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한국의 고대 사회의 역사, 종교, 문화, 풍속, 언어 등을 연구하기 위한 기본서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서 가운데 최초로 단군신화를 수록하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가지는데, 󰡔삼국유사󰡕는 단군을 나라의 시조(國祖)로 언급한다.

'삼국사기'는 1145년(고려 인종 23) 왕명에 의해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젊은 벼슬아치 8명의 도움을 받아 여러 사서를 참고해 만들었다. '삼국사기'는 중국에서 사용하던 기전체 형식의 총 50권짜리 역사책이며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다.

'삼국유사'는 일연선사(一然禪師, 1206〜1289)가 저술한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입장을 견지한 야사에 해당한다. 5권 2책이며, 상권인 1, 2권은 주로 역사 사실을 다루었고, 하권에 해당하는 3, 4, 5권은 불교 사실을 다루었다. 내용은 주제에 따라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효선 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각국사 일연선사(普覺國師 一然禪師)는 1206년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인 장산군에서 태어났다. 자는 회연(晦然)이고 보각국사는 시호이다. 아버지 김언필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해가 사흘 동안이나 집안에 들어와 비추는 태몽을 꾸고 잉태했다고 한다.

9세(1214년, 고종1)에 지금의 광주인 해양 무량사에 출가하였고, 14세 때 조계종의 종도 도의국사가 주석하였던 가지산문 계열의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서 대웅(大雄)장로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22세인 1227년 승과에 급제한 뒤 비슬산 무주암과 묘문암에서 수도하셨다.

32세 때인 1237년 표산 묘문암(妙門庵)에 머물면서 “중생 세계는 줄지도 않고 부처 세계는 늘지도 않는다.”라는 화두를 참구하다가 크게 깨쳤다. 스님은 삼중대사를 수여받고 그 이듬해 선사의 법계를 받았다. 44세 때인 1249년에는 남해의 정림사에 초빙되었다가 그 절의 주지를 맡게 되었다.

이후 1256년(고종43)에는 남해 길상암에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를 편집하기 시작하여 1260년에 출간하게 되었다. 1264년에는 영일 오어사에 계시다가 대구 가까운 인흥사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학승들이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72세(1277년)에 청도 운문사에 주석하시다가 충렬왕에 의해 국존(國尊)에 추대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곳에서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284년에 인각사로 와서 구산문도회를 연 뒤 1289년 이곳에서 세수 84세, 법랍 71세로 입적하셨다.

지눌스님의 결사운동으로 나타난 13세기 전반기의 수선사의 불교 혁신운동은, 최씨 무인정권의 와해와 더불어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그와 동시에 새로운 대원관계가 정립되는 원의 간섭기에 들어서면서, 그 세력이 현저하게 약화된다. 이러한 판도의 변화는 사굴산문 계열의 수선사의 퇴조를 가져오고, 간화선의 흐름은 당시 새롭게 대두되던 일연스님의 가지산문 계열로 계승된다. 스님의 경우, 혜심스님의 시를 󰡔삼국유사󰡕에서 인용하거나, 스스로 “멀리 목우화상을 계승하였다”라고 하는 말에서 보듯이, 기본적으로 지눌스님이 소개하고 혜심스님이 크게 발흥시킨 간화선의 사유체계를 이어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의 사상적 경향은 우선 수선사 계통에 의해 종합, 정리된 간화선에 입각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조동오위(曹洞五位)'를 중편(重編)한다든지, '조정사원(祖庭事苑)'등을 편수하는 등 다양한 선종의 전적을 간행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스님은 간화선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다른 계통의 선사상까지 폭넓게 수용하였다. '중편조동오위'는 중국의 선사 동산양개(洞山良介, 807〜869)가 지은 '조동오위현결(曹洞五位顯訣)'이 원본이다. '조동오위현결'은 조동종의 대표적인 어록으로 조동종의 수행지침을 제공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3세기 초에 지겸(志謙, 1145〜1229)이 '조동오위'에 대한 편집을 시도하였다. 그렇지만 많은 문제점이 있어서 일연이 재편집을 시도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선문 중 조동종과 관련이 있는 선문은 수미산파인데, 가지산파인 일연이 수미산파와 관련이 잇는 조동종 관련의 서적에 주석을 가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러한 선사상과 함께 스님은 교학과 유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특히 스님은 밀교적 입장을 수용하고, 타력적인 관음신앙을 통한 공덕과 다리니 신앙을 통한 신비적인 경향에도 정통하여서,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걸맞게 현실적인 구원사상을 표방한 경전류를 간행하였는데, 이는 실천적, 현세적 신앙을 강조함으로써 이민족의 침략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와 고통을 받았던 일반 민들로 하여금 구원과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한 신앙적 노력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3세기 후반기 사회상황의 변화에 따라, 스님의 내부에서 신앙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사상적 전환이 일어난다. 이러한 변화는 무신집권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판단된 민중의 입장을 깊이 인식한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은 이러한 민중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현실적 차원에서의 구원과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한 신앙적 노력의 일환으로 실천적·현세구원적 성격을 띤 불교를 표방한다. 이와 동시에 이민족의 침략이 야기한 민중의 고통과 피지배 사회로의 전락이라는 현실을 스님은 민족적 위기감으로 받아들인다. 이에 대한 대응의식에서 스님은 '삼국유사'의 저술을 시도한다.

편찬 과정과 시기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대체로 스님 청년시절부터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만년인 70대 후반 인각사에서 저작된 것으로 보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75세(1281) 이후 2, 3년 사이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삼국유사󰡕가 마지막으로 정리되어 완성된 시기를 말하는 것일 뿐, 이 책의 방대한 내용이 이렇게 짧은 기간 안에 저작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그 이전부터 부분적으로 기록해두었던 내용을 이때 집중적으로 정리하여 한 권으로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유사(遺事)’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삼국사기󰡕에서 빠뜨린 것을 채워 보완한다는 성격을 가진다. 국가의 대사업으로 편찬된 󰡔삼국사기󰡕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다. 그러나 역사를 기술하는 태도와 자료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 편찬자의 시각이 지나치게 합리성을 강조하고, 중국 중심적이어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소홀히 다루거나 왜곡하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기존의 역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불교적 측면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다룬 점은 승려인 일연의 입장에서 수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일연이 책을 저작할 당시는 몽골의 침략이 계속되어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慕華思想)이 비판되고 민족자주의식이 강하게 대두되던 시기였다. 일연의 저술의도에는 이 같은 민족감정이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는 가치가 없다고 제외시키거나 소홀히 다룬 자료들에 대해서 주목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결과 '삼국사기'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도 있고, 다르게 기술하거나 해석한 부분도 적지 않다. 이런 면에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서로 대조적이면서도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가진다. '삼국사기'가 합리적이고 공식적인 입장을 취한 정사(正史)라면, 󰡔삼국유사󰡕는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입장을 견지한 야사(野史)에 해당한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단순한 야사가 아니다. 오히려 뚜렷한 역사의식과 일관된 체계성, 더 나아가서 제대로 된 고증을 거친 점에서, 우리나라 역사서의 으뜸이 되는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유사'는 선종계통의 저술이라기보다는, 민족의식의 강조와 불교신앙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에서 제작된 문헌이라고 회자(膾炙)된다.

'삼국유사'는 그 내용의 구성이 정연하게 갖추어진 불교 사서로서의 체계를 갖고 있다. 스님은 사료의 발굴과 수집, 현지의 답사, 유적 확인, 객관적 서술 등을 통해 역사가로서 최선을 다해 이 책을 저술했다. 또한 단군신화를 처음 기록하여 우리 역사를 중국과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렸다. 뿐 만 아니라 사라진 가락국의 모습과 당에 예속되지 않기 위해 투쟁한 신라인의 자주의식을 살펴 볼 수 있게 하는 희귀 문헌이기도 하다. 동시에 신화학, 설화 문학, 불교 문화사, 국문학, 민속학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유사'에서 스님이 섭렵한 서적은 국내외를 망라하고 있다. 스님의 공부는 불교의 경전뿐 아니라 '논어(論語)', '주례(周禮)'와 같은 유가의 경전, 백가(百家)의 이론, 각종 사서와 고기류(古記類) 그리고 고문적(古文籍)을 포함해서 병법, 역법, 시가, 지리에 관한 것까지 각 분야에 걸치고 있다. 스님은 이렇게 많은 책들을 읽고 나름대로 소화해서 '삼국유사'에 자유롭게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스님의 수많은 저서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책이다. 우리나라의 고대문화를 총체적으로 전해주고 있는 이 책의 가치를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지만, 이 책이 전해지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 절대적인 도움이 되고 있다. 오늘날 스님의 '삼국유사'가 우리나라 민족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로 평가되는 것은 결코 과장된 언사가 아닌 것이다. 

이덕진 | 대행선연구원 편집위원장, 철학박사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