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에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 다녀왔습니다. 도착 후 얼마 동안은 여행지를 잘못 선택했다고 자책했습니다. 우선 날씨가 너무 더웠습니다. 이맘때가 이곳에서는 우기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한여름 날씨였는데 더 덥고 습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4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인데 그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도로는 밤이고 낮이고 언제나 꽉 막혀 마음껏 돌아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웠던 것은 수레에 묶여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혼잡스런 도로에서 말들은 더위와 소음에 노출되고 눈이 가려진 채 손님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사람을 태운 수레를 힘겹게 끌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말들을 그런 환경으로 내모는 사람들을 미워할 수도 없었습니다. 말들 옆에는 새카맣고 깡마른 얼굴의 인력거꾼들이 있었으니까요. 말이나 사람이나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좀 이상했습니다. 내 상식으로 여기는 정말 살기 힘든 곳입니다. 가난하고 덥고 시끄러웠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불행하고 불친절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이곳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고 밝았습니다. 언제나 웃는 얼굴이고, 무엇을 묻더라도 도와주고 싶어 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도 친절하고 밝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쿠르드족에 관한 최초의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란, 2000)은 인도네시아에서 경험한 것과 어느 정도 닮았습니다. 힘겨운 삶을 사는 말들이 나오고, 어려운 삶에 내몰리지만 아름다운 마음을 잃지 않는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너무나 처참해서 인도네시아 말들의 처지가 오히려 사치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쿠르드족은 세계에 3000만에서 4500만 명이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없는 민족입니다. 터키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의 국경지대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갖고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마을로 쿠르드족 거주지입니다. 이곳은 이란과 이라크의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졌으며, 마을 곳곳에는 지뢰가 묻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라가 없는 쿠르드족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언제 지뢰를 밟아 죽을지 모르지만 이곳은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인 것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소년이 처한 현실이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영화를 보고 났을 때 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어린 소년을 처참한 환경에 내모는 현실에 분노하고, 가혹한 현실에도 아랑곳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고, 아픈 형제를 먼저 생각하는 이타심과 숭고한 희생에 가슴 따뜻해지고,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하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비극적인 삶의 조건

12살 소년 아윱은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됐습니다. 어머니는 막내를 낳다가 돌아가고 아버지마저 밀수에 나섰다가 지뢰를 밟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졸지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막노동을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가 않았습니다.

아윱에게는 아픈 형이 있습니다. 형 마디는 15살이지만 3살 이후로 자라지 않는 왜소증을 앓고 있는데, 수술을 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윱은 형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심부름꾼으로 밀수에 참여했습니다.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추위가 지독한 지 말과 노새에게 술을 먹여야만 눈길을 걸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인 것입니다. 이런 추위에도 어린 소년은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말의 고삐를 끌어야 했습니다. 언제 나타나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갈지 모르는 무장 강도도 피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전쟁 때 묻어놓은 지뢰를 조심해야 했습니다. 운이 나쁘면 아버지처럼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여정이었습니다.

아윱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자주 품값을 떼여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고, 마디의 수술 날짜는 점점 다가왔습니다. 마음이 다급해진 누나 로진은 자신이 마디의 수술비를 마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라크로 시집을 가는 것입니다. 동생들과 헤어져야 하고, 고향을 떠나야 하고, 정말로 원하지 않는 결혼이지만 마디를 위해서 자신이 희생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디를 수술시켜달라는 조건을 걸고 마디를 데리고 이라크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신랑의 어머니는 노새 한 마리로 신부 값을 치른 후 마디를 돌려보냈습니다.

아윱은 누나 로진이 팔려가다시피 시집가면서 얻게 된 노새를 팔아 수술비를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마디를 수술시켜 데려오겠다는 계획을 갖고 또 다시 밀수 행렬에 합류했습니다. 마디를 노새 위에 싣고 밀수꾼들을 따라나선 길에 아윱은 매복한 무장 강도들의 습격을 받는데, 취해버린 노새들은 달아나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다른 밀수꾼들은 노새와 물품을 버리고 도망가지만, 아윱은 마디의 생명을 구해 줄 유일한 희망인 노새를 두고는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아윱은 쓰러져 있는 노새의 뺨을 때리며 제발 일어나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술에 취한 노새는 꼼짝도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는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윱이 아픈 형 마디를 업고 노새를 데리고 이라크 국경을 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말도 짐도 버리고 도망갔지만, 결코 현실에 굴복할 수 없었던 아윱은 온 힘을 다해 버텼기 때문에 노새를 잃지 않았고, 형의 목숨도 구하게 된 것입니다. 감독은 아마도 이 장면을 통해 쿠르드족이 지금은 무척 힘들지만 희망을 잃지 않으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가혹한 현실도 뛰어넘는 형제애

왜소증을 앓고 있는 마디는 아윱 형제들에게는 독특한 존재입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부담인 동시에 희망입니다. 형제들의 삶을 고단하고 힘겹게 한다는 점에서는 짐이지만, 또한 마디를 구심점으로 해서 형제들이 단합하고, 마디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살아간다는 측면에서는 삶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고난인 동시에 삶의 에너지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연기’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날 때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질 때 저것도 소멸한다’고 하셨습니다. 극단으로 여겨지는 양면이 사실은 상대에 의해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큰 것과 작은 것이 공존하고, 중생이 있어야 부처가 있는 것처럼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관계성을 보여준 가르침입니다.

마디가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가장 무겁고 힘겨운 짐인 동시에 힘겨운 현실을 견디게 하는 에너지인 것입니다. 마디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윱은 말들조차 술을 먹어야만 견딜 수 있는 눈길을 짐을 진 채 헤쳐 나가야 하고, 또 언제 무장 강도를 만나고 지뢰를 밟을지 모르는 길을 목숨을 걸고 걸어야 했습니다. 또 누나 로진은 가족들과 헤어져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낯선 곳으로 시집가야 했고, 형제들은 마디를 위해서 너무 큰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이것에 대해서 고통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은, 마디를 구하는 일이 이들에게는 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짐이 되기 위해선 진 자가 그것을 의식해야 하는데, 아윱 형제들에게 마디는 어느 순간 자신과 동일체가 돼버린 것입니다.

이들은 마디와 자신을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분리했을 때는 마디가 짐이 되지만 분리하지 않았을 때는 마디를 구하는 것이 결국 자신을 구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오직 희망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디의 건강이 조금 좋아지면 형제들은 그간의 고생은 다 잊고 희망과 기쁨을 느꼈으며, 마디가 아프면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오직 마디가 삶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마디는 쿠르드족에게는 자신의 민족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왜소하고 아프다는 것은, 쿠르드 족이 나라 없이 다른 나라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현실을 빚 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윱 형제들이 마디를 중심으로 뭉치고 최선을 다해 마디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쿠르드족은 자신의 민족끼리 뭉쳐서 살아남는 것 이외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쿠르드족 최초의 감독인 바흐만 고바디는 이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을 통해 쿠르드족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마도 이 영화가 주는 강한 울림이 없었다면 나 같은 경우는, 이란에 사는 유목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 정도로만 쿠르드족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픈 현실이 그들에게 있다고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라 없는 민족의 아픔을 말한다면, 티베트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라이 라마를 통해 티베트 민족이 나라를 잃고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망명정부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지만,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쿤둔>이나 장 자크 아노 감독의 <티벳에서의 7년>과 같은 영화가 아니었다면, 이 민족의 독립을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 같은 건 생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영화는 이렇게 힘이 셉니다. 현실 참여 문학이 있지만 지금은 그 역할의 상당 부분을 영화가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매우 효과적입니다. 나처럼 남 일에 무관심한 사람도 <취한 말들의 시간>을 본 후, 이제는 쿠르드족에 관한 뉴스가 나오면 귀를 세우고 관심을 갖게 됐으니까요.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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