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의 아픔을 느끼다

널리 사랑하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행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을 의(義)라 한다. 이를 따라가는 것을 도(道)라 하고, 이 모두가 내게 다 충족되어 있어 밖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을 덕(德)이라 한다.1)

한유(韓愈, 768〜824)의 〈원도(原道)〉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원(原)’은 ‘근원’이란 뜻으로, 원도는 도의 근원을 밝힌다는 말이다. 한유는 ‘원’으로 시작하는 글을 다섯 편 썼다. 〈원도〉 외에, 〈원인(原人)〉은 사람의 근원을, 〈원성(原性)〉은 심성의 근원을, 〈원귀(原鬼)〉는 귀신의 근원을, 〈원훼(原毁)〉는 병폐의 근원을 밝히는 글이다.

인의(仁義), 즉 널리 사랑하고 의롭게 행동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 없이 옳은 일이고 좋은 것이다. 누가 뭐라 하겠는가. 지상과제이고 자명한 명제이다. 그 당연한 명제를 한유는 왜 새삼스레 끄집어내어 다시 처음부터 살펴보려 하는 것일까?

815년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도 새벽은 밝아오고 있었다. 재상 무원형(武元衡)과 배도(裴度)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출근하는 중이었다. 인적 드문 새벽. 두 사람은 어디선가 나타난 자객의 습격을 받는다. 배도는 다행히 살았지만, 무원형은 죽었다. 무원형은 중국에서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武則天)을 배출한 가문의 사람으로, 당대의 시인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성품 또한 강직하여 복종하지 않는 번진(蕃鎭)을 강력히 진압할 것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번진이 어떠했기에?

당나라 군사제도는 본래 부병제(府兵制)라 하여, 정부가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농민들은 땅을 경작하는 대가로 주로 농한기에 수비나 훈련에 동원되는 체제였다. 변방에는 둔전(屯田)을 두어 군사상의 제반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변방 수비를 소규모 둔전병들에게 맡긴 셈이다.

하지만 상대가 토번(吐番, 티베트)이나 회홀(回鶻, 위구르)처럼 수만 내지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새로 도입한 제도가 번진과 절도사(節度使) 제도이다. 즉 변방에 특별히 절도사를 임명하여 예하에 수많은 부대를 통솔하는 한편 별도의 군대를 모병(募兵)하여 군사조직을 대규모로 확대하였다. 이 절도사의 통제 하에 있는 지역이 바로 번진이다.

한편 절도사에겐 번진의 행정권까지 주어졌다. 오늘날 군사령관이 도지사까지 겸했다고 하면 거의 비슷할 것이다. 예컨대 강원도에 사령부를 두고 있는 군사령관이 강원도지사를 겸하며 지방세를 거두는 시스템이다. 그 세금으로 군대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군사령관이 군사는 물론, 행정과 재정까지 총괄하였던 건데, 이렇게 된 데에는 둔전 정도로는 운영할 수 없는 대규모 군사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번진이 국방을 목적으로 국경 부근에 설치되다보니, 절도사들은 그곳의 지리와 풍속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선발되었다. 안녹산(安祿山)이 이런 경우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구려의 유민으로 오늘날의 산동지역인 치청(淄靑)의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에 오른 이정기(李正己)도 같은 케이스이다.

문제는 절도사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될 때 발생하는 것이다. 절도사들은 이미 대규모 병력과 이런 병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일이 이쯤 되어서는 중앙정부는 더 이상 절도사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절도사의 지위를 아들이 세습한다든가, 혹은 저희들 맘대로 절도사에 오른 뒤 조정에 임명을 요구하는 일들이 생겼다. 조정은 이들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을 만큼 처량해져 있었다. 안녹산의 난 이후에 당나라가 점점 약해져 가는 모습이 이러했다.

이렇게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헌종(憲宗)이 즉위하였다. 이 젊은 황제는 무너져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는 의지가 강했다. 헌종은 이길보(李吉甫), 무원형 등을 발탁하여 절도사들을 통제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반발하는 번진은 토벌을 단행하였다. 무원형은 이 계획을 입안하고 강력히 시행하다가 피살되었던 것이다.

범인을 색출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회서(淮西) 번진의 오원제(吳元濟), 치청 번진의 이사도(李師道) 등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대신 피습 사건의 배후를 철저히 규명할 것을 주장하다가 오히려 좌천당하고 말았다. 이제 새벽 출근길엔 관료들이 탄 말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불안과 공포가 장안성을 덮었다. 성은 적막 속으로 빠져 들었다.

대신 피습 사건이 있기 전인 814년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오소양(吳少陽)이 죽었다. 그러자 그의 아들인 오원제가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지도 않고 절도사의 직무를 대행하였다. 이미 절도사에 대한 통제에 나선 조정에서 오원제의 직무대행을 인정하지 않자,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 815년의 무원형 피살사건은 오원제와 이정기의 손자인 이사도가 결탁하여 일으킨 사건이었다. 피습 사건 이후 조정의 분위기는 오원제를 절도사로 인정해주고 일을 무마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배도가 부상에서 회복되고 헌종의 의지 또한 꺾이지 않았다. 결국 관군은 오원제를 토벌하고 기세를 몰아 이사도의 치청 번진까지 평정하였다. 817년의 일이다.

회서 평정에서 한유는 배도의 측근으로 큰 공을 세웠다. 개선한 한유에게 형부시랑(刑部侍郎)이란 고위직이 내려졌다. 오늘날 법무부 차관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그의 나이 50세 때의 일이다.

당나라 말기에 불거진 문제는 절도사만이 아니었다. 절도사를 감독하는 감찰어사(監察御史)나 감군(監軍)이 주로 환관들에게 주어졌다. 환관이 정치 전면에 나서면 종말은 뻔한 것이다. 물론 게 중에는 감찰 업무뿐만이 아니라 황제의 특사로서 주어진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환관도 적지 않았다. 다만 이런 경우는 그런대로 나라가 나라다울 때의 이야기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가 그렇듯, 당나라도 환관의 농단지수가 올라갈수록 패망시간은 빨라졌다. 헌종이 환관에 의해 시해된 후로, 당나라는 무기력하게 허물어져 갔다.

생각해 보면 헌종 또한 환관에 의해 제위에 오른 황제였다. 그의 아버지 순종(順宗)이 왕숙문(王叔文), 왕비(王伾) 등을 등용하여 개혁을 도모한다고는 하였으나, 본인의 병약함과 대신들의 무능이 겹쳐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수구세력과 결탁한 환관에 밀려 제위를 아들 헌종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당나라 말기는 이곳저곳에서 모순이 불거지고 문제가 터졌다. 한유의 이른바 오원(五原)은 이런 난세를 만난 지식인이 시대의 아픔을 체험하며 쓴 글이다.

2. 태산처럼 높고 북두성처럼 빛나다

▲ 한유(韓愈), 자는 퇴지(退之), 창려(昌黎)선생으로 불린다. 당말의 문장가, 사상가, 정치인으로 그로부터 본격적인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시대를 열렸다.
한유는, 공자가 죽은 지 1300여 년, 한 무제(漢武帝, 재위, BC 141〜BC 87)가 유교를 국교로 선포한지 900여 년이 흐른 뒤에 태어났다. 그동안에 유교는 지배이념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백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배하였다. 관리를 선발하거나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이 유교였다. 이른바 《시경》, 《서경》, 《예기》, 《춘추》와 같은 유교 경전은 유학자만이 아니라 승려나 도사도 반드시 공부해야만 하는 기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는 중국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지는 못하였다. 국가가 학교를 세워 가르쳤지만, 사람들은 유교를 출세의 수단으로나 여길 뿐 마음까지 주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오히려 과거시험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출세를 보장하지도 못하는 도교나 불교를 사랑했다.

한(漢)나라 때는 황노학(黃老學)이, 위진 남북조와 수(隋)나라 때는 불교가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그 인의도덕을 말하는 자들이 노자(老子)로 들어가지 않으면 불교(佛敎)에 들어갔다.2)

황노학은 노자를 신성시하는 도교(道敎)의 일파이다. 위진 남북조 시대에는 이른바 현학(玄學)이라 하여 도교가 철학화하고 불교 또한 널리 전파되었다. 그리고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가 들어서서는 노자와 불교는 크게 융성하였다. 당나라를 세운 고조(高祖) 이연(李淵)과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부자는 같은 이씨(李氏)인 노자를 높이 받들었다. 노자는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당나라를 세운 북방의 선비족에게 정통성을 확보해주는 좋은 근거가 되었다.

불교는, 특히 무측천(武則天) 이후 대단히 융성하여 천태(天台)ㆍ화엄(華嚴)과 같은 교종(敎宗)은 물론, 선종(禪宗)의 각 계파까지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찬란한 꽃을 피웠다. 수도 장안에는 수천을 헤아리는 승려들로 북적대는 대형 사찰이 수십 개나 있었다. 도교의 도관(道館)도 마을마다 골목마다 있었을 것이다. 실로 노(老)·불(佛) 전성시대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었다. 한유가 노자가 아니면 불교라고 할 정도로 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옛날에 사람들이 많은 피해를 당하며 살 때, 성인이 나와 서로 도와가며 사는 도리를 가르쳤다. 이제 비로소 임금이 있고, 스승이 있게 되어, 벌레, 뱀, 짐승 등을 물리치고 땅위에서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추위에는 옷을 입고, 굶주림에는 밥을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무 위에서 살면 떨어져 죽거나 다치고, 땅바닥에 살면 온갖 질병에 걸리는데, 이제는 집을 지어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여러 가지 공구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사용하게 하였고, 장사하는 법을 알려주어 필요한 것을 교환하게 하였다. 약을 만들어 병을 고치고 수명을 늘리고, 죽은 자는 매장하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그 은혜와 사랑을 영원히 이어지게 하였다. 예법을 만들어 선후 순서를 정하고, 음악을 만들어서는 울적한 마음을 풀어 주었다. 정치를 통해 백성들의 게으름을 다스렸고, 형벌로는 강포한 무리들을 없앴다. 속이는 자가 나타나자 되와 말과 저울을 만들어 믿고 거래하게 하였고, 약탈하는 놈들이 나타나자 성곽과 갑옷과 무기 등을 만들어 지켜주었다. 재해는 방비하고 환난은 예방하였다.3)

여기에서의 성인은 유교의 성인이다. 이른바 삼황오제(三皇五帝)가 그들이다. 인류 문명의 단계마다 성인이 등장하며 모든 공을 독점하는 태도는 중국적 인본주의의 한 형태이다. 좋게 말하면 사람 중심의 인본주의이고, 나쁘게 말하면 영웅주의, 혹은 엘리트주의라 할 것이다. 이런 중국 전통의 엘리트주의가 한유에게서 도통(道統)으로 구체화한다.

“도란 무엇인가? 내가 말하는 도란 노자나 불교가 말하는 도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도는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전했고, 순임금은 우(禹)임금에게, 우임금은 탕(湯)왕에게, 탕왕은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에게, 그리고 공자(孔子)에게 전한 것이다. 공자는 이것을 맹자(孟子)에게 전했는데, 맹자가 죽자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4)

도통이란 사상적 정통성을 말한다. 인류의 스승이자 성인들이 그 가르침을 후계자에게 전해줌으로써 정통성이 이어진다는 생각이다. 삼황오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요임금의 가르침이 순임금에게 전해지고, 순임금에게서 다시 우임금으로, 탕왕으로, 문왕과 무왕으로, 그리고 주공과 공자로 이어져 도통이 성립한다는 게 한유의 설(說)이다. 이른바 요ㆍ순ㆍ우ㆍ탕ㆍ문ㆍ무ㆍ주ㆍ공(堯舜禹湯文武周孔)의 도통연원(道統淵源)이다.

한유에 의한다면 맹자 사후에 순자(荀子)나 양웅(揚雄) 같은 사람이 나왔지만 이들은 모두 하자가 있어서 유교 성인의 가르침에 정통하지 못하다고 한다. 이런 말 뒤에는 한유 자신이 맹자 이후 끊긴 유교의 도통을 다시 잇는다는 사명감, 혹은 자부심이 숨어 있음도 사실이다.

한유의 도통설에는 유교야말로 인간이 금수가 되지 않고 문명을 누리며 살게 해준 유일한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생각을 깔고 유교 이외의 종교나 사상을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에 비판적이었던 노자를 비난하고, 특히 외래종교인 불교를 향해서는 너희들은 정통성이 없으니 그만 나가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막지 않으면 흐르지 않고 멈추게 하지 않으면 행하여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그 사람을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고 그 책을 불사르고 그들의 집을 여염집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선왕의 도로 이끌라. 그러면 과부나 고아나 자식 없는 늙은이나 병든 자들이 보살핌을 받을 것이다.5)

도사나 승려들을 도관이나 절에서 끌어내어 일반 백성으로 만들고, 도관이나 절은 보통사람들이 사는 집으로 만들라는 말이다. 도교나 불교의 경전은 불태워 없애고, 사람들에게 유교의 인의도덕을 가르치라는 말이다. 그러면 가난하고 헐벗고 외로운 자들이 보살핌을 받을 것이라는 말인데, 이 말 속에는 당시 사회적 병폐의 책임을 도교와 불교로 돌리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나타나있다.

아주 틀린 말만은 아니었다. 당나라 말기에는 사이비 도사들은 혹세무민하며 자기 배를 채우는 데 급급했고, 불교재산은 커질 대로 커져서 황실의 재산을 넘볼 정도가 되었다. 수천 명의 승려들이 북적대는 대형 사찰이 장안에만 수십 개를 헤아렸다. 그러니 그들의 재산을 환수하면 기아에 허덕이고 추위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불교의 비만은 외과적 수술을 요할 정도여서, 마치 한유가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강제로 승려들을 절에서 추방하고 불교 재산을 몰수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무종(武宗)에 의한 훼불사건은 한유가 죽은 지 불과 한 세대도 안 되어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어찌 이 모든 병폐가 도교나 불교 때문이겠는가. 번진에는 절도사가 문제였고, 황궁에는 환관이 문제였다. 무엇보다도 황제를 비롯한 지배층의 무능과 부패가 가장 근원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한유는 보지 않았다. 아니 보려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직 이단에게 화살을 돌렸다.

811년, 44세의 한유는 제자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밝혔다. 〈진학해(進學解)〉라는 자전적인 글에서 이단이 횡행하는 미친 물결을 온몸으로 맞선 영웅으로 그렸다.

선생님께서는 저희를 속이고 계십니다. 저희들이 선생님을 섬긴 지 여러 해인데, 선생님은 입으로는 끊임없이 육예(六藝)의 글을 외우고 손으로는 쉴 새 없이 제자백가의 책을 펼치고 계셨습니다. 사실을 기록한 것은 반드시 그 요체를 파악하셨고 말을 편찬한 것은 반드시 그 이치를 알아내셨습니다. 많이 읽기를 탐하고 지식을 얻기를 힘써서 크고 작고를 따지지 않고 등불을 밝혀 밤낮을 이어가며 쉼 없이 언제나 애쓰기를 평생에 걸쳐 하셨으니 선생님의 학업은 참으로 근면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단을 배격하고 불가와 도가의 사상을 물리쳐 유학의 틈새나 새는 곳을 보수하고, 오묘한 이치를 밝혀 크게 확장하였습니다. 망망해진 유교 진리의 단서를 찾아 홀로 널리 뒤지고 멀리 이어서, 백 갈래의 물을 막아 동쪽으로 흐르게 하고, 이미 무너져 내린 데서 그 광란의 물결을 되돌리셨습니다. 선생님은 참으로 유교에서 그 수고로움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유는 백 갈래의 물을 막아 오직 한 곳으로만 흐르게 하듯, 모든 이단과 이교를 금하고 오직 유교의 가르침에만 젖게 하였다. 이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한유의 노력은 일찌감치 정평이 났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3살에 아버지마저 잃고, 12살 때 형마저 저세상으로 보낸 한유에게 공부는 살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는 실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살아서는 이부시랑(吏部侍郎)에 오르고 죽어서는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추증되었다. 정승판서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영광보다도 그의 혼신의 노력에 바쳐진 최고의 찬사는 태산북두(泰山北斗)란 말일 것이다. 태산처럼 높고 북두성처럼 빛난다는 말. 최고의 대가를 형용하는 태두(泰斗)의 어원이 되는 말. 《신당서(新唐書)》 〈한유열전(韓愈列傳)> ‘찬(贊)’에 “한유는 죽은 후에 그의 말이 널리 행해져서, 학자들은 그를 태산북두처럼 우러러 받들었다.”라고 하였으니, 어느 누가 이보다 더 큰 명예를 얻을 수 있겠는가.

당나라가 망하고, 5대10국의 혼란기를 거쳐 송(宋)나라가 들어서고, 원(元)나라를 거쳐 명(明)나라가 섰다가, 마지막 왕조인 청(淸)나라가 망할 때까지 1300여 년. 어떤 왕조가 들어서든, 어떤 민족이 권력을 잡든, 태산북두 한유의 위상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어디 중국뿐이랴. 조선에선 한유에 비유되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영예로 여겼다.

그렇게 한유가 숭상되는 동안 많은 종교들이 사라지고, 불교와 도교는 이단이 되었다. 승려들은 감히 도성에 출입하지 못하였고, 도사들은 혹세무민하는 사기꾼이 되었다. 그리고 여자들은 홀로 나다닐 수 없었고 재혼은 허락되지 않았다. 널리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거기에 남녀 간의 사랑은 없었다. 오직 부부의 도리가 있었고, 충효의 도리가 있었다. 유교적 인의도덕만이 태산북두처럼 우뚝하였다.

주) -----
1) 한유, 〈원도(原道)〉.
2) 위의 글.
3) 위의 글.
4) 위의 글.
5) 위의 글.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