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부 적음스님 진영

초부 적음((草夫 寂音, 1900~1961) 스님은 선우공제회 서무부 이사,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 상무이사 및 제3대・제5대 이사장, 호국역경원 초대 원장, 마곡사 주지 소임을 역임했다.

‘초부(草夫)’는 ‘풀로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이’라는 뜻이고 ‘적음(寂音)’은 ‘미묘(微妙)하고 부동(不動)한 자리에서 널리 중생을 깨우치는 법을 설함’을 의미한다.

스님은 경북 군위군에서 1900년 11월 1일에 태어났다. 속명은 영조(永祚)이다. 총명함이 뛰어나 12세를 전후로 유가 경전을 모두 체득하였다. 어릴 적 불치병을 앓다가 침을 맞고 병이 나은 것을 계기로 스승에게 침술(鍼術)을 배웠다. 일찍이 침으로 세인의 병을 다스렸고, 20세를 전후하여 신의(神醫)로 명성이 높았다.

직지사에서 불가와 인연을 맺은 스님은 청년기,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을 보며 조국의 실상에 눈을 뜨고 전법구생(傳法救生)의 서원을 품었다. 1922년 선우공제회 서무부 이사 소임을 맡았고, 1924년 직지사 제산(霽山)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927년 직지사에서 사교과를 마쳤으며, 1930년 만공(滿空) 스님에게 입실 건당하였다. 이때 받은 법호가 바로 ‘초부(草夫)’이다.

침술(鍼術)이 뛰어난 까닭에 스님이 머문 선학원에는 병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스님은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이건 치료비를 받지 않으려 했다. 수행과 신묘한 의술이 널리 알려져 재력 있는 사람도 스님을 찾아왔다. 그들이 고집을 부려가며 한사코 놓고 간 보시금이 모이고 모였다. 궁핍했던 선학원은 이 보시금으로 도량을 정비할 수 있었고, 해방 이후에는 정화불사 기금의 근간이 되었다. 세간에서는 “선학원의 중창주(重創主)는 적음 스님”이라는 이야기가 풍미했을 정도였다.

1931년은 여러모로 기억할만한 일이 많이 일어난 해였다. 선학원 재건의 시기이기도 하거니와 ‘남녀선우회(男女禪友會)’ 조직과 ‘전선수좌대회(全鮮首座大會)’ 개최 등 중요한 일이 봉행되었다. 이 해에 ‘부인선우회’의 총회를 개최(1935년 초에는 선학원 옆 안국동 41번지에 선원을 개설)하였다.

1931년 3월 14일 열린 전국수좌대회〔全鮮首座大會〕에서 적음 스님은 중앙선원 설치를 건의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예산 부족으로 부결되었다. 또한 같은 해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는데 10월 6일 불교잡지 〈선원(禪苑)〉을 창간한 것이다. <선원>은 ‘선리를 참구하는 건전한 신앙의 확립’을 원력으로 삼았으며, ‘한국불교의 독자성과 정통성을 강렬히 천명’한 것이 특색이다.

선학원에서 선리참구원(禪理參究院)으로 조직이 개편된 여파로 4호는 1935년에 다소 늦게 발행되었다가 결국 종간되었고, 이후 2008년 다시 복간되었다.

1932년 적음 스님은 부산 범어사에서 도첩(度牒)을 받았다. 선학원은 1933년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종헌 발포 기념식’을 거행하는 한편, 그해 8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을 설립 인가를 신청했다. 1년여의 진통 끝에 1934년 12월 5일 법인 자격을 취득하고, 그달 20일 설립 등기를 마쳤다.

스님이 상무이사를 맡으신 ‘선리참구원’은 조선불교 선리의 수행과 연구에 의하여 승려 및 일반 신도에게 정신적 수양을 베풀기 위한 각종 시설을 하려는 것이 법인 구성의 목적이다. 재단법인이 설립됨으로써 선학원은 명실공히 중앙선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선학원은 창건이후 선학원 자체에 의한 자력구제 방안을 꾸준히 강구하게 되어 법인의 설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같은 해 12월, ‘조선불교선종 종헌’을 제정하게 된다. 종헌의 선서문에 의하면 ‘전국수좌대회 조선정통수도승 일동은 한국불교의 선(禪) 전통을 일본불교의 침탈로부터 수호할 것’ 등의 중요 내용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스님은 묘향산 상원암(上院庵)에서 부단히 정진행을 했다. 상경하면 도반이자 각별했던 17년 연상의 친우 홍진우 거사와 함께 자주 동행하곤 했는데, 도반에게 동수정업(同修淨業)을 권하는 스님의 편지가 최근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개관을 기하여 공개됐다.

 평북 영변 묘향산 보현사 상원선원에서 보낸 적음스님의 초서체 서간문

1941년에는 조선불교 정통성을 회복·계승하고 승풍의 진작을 위해 개최된 유교법회가 개최되었다. 스님은 이에 동참, 비구승으로 결성된 범행단(梵行團)을 결성해 선학과 계율의 종지를 선양하기 위한 청정비구승단의 기초를 닦았다. 다음해 4월에 스님은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제3대 이사장(1942~1946)에 추대되었다. 1942년 10월에는 선학원에서 만해 용운, 성월일전(惺月一全), 만공월면(滿空月面) 등 8명 납자가 발기하여 <경허집(鏡虛集)>을 발간하였다.

해방 직후, 12월17일 서울 충무로 3가 50번지에 있는 정토종 본원사에 호국역경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에 취임, 다음해인 1947년 1월, 해동역경원을 설립하고 역시 초대 원장에 취임했다. 1950년 4월 20일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제5대 이사장 추대되어 1960년까지 임기를 맡았다. 1954년 6월24일, 정화운동 발기인대회에서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선학원의 부동산을 매각하여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에 제공하는 등 정화불사를 위한 정재를 꾸준히 마련하여 보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일제 강점기 당시 부당하게 선학원 건물이 덕성재단에 강제 매각된 것에 대한 부당성을 꾸준히 제기하였다. 6년간의 긴 소송 끝에 1956년, 법원 확정 판결로 승소, 소유권을 결국 회복하게 된 쾌거를 이루게 것이다.

1955년, 스님은 공주 마곡사 주지로 취임하는 한편 이듬해 1956년 3월에는 선학원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5년간 활동하셨다. 일제의 강점기와 민족동란과 정화불교의 시간들을 보며 스님은 꾸준히 자비구제행을 하였고 감인(堪忍)의 중생을 위한 보살행은 멈추지 않았다. 중생의 병이 깊은 까닭이었을까. 안타까워하던 노년의 스님도 병고가 깊어졌다. 스님은 결국 1961년 10월3일 세수 61세, 법납 39세로 서울 선학원에서 입적했다.

재단법인 선학원 설립 중흥조 이자 3대, 5대 이사장을 역임했던 적음 스님은 선 수행의 안정된 기반 조성을 위해 노력했고, 경전 역경사업을 통해 불법홍포와 전법구생과 정화불교의 선봉에서 있었다. 스님은 선학원의 중창주(重創主)라 불렸다. 곤궁하고 암울했던 시기에도 불구하고 민족불교의 중흥과 정화불교의 기치를 올렸기 때문이다. 여러 수좌스님을 보우하는 한편 정화불교의 재정기금 조성과 불교(대학) 교육에 대한 적극적인 모색을 아끼지 않은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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