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최연식은 “《진심직설》에서는 진심(眞心)을 말한다. 이는 여래장적인 표현이고 지눌의 중생심이 바로 근본보광명지의 현현이라고 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라고 한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두 가지 점에서 견해를 달리한다.

① 먼저 지눌 사상과 여래장 사상과의 관계를 보자. 여래장 사상은 ‘일체 중생이 여래장’임을 선언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들 중생의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소리를 들으면, 미혹한 중생에 불과한 내 안에 있는 부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가슴이 뛴다. 여래장에서는 인간을 ‘자성청정심 객진번뇌염(自性淸淨心 客塵煩惱染)’이라는 명제로 정의한다. 이 언명은 자성청정심으로 여래와 중생의 동일성을, 객진번뇌염으로 여래와 중생의 차이성을 동시에 설파하고 있다. 따라서 자성청정심 객진번뇌염이라는 언명은 동일성과 차이성의 동시 성립을 표방한다. 합리적이라 말할 수 없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모순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접근 방법을 통해 여래장을 말하는 사람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또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전제는 연기성공(緣起成空)이고, 공(空)은 무자성(無自性)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래장 사상은 중생에 있어서의 ‘여래장의 존재’, 즉 (불)성을 강조한다. 실체론에의 위험을 무릅쓰고 여래장을 말하는 사람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다. 여래장이라는 방편을 통하여 열반을 얻고자 함이다. 열반이란 무엇일까? 궁극적인 해탈은 아마도 절대적인 자유, 절대적인 정신, 절대적인 행복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송본사랑(松本史朗)처럼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라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래장사상만큼 불교 정신에 투철한 사상은 없다고 생각한다.

지눌은 표면적으로 점종인 신수의 북종을 폄하한다. 그렇지만 지눌의 사상은 내부적으로는 신수를 대표로 하는 북종의 견해와 접점이 있다. 우리가 흔히 남돈북점이라고 남종선과 북종선을 구분하지만, 엄격히 본다면 이것은 오(悟)에 있어서 분별이 아니라 수(修)에 있어서 돈점(頓漸)이라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지눌은 혜능의 돈오를 수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점수의 부분을 강조한다. 즉 북종선의 입장과 배반되지 않는다.1)

지눌은 표면적으로는 북종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지눌은 다른 한편으로는 정혜(定慧)의 이문(二門)을 논구함에, 중국 선종사의 입장에서 상반․대립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남종 혜능과 북종 신수의 선사상을 포섭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즉 중국 불교는 두 가지 계열이 있다. 그 하나는 자성청정심을 돈오함을 중심으로 하는 성종(性宗) 계열이다. 화엄과 여래장사상 그리고 혜능의 남종선 사상이 여기에 속한다. 나머지 하나는 객진번뇌염을 점수를 통해서 털어 내고자 하는 상종(相宗) 계열이다. 유식과 신수의 북종이 여기에 속한다. 이 같은 이중구조를 중국불교에서는 상호 용납하지 않고 배타적으로 어느 하나를 선택했다. 그러나 독자적인 안목을 가진 지눌은 이 두 가지 계열을 수용․회통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눌을 이해함에 상(相)의 입장을 배제하고 성(性)의 입장만을 중시해서는 안 되고 성상융회(性相融會)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또한 혜능의 남종선이나 임제종 중심의 맥락에서만 지눌을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는 문제가 될 수 있다.2) 그렇지만 지눌의 사상적 경향을 북종선과 연계해서 이해하려는 입장은 자료의 측면에서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지눌은 그의 저작 전체에서 북종인 점종을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지눌의 사유 경향이 부분적으로 북종선과 접점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눌을 북종과 연계하기 어려운 것이다.

지눌과 북종선에 대한 최연식의 잠정적 결론은 이렇다. 명목(名目)은 다르나 의세(義勢)는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지눌 사상 내부에 여래장 사상이 없다는 최연식의 의견에 승복할 수가 없다.

② 다음으로 《진심직설》과 원돈신해문의 사상을 비교해보자. 사실 진심이나 영지라는 용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맥락이다. 한 군데만 예를 들어보자. 《진심직설》(<진심정신>)과 원돈신해문(《원돈성불론》)의 내용은 아래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같은 맥락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최연식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진심직설》: 조(사)문의 바른 신심은 이(교문)와 다르다. 일체의 유위인과를 믿지 않고 다만 자기가 본래 부처여서 천진한 자성이 사람 사람이 갖추어 열반의 묘한 체가 낱낱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므로 다른 데서 구하려고 할 필요가 없고 원래 저절로 자기에게 갖추어져 있음을 믿는 것이다.

《화엄론절요》: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비록 이름이 다르고 의지하는 객관적(客觀的) 보(報, 依報)와 직접 받는 몸〔正報〕의 장엄함은 각각 다르지만, 다 자기 마음의 보광명지(普光明智)의 모양[相]과 작용[用]일 뿐이며 다 바깥 물건이 아니다. 자기 마음의 보광명지가 허공과 법계와 같음을 헤아려서 한 부처도 근본지혜[本智]로부터 나오지 않음이 없으며 한 중생도 근본지혜로부터 나오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알아라. 부처와 중생이 지혜를 의지해 허깨비로 나고 지혜를 의지해 허깨비로 머무는 것이어서 나지만 나온 곳이 없고 죽어도 가는 것이 없다. 그래서 논에 이르시기를, “자심(自心)과 객관경계(客觀境界)와 나와 남이 모두 참인 줄 알면, 모든 중생심과 자심과 여래의 마음과 몸이 동일한 체상(體相)이어서 (현상은) 다 허깨비인줄로 보아, 생주멸괴(生住滅壞)의 상(相)을 보지 않으면 〔도(道)에〕 가까울 것이며, 이것을 모르고 따로 구하면 (도에서) 멀어질 것이니, 이 같은 법은 경(經)에 널리 밝힌 바와 같다.” 하였다. 또 논주가 송에서 말하기를, “부처는 중생의 마음속의 부처이며 자기 근기에 따라 (부처와 중생이 있을 뿐) 다른 물건이 아니다. 일체 제불의 근원을 알고자 하거든 자기의 무명이 본래 이 부처인줄 깨달아야 할 것이다.”하였다.


2) 마음에 대한 이해의 비교3)

최연식은 “마음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이를 가리키는 용어에서부터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진심에 대하여 3가지를 이야기한다.

①의 경우에는 필자는 최연식의 견해에 동의한다. 최연식은 진심을 모든 만물을 형성하는 근원으로 본다고 했지만, 《진심직설》에는 실재론적인 표현이 지나치게 많다. 예를 들면 ‘진심의 본체는 인과를 초월했고 …… 허공이 어디에나 두루한 것과 같다’, ‘온 산하대지와 초목총림과 삼라만상이 여기서 나온다’, ‘일체세계가 발생되는 근원이다’ (<진심묘체>)등이 그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지눌의 마음 이해는, 아래에 인용되는 《수심결》을 제외하고, 반실재론적인 경향을 견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심에 대한 이러한 실재론적인 표현은 지눌 사유체계 내에서 수용되기 힘들다.

②의 경우 진심과 망심에 대해서는 최연식의 견해에 반대한다. 아래의 인용문은 최연식이 바로 그의 논문에서 인용한 그 문장이다. 이 문장은 최연식의 견해와는 달리 본체론적인 진심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다음을 보자.

색신(色身)은 거짓이라 나고 멸(滅)함이 있지만, 진심(眞心)은 허공(虛空)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온 몸은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一物, 마음]은 길이 신령(神靈)하여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고 한 것이다.

인용문에서 ‘한 물건(일물)’은 주어이다. 주어인 일물에 ‘길이 신령스럽다’라는 술어적 표현을 붙인 것이다. 만일 일물이 실재가 아니라 존재를 언어로 표현하고자 붙인 가명(假名)이라면 긍정적 서술은 곤란하다. 다시 말해서 일물이 실재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에 그치는 표현이라면 일물에 술어를 붙인다 하더라도 부정적 언표로 그쳐야지, 긍정적 서술은 붙일 수가 없다.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가는 곳이 아닌데 어찌 긍정적 서술로서 존재를 나타낼 수 있는가. 또 지눌은 몸과 마음을 대비한다. 백해(百骸)는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마음만은 장령(長靈)하다고 한다. 신심(身心)을 이원(二元)으로 나누어서 보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지눌의 초기 사상에는 실재론적인 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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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주목할 만하다. 강혜원(姜慧謜), <북종선(北宗禪)과 보조선(普照禪)의 상통성(相通性)>, 《한국불교학(韓國佛敎學)》 12집.
2)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이 주목할 만 하다. 김호성(金浩星), <보조(普照)의 이문정혜(二門定慧)에 대한 사상사적 고찰>, 《한국불교학》 14집.
3) 본문의 번호는 최연식의 글에 대한 필자의 분류에 의한 것이다. <진심직설 논쟁> ①, ②, ③을 참고하기 바란다.
4) 여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주목할 만하다. 김호성, <보조선(普照禪)의 실재론적(實在論的) 경향과 그 극복>, 《동서철학연구》 7호.

이덕진 | 대행선연구원 편집위원장,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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