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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여인의 향기
살겠다고 소여물 먹고도 부끄러움 모르고
2018년 02월 27일 (화) 17:50:40 김문갑 meastree@naver.com

1. 유배

호전(胡銓, 1102〜1180)은 강서성(江西省) 길주(吉州) 여릉(廬陵) 사람이다. 자는 방형(邦衡), 호는 담암(澹庵),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128년 벼슬길에 나섰을 때는 나라가 수도를 임안(臨安)으로 옮긴 지 겨우 1년밖에 안 되었을 때였다.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이 개봉(開封)을 수도로 송(宋)을 세운 지 160여 년이 지났다. 학문과 예술이 크게 융성하였고, 물자 또한 풍부하여 무수히 많은 문인(文人)과 재사(才士)들이 배출되었다. 보기 드문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성취가 이루어졌다. 다만 근심은 북쪽의 오랑캐(?)들이었다.

송은 거란(契丹), 서하(西夏) 등과 때론 싸우고 때론 화친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거란의 요(遼)를 무너뜨린 여진족의 금(金)나라에게 개봉이 함락되고, 남쪽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정강(靖康)의 변(變)이다.

1125년 개봉이 금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자, 휘종(徽宗)은 돌연 제위를 아들 조환(趙桓)에게 물려준다. 그가 흠종(欽宗)이며, 정강은 흠종의 연호이다. 흠종은 일단 금나라와 화의(和議)를 맺고 급한 불을 껐다. 그러나 조정은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로 갈려 심각한 분열상을 노출하였고, 황제는 이런 사태를 수습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1127년 개봉이 함락될 때 흠종은 아버지 휘종과 함께 금나라에 끌려갔다. 이것이 정강의 변이다.

흠종의 아우 조구(趙構)가 황실과 유민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양자강 유역의 임안(臨安)을 도읍으로 정하고 제위에 올랐다. 바로 남송(南宋)의 개국황제 고종(高宗)이다.

남송의 조정 또한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대립과 갈등이 심하였다. 이럴 때 호전이 벼슬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호전은 젊은 학자로서 소리 높여 주전론을 전개하였다. 호전에게 주화파들은 쉽게 북쪽을 내주고 남쪽으로 내려와 자신의 안위나 돌보는 소인배들로 비쳐졌다. 특히 진회(秦檜)를 중심으로 왕륜(王倫), 손근(孫近) 등 집권세력들이 미개한 야만인들에게 허리를 굽히며 아부하는 꼴은 참으로 민망하였다. 저들은 화친이란 명목으로 매년 엄청난 세금을 갖다 바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도 몰랐다. 호전은 분연히 붓을 들었다.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에는 이들 세 사람을 저자거리에 끌어다 놓고 목을 치라는 그의 외침이 실제로 들리는 듯하였다. 호전의 상소문은 많은 것을 잃어버린 남송의 백성들에게는 여름날의 소나기와도 같았다. 당장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 무너진 자존심을 세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상소문으로 호전은 강직한 우국지사의 표상이 되었다. 그의 분노는 지사의 징표이었고, 그의 절개는 충신의 모범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내려진 명령은 유배였다. 충신의 길이 대개 그러하듯이 풍토가 다른 먼 외딴섬에 내쳐졌다.

해남도(海南島). 오늘날 관광지로 유명한 이 하이난 섬은 중국 역사에서는 유배지로 명성이 자자하던 곳이다. 이곳의 오공사(五公祀)는 여기에 유배되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히 다섯 명의 충신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강(李綱), 이덕유(李德裕), 조정(趙鼎), 이광(李光), 그리고 호전이 그들이다. 호전의 충절은 유배지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2. 귀향

해남도에서 호전은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교화에 힘썼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뒤에야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귀향길에 하루는 상담(湘潭)의 호씨원(胡氏園)이라는 여관에 묵게 되었다. 10년간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육지 여인의 향기에 취해서였을까. 호전은 시중드는 여인이 참으로 예뻐 보였다. 여천(黎倩)이란 여인이었다.

호전은 주체하지 못하고 여천에게 빠져들었다. 그가 여천을 유혹했는지, 혹은 강제로 범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주인에게 들켜 봉변을 당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주인은 호전에게 소여물을 먹으면 용서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는 소여물을 먹었다.

여천이란 여인의 신상에 대해서는 대략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기녀(妓女), 둘째는 호씨원에서 심부름하는 시녀, 그리고 셋째는 호 씨의 아내이다. 이 일의 경과를 통해 추론해 보면, 여천은 주인 호 씨의 아내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왜냐하면 기녀나 시녀에게 수작을 걸거나 정을 통했다고 해서 소여물을 먹이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대는 지위와 명성이 있는 전직 관료가 아닌가. 이런 사람에게 소여물을 먹이면서까지 화를 냈다면, 부인이거나, 적어도 매우 사랑하는 첩을 추행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여튼 호전은 10년 공부, 아니 평생 세운 공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다시 세월이 흘러 호전은 우연히 상담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호씨원에 들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임금의 은혜로 귀향길에 여기에 들러 한번 취했을 때 君恩許歸此一醉
옆에 있던 여인의 볼에 작은 보조개 생겼지 傍有黎頰生微渦

보조개가 얼마나 예뻤으면 정신 못 차리고 빠져들었을까? 이 시를 지어 벽에 걸 때 호전은 이미 지위도 높고, 학자로서의 명성 또한 드높던 중년의 남자였을 것이다. 그에게는 소여물을 먹어야 했던 끔찍한 기억보다는 어느 여인의 보조개에 빠졌던 한 사나이가 더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3. 평가

다시 더 많은 세월이 흘러 남송의 대학자 주희(朱熹)가 우연히 이 호씨원에 들렀다. 그리고 호전의 시를 보고 두 편의 시를 남긴다. 〈매계의 호씨네 여관에 묵다가 벽에 걸려 있는 시를 보고 스스로를 경계하는 절구 두 편을 짓다〔宿梅溪胡氏客館觀壁間題詩自警二絶〕〉라는 시이다.

살겠다고 소여물 먹고도 부끄러움 모르고 貪生莝豆不知羞
뻔뻔스레 다시 와서 시흥을 즐기네 靦面重來躡俊遊
맑은 물에 옷깃을 빨지 말라 莫向淸流浣衣袂
그대 옷깃에 맑은 물 더러워질라 恐君衣袂涴淸流

바닷가에 떠돌던 10년 일신은 가벼운데 十年湖海一身輕
귀향길 여천의 보조개에 도리어 욕정 일었네 歸對黎渦却有情
세상에 인간의 욕망만큼 위험한 것 없으렷다 世路無如人欲險
몇이나 이 지경에 이르러 평생을 그르쳤던가 幾人到此誤平生


주희는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경시(自警詩)’로 이 시를 썼다. 호전을 한순간 욕정에 사로잡혀 순식간에 평생을 그르친 바보로 만들면서 말이다. 호전이 세운 수많은 학문적, 정치적 업적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호전이란 이름은 찰나의 욕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소여물을 먹으며 삶을 구걸해야 했던 한 남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더구나 주자학(朱子學)이 국학의 대우를 받아서는 호전에 대한 주희의 평가는 가차가 없었다. 특히 조선은 더했다.

주희를 하늘처럼 떠받들었던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에게 보낸 편지에 “(호전은) 하늘과 땅을 버티고 해와 달을 관통할 만한 기개와 절개를 갖고서도 하루아침에 한 요물의 뺨 보조개에 녹아 스스로 욕을 얻어 온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야말로 두려울 만한 일이다. 다시 논평할 여지가 없다.”1)라고 하였다. 기대승 또한 이황에게 “탐생좌두(貪生莝豆)’라는 말……(주희의) 이 두 절구(絶句)는 모두 배우는 자가 몸을 다스리고 욕심을 억제하는 방법에 가장 절실한 경계가 되니, 아울러 휘호(揮毫)하여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벽에 붙여 두고 출입할 때 살피고자 합니다.”2)라고 하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주희의 자경시를 벽에 걸어두고 호전의 바보 같은 짓을 돌아보며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하였다. 여색을 멀리하라는 가르침으로 이보다 더 준엄한 것은 없었다.

4. 변질

좌두(莝豆)는 콩깍지란 뜻으로, 소여물의 주된 재료이다. 주희는 스스로를 통제하고, 자신의 덕성을 수양하기 위해 호전을 조롱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새 경계와 수양의 의미는 퇴색하고, 욕망 때문에 소여물을 먹어야 했던 남자의 이미지로 변해갔다. ‘자경시(自警詩)’는 ‘좌두시(莝豆詩)’로 불리며, 호전에겐 치욕스런 상징으로 변해갔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호담암(胡澹菴)이 간신 왕륜과 진회를 참(斬)하기를 청하다가 10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으나 그 기개며 절개는 꺾이지 않았는데, 그 뒤에 미녀 여와(黎媧)에게 반하여 관계를 맺었다가 그 남편이 주는 소여물을 먹는 모욕을 겪었다. 회옹(晦翁) 선생이 그를 비평한 ‘매관시(梅館詩)’ 두어 수(首)가 도끼와도 같이 삼엄하였다.3)

담암은 호전의 호이고, 회옹은 주희의 호이다. ‘매관시’는 매계의 여관에서 쓴 시, 즉 주희가 호전을 조롱하며 쓴 두 편의 ‘자경시’이다. 이 시가 송시열(宋時烈)의 말처럼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는 서슬 퍼런 도끼날처럼 가슴을 짓눌렀던 것이다.

하지만 주희가 처음 호 씨의 여관에서 이 시를 쓸 때는 정말로 기롱하며 쓴 것인지도 모른다. 송시열의 말처럼 삼엄하게 여기며 썼던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주희는 자신이 쓴 시로 말미암아 호전의 이미지가 이렇게까지 준엄하게 변할 줄은 어쩌면 몰랐을 것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은 〈세상에 욕망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도다〔世上無如人慾險〕〉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욕망은 나의 육신에 뿌리를 박고 是乃根我形氣
나의 지각을 타고서 乘我知覺
나의 감정과 의지로 由我情意
나의 귀와 눈을 매개로 媒我耳目
마음을 따라 움직이고 因心而動
사물에 감응하여 발동한다 感物而發
끌리는 듯 유혹하는 듯 如引如誘
갑자기 끼어드는 듯 뒤쫓는 듯 如橫如逐
비록 감응하는 단서야 많지만 雖所感之多端
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여자 最可畏者惟色
……
쇠나 돌과 강함을 다투던 자경은 鐵石競剛之子卿
어쩌다 오랑캐 여자에게 더렵혀지고 何見累於胡娥
해와 달과 빛을 다투던 담암은 日月爭光之澹庵
또 어쩌다 보조개 여인에게서 그르치는가 又何誤於黎渦
비록 큰 절개마저 손상된 건 아니라 해도 縱不爲大節之所傷
어찌 평생의 부끄러움이 아니리오 豈不是平生之一怍
나는 진실로 이 위험이 무엇보다 위험하여 我固知此險之莫險
빼앗기고서도 빼앗긴 줄 깨닫지 못함을 아노라 故見奪而不覺
이에 교훈시로 경계해야 할 바를 보이노라 訓諸詩而示戒
후학들은 어찌 가슴에 새겨 두지 않겠는가 盍後學之佩服


   
▲ 소무(蘇武)의 초상. 한나라의 기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잡고 놓지 않았다고 한다.
자경(子卿)은 한나라 무제(武帝) 때의 충신 소무(蘇武)의 자이다. 그는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19년 동안이나 북해의 움집에 억류되었다. 투항하라는 권유를 뿌리치며 한나라의 깃발을 들고 굳게 충절을 지켜 나중에는 깃발이 너덜너덜해졌다고 한다. 이런 충신도 흉노의 여자를 얻어 아이까지 낳게 되는데, 이게 오랑캐 여자에게서 더렵혀졌다는 말이다.

물론 소무와 소전은 경우가 다르다. 그러니 이들을 한 데 모아 놓고 부끄러움을 알라고 하는 것도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다만 훗날 소무는 절의를 굳게 지킨 충신의 표상으로 우뚝한데, 소전은 순간의 욕정을 참지 못하고 일을 그르친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

천 년의 공안이 고정에 있는데 千秋公案考亭存
북해 움집의 호희는 유독 논하지 않았네 雪窖胡姬獨不論
만약 여와와 비교한다면 응당 더욱 중하리니 若比梨媧應有重
담암이 여기에서 어찌 원망 없으랴 澹庵於此豈無冤


제월당(霽月堂) 송규렴(宋奎濂)의 〈오랑캐 여인〔胡姬〕〉이란 시이다. 이 시에 나오는 고정(考亭)은 주희가 말년을 보낸 곳이다. 그는 이곳에 서원을 짓고 제자들을 길렀다. 주자학의 본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송규렴의 견해는 소무와 소전의 경우, 그 일의 경중을 따질만한데, 소무는 언급하지 않고 소전만 문제 삼으니, 소전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는 말이겠다. 제목을 〈오랑캐 여인〉이라 한 것도 참으로 교묘하다.

소전의 강직함이나 절의정신까지 훼손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소초(蕭楚)와 호안국(胡安國)에게 수학한 학자로, 《역습유(易拾遺)》, 《서해(書解)》, 《춘추집선(春秋集選)》, 《예기해(禮記解)》 등의 저서를 남겼다. 국사원(國史院) 편찬관(編纂官)을 지낼 정도로 학문을 인정받았고,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역임할 만큼 관리로서의 능력도 출중했다.

여천과의 일화는 살다보면 한번쯤 빠지는 실수일 수도 있었다. 아니 진실로 좋아했을 수도 있다. 굳이 물을 더럽히느니 어쩌니 하며 호들갑 떨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냥 웃으며 넘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주희 선생의 시도 웃으며 한 마디 툭 던져본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던져진 말이 소전이란 한 남자에게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씌웠다.

5. 여인의 향기

천년의 세월 뒤에 조용히 당시를 그려본다. 호전이 굳이 치욕의 현장을 다시 찾아간 이유가 뭘까? 어쩌면 치욕스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애초부터 소여물 같은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소문이 이상하게 돈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이 점만은 분명하다. 10년의 유배 기간 동안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사람이, 한 여인에게 사로잡혔고, 그녀를 향한 욕망에 불타올랐다. 단 하룻밤의 열정에 평생 쌓아올린 공을 바쳤다.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는가? 나는 그러지 못한다. 왜냐하면 용기가 없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후에, 젊은 시절 욕망에 타오르던 모습을 회상할 수 있을까? 철없던 시절, 하지만 불꽃처럼 몸을 던졌던 시절을 추억할 수 있을까? 뜨겁게 타오르게 했던 여인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만약 그랬던 젊은 날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게 정말로 바보처럼 산 인생은 아닐까?

늙어보면 안다. 단 하룻밤에 평생의 공이 허물어지더라도, 여인의 향기에 취한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그 향기가 얼마나 그리운지를. 주희 선생님!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주) -----
1) 《성호사설(星湖僿說)》 〈인사문(人事門)〉
2) 《고봉집(高峯集)》 〈퇴계 선생 좌전(座前)에 답하여 올림〉
3) 《송자대전(宋子大全)》 〈해봉집 서(海峯集序)〉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사진> 소무(蘇武)의 초상. 한나라의 기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잡고 놓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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