지형이 크게 변화, 교구별로 인구와 경제규모의 차이가 심화, 수도권을 비롯한 광역시는 무주공산, 야생의 각축장이 됐다.

이에 덧붙여, 1700여년의 문화유산인 전통사찰과 불교문화재는 불교인만의 것일 수 없다. 온 국민의, 나아가 온 인류에게 전해지는 유산이다. 이를 관리한 내셔널트러스트 같은 기관을 설립하여 공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소수 권승들의 사유재산화를 방지하여야 한다.

현재 불교 공동체라 말하는 조계종단은 전혀 종교적일 수 없는 세속적 다툼을 종식시키지 못한다. 제도의 문제를 말하기도 하고 부패한 인간의 문제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비구 1부중의 독점적 종단운영의 한계가 드러난 것일 뿐이다. 자자·포살·대중공사·승려대회·칠불쇠법의 전통이 있는 불교는 당연히 모든 구성원이 주인 되는 민주적 대중공의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 출발점은 종단의 최고책임자인 총무원장을 직선제로 선출하는 일이다.

이미 출재가 이분법은 혼미해졌다. 승가가 독점적으로 유지해왔던 전통계승의 영역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재가 영역으로 넘어왔다. 미술, 음식 등 생활문화, 교학 연구까지도 이미 재가의 영역이다. 현재 출가중은 불교의례의 전문가이며 수행 실참자로서 권위만 남아있다. 그러나 수행영역 또한 위빠사나, 아바타 수행등 외래종 수입수행 프로그램에 밀리는 추세다.

더욱이 불교교단은 지속가능성의 위기에 봉착했다. 신도 300만 이탈은 너무 충격이 커서 현실감이 없으나, 출가자의 지속적 감소는 지방강원, 중앙승가대학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다. 또한 출가자의 고령화는 생계형 출가자의 증가로 이어져 출가연령제한 완화에 대한 재고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한다.

합리성과 상식이 결여된 종단 운영, 특히 사법질서는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근대 선각자들인 만암스님은 교육, 가람불사 등 지역 복지, 항일 민족운동에 종사했고 운허 스님은 독립운동, 교육, 한글역경 등에서 우뚝했다. 이밖에도 만해, 용성 등등 큰 스승들의 안목과 실천은 왜색불교를 청산하고 청정비구승단 건설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거목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요즘 지도급 승려의 안목은 전시대 고승들보다 훨씬 떨어진다.

불교 시민사회운동은 변화하고 있다. 종단 적폐를 청산하고 청정종단을 구현하자는 2018년 운동에서 눈에 띄는 변화라면, 재가만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스스로 자정 못하는 승단에게 희망을 두어야겠느냐는 의견도 만만치 않게 지지를 받고 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일상적으로 시민사회진영이라기 보다는 신행조직으로 분류되던 부분들이 투쟁대열에 동참하면서 보다 더 과격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불교의 역동성, 이웃종교, 시민사회와 갈등없이 융합하는 넓은 포용성은 불교 개혁운동이 종교개혁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남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1700년 한국불교의 문화유산은 온 국민의 것이고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그 안에서 불교전통의 계승, 유지, 보존자는 누구이며 누가 창조적 파괴와 재구성을 담당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할 때다.

■ 바람직한 종헌 종법 개정 방안에 관하여
김형남(참여불교재가연대 공동대표)

종단 권력기구 착각에 비극, 종회 해체 필요

흔히 94년 개혁종단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를 한다. 자승총무원장 시절에 94년 개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도법스님, 현응스님, 지홍스님을 중용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혁적인 인사가 존재한다는 착시효과를 줄 뿐, 그 분들은 전혀 개혁적인 일을 시도한 적조차 없다. 94년 개혁종단 체재 자체가 커다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고, 현재의 막장을 만드는데 가장 큰 일조를 하고 있다.

현재 화두로 닥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돈선거를 없애고 신망받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문제, 재정투명성과 승려복지, 정치행위 근절과 권력해체, 사부대중의 평등한 종단 참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혁과제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94년 개혁종단이 형성한 권력구조의 문제점에서 비롯된다. 94년 개혁이 가장 큰 성과가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과 교육원과 포교원을 별원으로 독립시키고, 비구계 수계와 연결된 4년의 교육과정을 확립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교구 산중 총회에서 주지를 선출하고, 본사주지에게 말사주지 추천권을 주는 교구자치제를 확립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94년 개혁세력의 가장 큰 착각이 존재한다.

세속의 권력기구 구성원리를 따라서 만든 순차적인 권력기구 형성이라는 종단의 구성과 선거제도, 주지 중심적인 사찰운영이 합쳐져 종단을 완전히 세속화로 물들여 버렸다. 발전한 매스미디어를 타고 자본주의 경쟁논리가 사회전반을 생존경쟁의 장으로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직업적 정치승 집단을 만들었고, 권력놀음이 종단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세속의 권력투쟁 모습이 너무도 당연히 총무원과 중앙종회를 중심으로 사판승의 세계를 지배하고, 승려교육은 단지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직업적 승려를 만들어내는 공장이 되었고, 말로만 중요하다고 하지 전혀 투자도 없이 관심 밖으로 멀어진 간화선 공부는 체계적으로 점검해주는 이 없고 점검받고자 하는 이도 없으며, 포교원의 간부는 일부 비구승려가 독점하고 신도들에게 군림하고 지시를 내리는 곳이 되었다.

권력놀음과 권력에 의한 스님들의 지배, 신도들의 소외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종단이 권력을 가진 일부 비구승의 편안한 놀이터가 되어버린 상황에서도 내부 개혁의 움직임조차 없는 이 현상을 타개할 제도적 방안은 무엇인가? 비구계 등 계율은 말할 것도 없이, 종헌 종법을 어겨도 권력을 가지고 판관까지 하는 그들을 아무도 제재하지 않으며, 파당을 지어 자기 편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여도, 그것이 종헌 종법 질서라고 주장한다.

불교가 아닌 것을 불교로 바꾸는 것은 권력기구의 해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94년 개혁 종단이 구성자들이 종단을 권력기구로 착각한데서 이 모든 비극은 출발하고, 결국 94년 개혁의 완전한 실패로 귀결되었다.
종단은 승려와 신도들에 대한 봉사기관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중앙종회 각 계파의 싸움과 협잡을 통해, 승려와 신도들에 군림하는 지배자를 만들고, 중앙종회 구성원 그 자체가 승자독식의 승자로 군림한다. 지금 중앙종회를 해체하자고 하면 일부스님들의 신분상승의 꿈을 빼앗아버리는 것으로 여기고 격렬한 저항이 일어날 것이다.

권력놀음의 중심 중앙종회를 해체한다고 해서 종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중앙종회를 상하원으로 운용하되 하원은 각 교구본사별로 추첨으로 선출된 스님들과 재가 전문가들이 모여 종단의 대소사를 논의하고 공론을 형성하는 장 정도면 족하다. 스님들에게 종단이 공적관심사를 상기시키고, 세상이 요구하는 바를 알고, 오히려 스님들에 대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시켜야 할 것이다.

상원은 원로회의에서 선출한 원로스님들과 인격적으로 인정받은 재가 지도자가 모여 하원에서 올라온 공론을 점검해서 대중들의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로 운용하면 적당할 것이다.

각종의 인사는 불교인재원을 만들어 선원, 율원, 강원, 능력과 청렴함을 인정받은 사판승, 역시 능력과 인격을 인정받은 재가자들의 데이터 베이스를 만들고, 불교인재 추천위원회를 만들어 총무원에 추천하여 인사가 이루어지도록 할 일이다.

총무원장은 당분간은 스님 전부와 재가자 대표에 의한 직선제가 실시되어야 한다. 재가 대표단의 선출방법에 대해 조속한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일단은 스님들에 의한 직선제가 실시되어야 할 거이다. 수많은 개혁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폭넓은 지지가 필요하고, 소외된 많은 스님들의 종단참여의 전기 역시 필요하다.

돈선거 문제는 한 두 번 정도 사회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위탁선거를 하면, 내부 분쟁과 혼란없이 사회기관에서 해결해주고, 종도들은 좀 더 나은 총무원장을 뽑는데만 집중하면 될 것이다. 대중들에 의해 뽑히기 때문에 대중들의 의사를 누구보다도 존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판승들이 둘 수 있는 상좌의 수를 제한하여, 공부를 점검할 수 없는 은사가 생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상좌들의 행위에 대하여는 공동으로 참회하도록 하고, 상좌들의 공직임명에 대한 동의권을 부여하여, 공동책임 전통을 확립하도록 한다. 은상좌제도와 문중을 통해 사자상승의 전통이 권력으로 발전하는 지금의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현재 드러나고 있는 문제점에 관하여는 무엇보다 종단의 호법기능과 감사기능을 강화시키면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종단의 호법기능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문제점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평등한 적용이 되고 있는가와 과연 권력승들의 범계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제어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고위직 승려에 대해서는 호법부의 기소독점권을 적절히 제어하기 위하여 일정직위 이상 스님들의 일정한 범계행위에 관련하여서는 기소를 할 수 있는 합의제 대배심(大陪審)제도를 두어야 한다.

무엇보다, 계파정치의 폐단을 끝내기 위하여 이와 관련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새로운 계파가 생기는 것을 엄단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종단의 감사기능을 강화시켜 사찰의 실정을 잘아는 재가자들을 교육훈련하여 감사요원을 대폭확보하고, 각 사찰로 하여금 감사에 적합한 장부작성을 법정화시키며, 시주금의 사용목적(포교목적, 사회사업목적, 사찰운영비목적, 불사목적)을 장부에 정확하게 기재하여 수입으로 잡고 전용을 금지시키며, 사찰주지 개인에 대한 시주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사찰재정을 공개토록하여 공개된 재정과 실제 재정이 일치하지 아니한 경우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현재, 종단에서 만든 사찰운영위원회법은 현재 신도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교육이 행해지지 아니하고, 사찰의 목적을 이해하고 사찰운영의 주체로써 참여하여야겠다는 신도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는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고 실제로도 작동하지 않는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재정공개만큼 효율적인 방안이 없을 것이고, 주지와 재정책임자를 분리하여 재정책임자의 결제없이 어떠한 지출도 불가능하게 하고 그 재정책임자가 재정운영에 관하여 책임을 지게 하여야 하는데, 현 사찰예산회계법에서 재정책임자를 주지로 하고 경리회계담당자를 일반 종무원의 지위에서 재정집행의 책임자로 격상시키지 아니하고 있는 규정들을 전면적으로 손질해야 한다.

재정책임자를 두는 한편, 재정책임자를 둘 형편이 안 되는 사찰이라 할지라도, 시주목적의 전용금지, 감사를 받을 수 있는 장부의 배치, 재정의 교구홈페이지를 통한 공개, 일정액 이상은 개인시주금으로 인정하지 않는 등의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투명성을 견지하여야 할 것이다.

■ 한국 불교의 미래와 계율정신의 회복
박병기(직선제 대중공사 재가위원장)

단일 공동체 비리 은폐 악용, 사회윤리 차원 포용해야

우리 한국인에게 20세기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굴욕과 저항으로 다가왔다.

성공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3.1운동과 독립 운동 자체이고, 좌절로는 급속한 왜색불교화와 계율의 쇠퇴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성공과 좌절은 광복 이후 우리 불교의 상황에 그대로 영향을 미치는 업으로 작동했고, 그에 따른 보(報)는 21세기 초반인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왜색불교는 대처승단의 주도권 확보와 노골적인 친일로 이어졌고, 광복 이후의 상황 속에서는 대통령 유시에 기반한 타율적인 ‘정화’의 굴곡으로 이어졌다. 1962년 출범한 대한불교조계종은 외형적으로 왜색불교의 잔재인 대처승단을 비판하면서 ‘청정 비구, 비구니 승단’이자 ‘우바새, 우바이’가 주요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사부대중공동체의 지향을 내세웠지만, 승단의 핵심 기반인 계율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함으로써 지속적인 위기 상황을 노정시켜야만 했다.

조계종단 핵심 지도층의 은처자 의혹은 그 중에서도 기본적인 오계(五戒) 중 하나인 불사음계(不邪淫戒)를 위반하는 것이어서 종단 자체의 존립 기반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고, 불행히도 이 충격이 누적되면서 승단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무감각과 면역 현상마저 만연해 있다. 최근의 총무원장 스님들이 거의 모두 이런 은처자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런 현상을 상징하는 사건들이다.

20세기 초반 한국불교에 정착한 왜색불교의 짙은 그림자는 바로 그 계율정신의 마비와 왜곡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것은 곧 한국불교 자체의 왜곡이자 타락이며 소멸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현재의 계율정신 실종 현상을 직시하면서 회복 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함으로써만 희망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출가보살만의 범계를 문제 삼지 않아야 한다는 당연한 전제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수행에 전념하고자 출가를 감행한 출가보살들이 그 수행에 더 적합한 환경을 지니고 있다는 석가모니 붓다의 전제는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상당한 정도의 변화와 마주하고 있다. 우선 세속과의 연결망이 인터넷에 의해 혁명적으로 확충되었고, 다양한 방식으로 돈을 직접 만질 수 있게 된 우리의 출가보살들은 그 돈으로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자유의 과잉’으로 내몰리고 있다. 도박과 성매매, 이른바 명품의 일상적인 소비 등이 그런 과잉에 노출된 결과물들이다.

재가보살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을 불교도, 또는 재가보살이라고 스스로 칭할 수 있으려면 당연히 보살계를 받아서 지키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재가보살 중에서 이러한 최소한의 계율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어느 정도일지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답을 주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번 위기를 계기로 우리의 계율을 다시 보면서 그 정신의 회복을 꾀하고자 하는 노력이 재가와 출가 모두에게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 출발점도 재가보살이 먼저 나서서 마련함으로써 출가보살에게 모범을 보이고 또 변화를 촉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 불교는 초기계율에 속하는 <사분율>과 보살계를 모두 받아들여 수지하는 계율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러다보니 출가보살이 너무 많은 계율에 노출되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고, 자신이 수지하겠다고 받아들인 계율이 무엇인지 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과 직면하고 있다.

계율을 포함한 모든 도덕규범에는 해서는 안 되는 금지의 도덕과 더 나은 목표를 위한 마음가짐과 실천을 권유하는 권유의 윤리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불교계율에서 금지의 도덕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은 당연히 오계(五戒)이다. ‘살인하지 말라’거나 ‘거짓말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을 하지 말라’, ‘술을 마시지 말라’ 등의 다섯 가지 계율은 출가와 재가를 통틀어 모두 지켜야 하는 금지의 도덕이다. 그것은 다시 법적인 처벌을 감수해야 하는 법적 차원의 금지와 도덕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도덕적 차원의 금지로 나뉜다. 거짓말과 술, 음행에 관련된 계율이 주로 후자에 속하고, 살인과 도둑질에 해당하는 계율이 전자에 속한다.

이러한 금지의 도덕과 함께 보살계에는 권유의 윤리에 속하는 계율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대승계의 체계적인 완성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삼취정계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시민이면서 동시에 사부대중공동체의 구성원인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이 시민윤리와 수행공동체의 계율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차원의 율의계(律儀戒)와, 몸과 입, 뜻으로 지어가는 모든 악업을 경계하면서 선함을 쌓아가는 섭선법계(攝善法戒), 모든 존재의 평화와 행복을 바라는 자리이타행을 지향하는 요익중생계(饒益衆生戒)가 그 셋이다.

금지의 도덕에 속하는 계율을 어긴 경우에는 엄격하고 엄정한 처벌이 따라야 한다. 출가보살에게는 승단추방과 같은 조치를 즉각적으로 취해야 하고, 재가보살에게도 재가공동체로부터의 소외와 추방이라는 처벌이 가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 불교계에서는 이러한 처벌 자체가 유명무실해짐으로써, 금지의 도덕에 속하는 계율을 어기고서도 상응하는 처벌은커녕 양심의 가책조자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 자주 노출되고 있다.

우리 불교계는 그동안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국가의 법에 호소하거나 종교의 자율성을 번갈아 내세우는, 일관성 없는 모습으로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와 그 자유를 적극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종교의 상대적인 자율성은 당연히 요구할 수 있고 또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자유와 자율은 당연히 시민사회가 제도종교에 기대하는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것을 전제로 성립될 수 있을 뿐이다.

시민사회는 제도종교에 자신의 구성원인 시민들의 정신적 안정과 삶의 의미 물음에 대한 적극적인 해답 제시, 시민공동체 자체의 정신적 지향에 대한 적극적인 실천 등을 기대한다. 그런 기대에 최소한으로 부응하기 위해서는 제도종교가 당연히 도덕성과 청정성의 기반 위에 서 있어야만 하고, 더 적극적인 영역에서는 사회의 구조적인 부정의에 저항하면서 각 종교의 지향에 부응하는 사회정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현대사 속에서 특히 가톨릭의 경우 일정 시기 동안 이러한 적극적인 역할을 해냄으로써 현재까지도 상대적으로 높은 신뢰를 받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적극적인 목소리와 실천은 자신의 종교내의 종교적 청정성과 도덕적 정당성 기반이 확보되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시민사회 속으로의 확산이 가능해진다. 최근 언론매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있는 개신교와 가톨릭, 불교계 모두의 추악한 모습들은 그런 청정성과 정당성이 종교계 내부에 확보되어 있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의구심을 불러내기에 충분하고도 넘친다. 특히 조계종단으로 상징되는 불교계의 경우는 한국 가톨릭과 함께 비교적 단일한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음으로 인해서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비리와 그 은폐에 취약할 수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한 대응은 당연히 종교계 구성원 개인을 문제 삼는 개인윤리에서 벗어나 사회윤리의 차원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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