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唯識)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의식은 염념상속(念念相續)한다고 한다. 염념상속이란 무엇을 하던 어디에 있던 끊임없이 연속해서 계속되는 것이다. 아무리 번뇌가 많아도 동시에 여러 가지 번뇌를 생각할 수는 없다. 하나가 끝난 다음 다른 번뇌가 차례대로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식은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의식의 탐구이고, 의식의 지평을 더욱 크게 넓혔다.

오죽하면 천태(天台)에서는 일념에 3000가지 번뇌가 있다고 했겠는가? 번뇌는 고(苦)가 가져다주는 의식의 그림자이다. 선불교나 정토에서도 염념상속하는 번뇌를 화두나 염불로써 염념상속하게 바꾸는 것이 핵심이며 그것이 삼매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대승불교의 핵심은 번뇌를 소멸해야할 대상으로 보기 보다는 어떻게 다스리고 깨달음의 자량으로 만드느냐는 것이 핵심이다.

현대사회에서 번뇌를 일으키는 대부분의 원인이 무엇일까? 그것은 물질의 결핍과 불평등, 그리고 상대적 빈곤이 가져다주는 박탈감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원초적인 번뇌이면서 현대인이 가진 번뇌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흔히 탐, 진, 치 삼독은 번뇌의 원인이고 무조건 제어하고 반드시 소멸해야만 하는 것으로 말한다. 대부분의 신도들이 절에 가는 가장 큰 이유가 기복(祈福)이고 소원성취이다. 하지만 이를 대놓고 말하거나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을 대부분 꺼린다.

삼독 중 특히, 탐욕을 가장 터부시한다. 그러면서도 마음으로 물질적 욕구를 원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불교인은 고상해야하고 어떤 불이익에도 인내해야 하며, 이익이나 물질적 풍요, 욕구에 초탈한 척하는 상(相)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우리는 최소한의 보시를 할 수 있는 정도의 물질적 수준을 갖추지 않는다면 이상을 쫒는 종교 활동이나 도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복지제도가 운영된다.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시행하는 여러 정책도 무형의 보시행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다면 많은 번뇌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를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은 적극적인 사회참여이며 그것이 현대 불교인이 가져야할 자세이다.

물론 개인적인 번뇌를 해결하는 것은 본인의 몫이지만, 이런 원초적 번뇌가 해결되면 개인적 번뇌도 조금 더 빨리 해결하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될 것이다.

진정한 대승은 삼독을 무조건 죄악으로 보고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그것을 돌려 자신과 모든 이에게 이익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공(空)의 참 의미일 것이다.

번뇌를 본인만이 풀 수 있는 개인적인 것으로만 치부한다든가 삼독을 끝까지 부정한다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깨달음을 이루지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조계종 권승을 비난하는 이유는 신도들에게 번뇌를 소멸해야 할 것으로 이야기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삼독이라는 번뇌를 불나방처럼 쫒는 이중성 때문이다. 또 그 많은 탐욕의 결과를 대중과 나누지 않고 자신이나 은처, 속가 자식, 그리고 소수 문중이 독점하는 기만성 때문이며, 본인의 파계가 드러났음에도 참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지적하는 상대방을 권력과 금권으로 억압하는 야만성 때문이다.

통불교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단점과 폐해들만 부각되는 것이 지금 한국불교의 현주소이다. 이런 풍토에서 누가 출가할 것이며, 누가 청정한 수행자로 남을 것이며, 누가 그들의 신도로 될 것인가.

한국의 권승들은 이미 탐욕의 정점에 올라 있다. 그 탐욕을 사부대중과 나누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모습을 진정으로 실천해야 한다. 재가 수행자들은 보살행을 할 수 있게 더욱 번뇌하고 탐하여야 한다. 출·재가 모두 수준을 현실에서 올리지 못하고 계속 방황한다면 가까운 미래에 이 땅에 불교는 없을 것이다.

재가 불교인이여 번뇌하고 탐하라. 스스로가 번뇌와 탐욕의 노예가 되지 말고 깨어서 더 큰 이익이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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