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조계사 앞 우정공원에서 87세에 이른 설조 스님이 “교단 정화의 불을 지피는 데 내 몸뚱이를 심지로 쓰겠다”라며 7월 17일 현재 28일째 단식정진 중이다. 주지하듯, 우리 몸은 일종의 화학공장이다. 음식을 먹으면 내장에서 물질로 분해하여 에너지를 만들고 이것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을 한다.

외부로부터 물질의 공급을 차단해도 에너지를 써야 하므로, 단식을 하면 처음에는 몸 안의 지방이 에너지로 전환하지만, 그 다음에는 근육, 이것으로도 부족하면 뼈가 분해된다. 세수를 고려할 때 30일이면 목숨이 위태롭다. 단식 정진장을 찾는 대부분의 불자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스님의 모습을 보고서는 눈물을 훔친다.

그럼에도 마구니 같은 조계종단은 응답이 없다. 설정 원장 등 책임있는 이들이 와서 무릎 꿇고 성찰해도 모자랄 터인데 오히려 긴 장마로 습기가 뼈에 사무치는 그 기간에 천막 옆의 분수를 밤에도 틀어놓을 정도로 야비함과 치졸함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토요일에 조계종 적폐청산 시민연대가 촛불법회를 하는 자리인 템플스테이 앞에 자동차들을 주차시켜 놓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똘마니를 자처하는 스님과 종무원들이 집회를 방해하며 참여자들과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말의 염치도 없는 자를 어찌 사람이라 할 것이며, 추호의 자비심도 없는 이들을 어찌 불자라 할 것인가.

목숨을 걸고 행하는 설조 스님의 단식에 대해 불살생의 계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대승범망경(大乘梵網經)>에서는 “몸, 팔, 손가락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할 수 없다면 출가 보살이 아니다”라며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으로 대승의 진리를 구하라고 하였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을 보면, 약왕보살의 전신(前身)인 희견보살(喜見菩薩)이 “내가 비록 신통력으로 부처님께 공양하였으나 몸으로써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며 스스로 몸을 태워 소신공양을 한다. 이를 두고 『법화경』에서는 “선남자야. 이것이 참된 정진이다.…이것이 제1의 보시이니, 여러 보시 가운데 가장 존귀하고 가장 높은 보시가 되는 것은 법으로써 모든 여래를 공양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설조 스님의 단식이야말로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참된 정진이자 부처님께 바치는 무한히 높고 지극히 존귀한 보시다.

그럼에도 이제 단식은 중지해야 한다. 온통 황금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산을 교환하자고 한다면 무엇이든 바꾸겠다고 달려들겠지만, 단 하나 자기 목숨과 바꿀 이는 없다. 한 사람의 생명은 온통 황금으로 이루어진 산보다도 가치가 있다.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해탈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모든 존재가 부처님처럼 존귀하다. 미물이든 아니든, 모든 생명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무한한 반복 속에서 ‘차이를 생성하는 공(空)’들이며, 다른 생명과 상호 관계와 조건과 인과 속에서 더불어 살면서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를 해 온 가유(假有)로서 오온(五蘊)의 결합체들이다. 모든 생명들은 개체적으로는 ‘이기적 유전자에 조종되는 생존기계’이지만, 연기적으로 공진화를 하는, 틱낫한 스님이 설파한 대로, 서로 존재(inter-being)이자 서로 생성자(inter-becoming)들이다. 그러기에 한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한 우주가 사라지는 것이며,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인 인드라망의 생태계(eco-system)에 커다란 차이와 충격을 주는 것이다.

종단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단식을 멈추지 않겠다는 스님의 의지를 꺾지 않으면서 생명을 살리는 길은 하나다. 이제 그에 응답하는 것이다.

마지마 니까야』에서 설한 대로,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업의 소유자이며 업의 상속자다.” 조계종단의 권승들은 더 이상 악업을 짓지 말고, 성찰하여 자리에서 물러나고 재정과 수행의 분리, 직선제, 승려복지체제 수립 등 종단 개혁으로 화답해야 한다. 불자들은 바쁘더라도 적폐청산 운동에 나서서 종단이 개혁을 수용할 때까지 ‘자비로운 분노’와 연대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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