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하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홍길동전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이른바 호부호형(呼父呼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니, 과연 그랬을까? 그랬다. 소설가의 허구가 아니라, 조선의 서얼(庶孼)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였다.
서얼은 첩의 자식을 부르는 말이다. 여기에도 차별이 있어서, 《명종실록》에 의하면 “서(庶)란 것은 양첩(良妾)의 아들이고, 얼(孼)이란 것은 천첩(賤妾)의 아들”이다. 즉 양첩은 양인(良人)의 딸로 첩이 된 여자이고, 천첩은 노비(奴婢)나 기생으로 첩이 된 여자이다. 비록 서얼로 병칭되지만 얼자는 서자보다도 못한 종 취급을 당하였다. 홍길동은 서자(庶子)도 아닌 얼자(孼子)였던 것이다. 어숙권(魚叔權)이 지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서얼 자손에게 과거와 벼슬을 못하게 한 것은 우리나라의 옛 법이 아니다.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살피건대, 영락(永樂) 13년에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 등이 진언하여 서얼 자손에게는 높은 벼슬을 주지 말아서 그것으로 적서(嫡庶)를 구별하자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건대, 영락 13년 이전에는 높은 벼슬도 주었는데, 그 이후로는 과거를 정반(正班)에게만 허가하였고, 《경국대전》을 편찬한 뒤부터 비로소 금고(禁錮)를 하였으니, 지금까지 백 년이 채 못 된다.

영락 13년은 조선의 태종 15년(1415년)이다. 당시 서선의 진언으로 이른바 서얼금고(庶孽禁錮), 즉 서자와 얼자는 벼슬을 못하게 족쇄를 채우는 제도를 법제화했던 것이다.

어숙권의 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역임했던 어세겸(魚世謙)이다. 어세겸의 집안은 대대로 고관을 지낸 명문집안이다. 하지만 어숙권은 서얼로 태어났기에, 타고난 문재와 능통한 중국어 실력을 갖고서도 미관말직에 머무르고 만다. 《중종실록》 32년(1537) 4월 30일 기사에 반송사(伴送使) 정사룡(鄭士龍)의 보고가 실려 있다.

이문학관(吏文學官) 어숙권은 일로에서 수행할 적에 ‘학관’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명나라 사신들이 학교의 관원으로 잘못 알고 어숙권에게 준 시에, 교육자로서 인재를 만드는 일을 많이 말했습니다. 이는 명칭과 실지에 있어서 서로 맞지 않으니, 이 시도 역시 삭제해야 할 듯합니다.

이문(吏文)은 조선 시대 중국과 주고받던 특별한 공문서에 쓰이던 서체를 가리킨다. 중국의 속어를 섞어 쓴 순한문체로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사용된 글이다. 중국과의 외교가 특별히 중요했던 조선에서는 승문원(承文院)에 이문학관을 두어 이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면서도 문재가 뛰어났던 어숙권에게 최적화된 직업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하급 말단직에 불과하였다.

어찌되었든 어숙권은 중국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조선으로 오는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일에 자주 차출되어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정사룡의 보고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중국 사신들은 어숙권과 많은 시를 주고받았다. 당시에 중국의 사신들과 시를 주고받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숙권을 미관말직의 관리로 보지 않고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 정도로 학문이 높은 인재로 대우했었음에 틀림없다 하겠다.

반송사는 중국 사신을 맞아 안내하고 응접하는 일을 맡은 임시직이다. 비록 임시직이지만 이 일은 조선으로써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시를 주고받는 것이 외교의 주요한 일과였기 때문에 반송사는 대개 문장력이 뛰어난 고관이 맡았다. 정사룡은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조카로 명문가 출신에 당대의 문장가로 명성을 날린 분이다. 당연히 중국의 사신들과 많은 시를 주고받았을 것이고, 그의 《호음잡고(湖陰雜稿)》 〈황화화고(皇華和稿)〉에 당시에 지은 시들이 실려 있다.

조선에서는 중국의 사신들과 주고받은 시들은 모아 책으로 출간하였는데, 이를 ‘황화집(皇華集)’이라고 한다. 어숙권이 반송사로 나갔던 당시도 황화집을 출판하였다. 그런데 이 책을 편찬함에 있어 정사룡은 중국의 사신들이 어숙권에게 준 시를 삭제할 것을 주청하고 있다. 그의 직책과 실제가 맞지 않다는 이유를 들면서 말이다. 정말로 명실이 맞지 않았기 때문일까? 만약 그것이 이유라면, 부주(附註)로 사실여부를 밝히면 될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 삭제 이유는 어숙권이 미관말직 서얼에 불과하다는 것 말고는 달리 찾기가 어렵다.

2. 나라 안에 원망이 가득하다

1612년(광해군5) 조령(鳥嶺) 길목에서 은상(銀商)이 살해되고 은자(銀子) 수백 냥이 강탈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범인은 영의정 박순(朴淳)의 서자 박응서, 목사 서익(徐益)의 서자 서양갑(徐羊甲), 관찰사 심전(沈銓)의 서자 심우영(沈友英), 병사 이제신(李濟臣)의 서자 이경준(李耕俊), 상산군(商山君) 박충간(朴忠侃)의 서자 박치의(朴致毅)ㆍ박치인(朴致仁), 그리고 김평손(金平孫) 김평손(金平孫) 1)등 일곱 명의 서자들이었다. 이들은 진즉에 서얼들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누차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모방하여 스스로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부르며, 여주의 북한강변에 ‘무륜당(無倫堂)’이란 집을 짓고 술에 취해 세상에 대한 원망을 쏟아내곤 하였다. 그러다가 강도짓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들 일곱 명의 서자들과 연관된 친모, 친형제, 노비들까지 줄줄이 잡혀와 국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대부분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참형을 당하였다. 일곱 명 중에서 박응서는 살아남았지만, 박치의는 도망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고 나머지는 참형을 당하였다. 이를 칠서(七庶)의 옥(獄)이라고 한다.
박응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선조(宣祖)의 적자(嫡子)인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金悌南)을 제거하는 음모에 가담하였기 때문이다. 박응서가 이들과 함께 역모를 꾀하였다고 자백함으로써 이른바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 옥사로 김제남과 그의 세 아들이 죽임을 당하고, 당시 7살이던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에 살해된다. 인목대비 또한 이 일을 빌미로 후에 폐위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태종이 왜 서얼금고를 법제화하였는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기도 하지만, 모두 가당치 않은 말들이다. 귀족들이 그들의 권력을 독점적으로 누리고 싶어서 가능한 한 벼슬길을 제한하려 했다는 말은 매우 그럴듯하지만, 왕의 입장에서, 특히 태종처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왕의 입장에서는 이런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왕에게는 인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인재가 많을수록 나라가 부강해질 뿐만 아니라,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에게는 매우 유효한 견제가 되는 법이다. 이 좋은 일을 왕이 스스로 포기한다는 게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영조 41년(1765) 성대중(成大中) 등의 서자들을 등용하였다. 이들을 등용하며 영조는 재상들에게 물었다.

“하늘은 지극히 높지만 하늘이라 부르지 않은 적이 없고, 임금 또한 지극히 높지만 임금이라 일컫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서얼은 자기 부모를 부모라 부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하들은 말문이 막혀서 아무도 감히 논란(論難)하지 못하고 물러갔는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백성들은 다 같이 하늘을 아버지라 일컫고 땅을 어머니라 일컫는다. 그러나 감히 필부(匹夫)로서 하늘의 아들[天子]이라 일컫는 자가 있으면 육군(六軍)을 동원하여 쳐야 한다.”

이에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 말을 명언이라 일컬었다.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서얼론(庶孼論)〉에 나오는 말이다. 똑같이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어도 임금과 신하가 다르듯, 자식도 다 같은 자식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므로 서얼들은 함부로 아버지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의미인데...... 그 일이 과연 전군을 동원하여 징벌해야 하는 일과 비교가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산 정약용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예에 맞는 말이 아니다. 역시 영조대왕의 말이 정당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는 것은 자식이면 누구나 다 같이 일컫는 호칭이다.……그런데 어째서 부모라고 부르는 것까지 금지하는가.……그리고 무엇 때문에 서얼의 등용을 막는단 말인가. 한기(韓琦)의 어머니는 청주(淸州)의 비첩(婢妾)이었고, 범중엄(范仲淹)은 시집간 어머니를 따라가서 계부(繼父)의 성(姓)을 사용했다가 한림(翰林)의 벼슬에 오른 위에야 비로소 표문(表文)을 올려 이전의 성(姓)을 되찾았다. 송(宋) 나라에서 만일 이 두 사람의 등용을 막았더라면 홀(笏)을 잡고 정좌(正坐)하여 나라의 형세를 태산(泰山)처럼 안전하게 만들고 서하(西夏)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한기와 범중엄은 송나라가 배출한 최고의 명재상들이다. 조선의 고관들 중에 이 두 사람을 언급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정도로 두 사람은 존경의 대상이며 롤모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이른바 천출(賤出), 즉 서얼이었다.

예부터 지금까지 시대가 멀고 오래이며, 세상이 넓기는 하더라도 서얼 출신이어서 어진 인재를 버려두고, 어머니가 개가(改嫁)했으니 그의 재능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으니, 어머니가 천하거나 개가했으면 그 자손은 모두 벼슬길의 차례에 끼지 못한다.……한 사내ㆍ한 아낙네가 원한을 품어도 하늘은 그들을 위해 아파하는데, 하물며 원망하는 남정네ㆍ홀어미들이 나라 안의 절반이나 되니, 화평한 기운을 이루는 것은 또한 어려우리라.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이 그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유재론(遺才論)〉에서 한 말이다. 서얼이란 이름으로 타고난 재능도 써보지도 못하고 온갖 차별을 받아야 했던 일을 생각하면 그들의 절망과 분노가 어느 정도였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원망과 행적을 다 찾아내어 글로 옮긴다면 아마도 두꺼운 책 한 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진실로 허균의 주장처럼 나라 안이 온통 원망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조선은 요지부동이었다.

3. 서얼금고와 서얼허통 사이

서얼허통(庶孽許通)이라 하여 서얼에게도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영조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서얼이 주요관직에 등용되는 일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서얼들의 벼슬은 여전히 제한되어 있었고, 그나마 오래 있지도 못하였다. 영조가 성대중과 함께 등용한 이봉환(李鳳煥)과 남옥(南玉)은 최익남(崔益男)의 옥사에 연루되어 매를 맞아 죽었다.

1770년 전 이조낭관 최익남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소에 세손이 참배하는 일은 당연하다는 주장과 함께 사도세자의 죽음에 당시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죄를 물을 것을 청하였다. 이 한 번의 상소문으로 최익남은 영원히 서인으로 강등되고 끝내 매를 맞아 죽었다. 이 일에 대한 영조의 교지는 다음과 같다.

간특한 무리는 나라 안에 함께 두지 않는다는 성인의 뜻을 본받아서, 최익남을 대정현(大靜縣)으로 유배하여 영원히 서민을 삼되, 하루에 사흘 길을 걸어서 압송할 것이며, 상소문은 즉각 불살라버리고 전하여 보인 자도 엄중히 죄를 물어라. 2)

최익남의 상소가 영조의 아픈 곳을 찌른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서얼 이봉환과 남옥이 최익남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끌려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최익남은 훗날 정조 때에 복권되었다. 그러나 이봉환과 남옥도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차피 서얼들이었다.

서얼허통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는 서얼금고의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와 주장이 간단없이 지속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1415년 서얼금고가 처음으로 법제화하고, 어숙권이 《패관잡기》에서 그 부당함을 지적했을 때가 대략 16세기 초다. 그리고 정약용이 다시 그 부당함을 논할 때는 18세기 초로, 그 사이에 서얼금고의 혁파를 주장하는 상소와 글은 무수히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얼금고법은 조선이 망해가는 19세기까지 존재하였다.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에도 그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어 드라마의 소재가 되곤 한다.

서얼허통을 반대하며 서얼차대(庶孽差待), 즉 서얼에 대한 차별대우를 강력하게 지지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절개와 충절로 유명한 동계(桐溪) 정온(鄭蘊)이다.

서얼의 허통 문제에 대하여 조정의 논의가 한곁같지 않은데, 대저 행할 만하다고 하는 자가 반이 넘습니다마는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기필코 시행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우리 국가가 200년 동안 유지하고 공고히 해 오면서 거의 망할 뻔하다가 다시 흥기한 것은 명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자와 얼자 사이의 존비(尊卑)의 구분은 하늘의 법과 땅의 의리로서 문란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3)

1625년(인조3) 정온이 도승지를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에 들어 있는 글이다. 과연 적서(嫡庶)의 차별이 하늘의 법이고 땅의 의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온의 상소문은 서얼차대나 서얼금고를 지지하는 선비들의 주요 논거가 되었다. 정온에 대한 후학들의 존경심을 생각하면 결코 작지 않은 영향력이었다. 하지만 영향력으로만 본다면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보다 더 크지는 않을 것이다.

가정 병진년(1556, 명종11) 12월에 고을 사람 이황은 서한다. …… 첩으로 처를 삼은 일, 서얼로 적자를 삼은 일, 적자가 서얼을 사랑하지 않는 일, 서얼이 도리어 적자를 능멸하는 일 …… 이상은 극벌(極罰)에 해당한다. 4)

이황 선생의 《언행록(言行錄)》에 실려 있는 말이다. 한 번 첩은 영원한 첩이었고, 한 번 서얼은 결코 바뀌지 않는 서얼이었다. 본처가 죽으면 첩이 본처가 될 수도 있고, 적자가 없으면 서얼이 가통을 이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데, 조선에서는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차별이 이황 선생이 손수 쓰신 글 속에 아무런 의식이나 반성 없이 적혀 있다.

정온이나 이황은 그 누구보다 주자(朱子)를 흠모했던 선비였다. 하지만 주자가 언제 서얼차대나 서얼금고를 말한 적이 있던가. 오히려 천하동례(天下同禮), 왕이든 사대부든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는 예의 보편성을 강조했던 것 아닌가. 하지만 천하에 오로지 조선에만 존재했던 서얼금고법은 누구보다도 주자를 존경했던 선비들에 의해 고착화되었다.

일찍이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납속책(納粟策)이란 서얼허통책을 제시하였다. 이 정책은 서얼들이 곡식을 바치면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일은 본래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는 벌금을 내면 죄를 감해 주겠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없던 족쇄를 채우고는 족쇄를 풀어 줄테니 돈을 내라고 한 셈이니, 국가가 법의 이름으로 행한 강도짓과 다를 게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라도 해서 서얼들에게 길을 터주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보아야할까. 하지만 참으로 슬픈 일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호부호형을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얼은 외가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선은 적고 악이 많다’고 합니다.……지금 서얼들이 여러 사람들의 열에 들지 못하고 하나의 죄인이 되어, 몸을 옹송그려 아양을 부리고 종처럼 비굴하게 알랑거리면서 욕을 면하고 동정을 받습니다. 가업을 잃어버려서 스스로 봉양할 여가가 없으므로, 편협하고 강개한 무리는 슬피 노래 부르며 세상을 숨어 살고, 칼을 어루만지며 무리를 불러 모으고, 호탕하고 방일한 기개는 시장이나 개 잡는 천한 일에 붙여버리며, 중질 이하는 가난하여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매 떳떳한 본성을 잃어서 모두 모리배가 되고 마니, 이러한데도 착한 사람이 많지 않음을 나무라는 것은, 사람을 똥구덩이에 밀어 넣고서 더럽다고 침을 뱉는 격입니다. 5)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서얼금고를 혁파할 것을 주장하며 한 말이다. 사람을 똥구덩이에 처넣고는 도리어 더럽다고 침을 뱉는 것. 그것이 서얼차대의 실체였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처럼 나라가 위급할 때는 서얼이든 노비든 구제책을 남발하며 그들의 힘을 빌렸다. 하지만 난이 평정된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어느덧 사람들의 입에서 천출이란 말이 익숙해질 즈음, 서얼들은 이미 비루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당당하게 하늘을 머리에 이고 굳건히 땅을 딛고 서야할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참혹하게 슬픈 일이었다.

주) -----
1) 대신 허홍인(許弘仁)을 칠서로 보는 경우도 있다.
2)《영조실록》 46년(1770) 11월 10일 기사
3)《동계집》 권3 〈도승지(都承旨)를 사직한 상소〉
4)《퇴계선생언행록》 〈유편(類編)〉
5) 《성호사설》 권8 〈서얼방한(庶孽防限)〉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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