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덕왕대 설날 조례 시행 시랑 호칭도 처음 사용
낭비성 전투 후 사륜계와 상호 긴밀한 협조 관계
 

진덕왕대 사영지에 대해서 한 가지 말 못 한 게 있다. 진덕왕 때에 비로소 설날 조례를 행하였다는 대목이다. 왕이나 말하기 좋아하는 사가들은 이때부터 국가 기강이 잡히고 왕권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 웃기는 이야기이다. 누구는 못 해서 안 한 게 아니라 추운 날 신하들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배려한 것이다. 신하들 입장에서는 이 왕대부터 설날 아침부터 발 동동 구르며 말 같지 않은 여왕의 화장품 이야기 등등을 듣느라 무척 추웠을 것이라고 뒷담화 했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시랑(侍郞) 호칭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시랑(侍郎)은 집사부(執事部)·병부(兵部)·창부(倉部)의 차관직을 말한다. 장관만 데리고 일하다 보니 말도 안 듣고, 인사 청탁을 많이 받아서 자리가 더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귀족들이 여왕을 우습게 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참에 너도 나도 관직을 하나씩 겸직하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신라는 썩어들어 간 것이거나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마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식의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결국 왕권은 김유신의 도움을 받은 태종 김춘추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진짜 실세는 역시 오지암에서 본 것처럼 김유신이다.

김유신(金庾信)
호력 이간(虎力 伊干)의 아들 서현 각간(舒玄 角干) 김 씨의 큰아들로 이름은 유신이다.

김유신의 할아버지 호력은 무력을 말한다. 김무력(金武力)으로 고려 혜종의 이름인 ‘무(武)’를 피휘하여 의미가 비슷한 ‘호(虎)’로 바꿔 쓴 것이다. 그러니 호력이라고 쓰고 무력이라고 큰 소리내 읽으면 된다. 아니 역사를 잘 안다며 똑똑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김무력은 금관가야(金官加耶)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의 아들로, 법흥왕 19년(532) 신라에 투항하여 진골 신분을 보장받았다. 사실 목숨만 건진 것만 해도 다행인데, 야심도 있고 실력도 있어서 재야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고 보면 될 듯싶다.

진흥왕 12년(551)경 단양 적성전투에 참여하였고, 같은 왕 14년(553)에는 신주(新州)의 군주가 되었다. 신주는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로 추정되며, 군사조직인 신주정(新州停)이 설치된 곳이다. 진흥왕 18년(557)에 이름이 북한산주(北漢山州)로 바뀌었으며, 이후 남천주(南川州) 등을 거쳐 통일신라 때에는 한산주(漢山州), 한주(漢州)로 바뀐 곳이다. 삼국 통일 직후에 완성된 이른바 구주(九州)의 하나로,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아 설치하여 ‘새로운 땅’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경덕왕 16년(757) 개편 당시 한산주는 하나의 소경(小京)과 27개 군, 46개 현을 관장하였으며, 주에 직속된 현은 둘이었다.

이때에 군부대인 남천정(南川停)과 골내근정(骨乃斤停)의 두 군단을 비롯하여 한산주서(漢山州誓)·만보당(萬步幢)을 두었다. 장관으로 도독(都督), 차관으로 주조(州助, 일명 州輔), 그 밑에 장사(長史, 일명 司馬)를 각각 1인씩 두었다고 전한다.

새롭게 개척한 곳은 귀족 누구도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관아도 없고, 관리도 없고, 세금 걷을 백성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런 자리를 꿰차고 와신상담의 기회를 노려 대박을 친다. 진흥왕 15년(554) 옥천의 관산성 전투에 신주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백제 성왕의 군대를 격파하여 입지를 다졌다. 당대 실세 거칠부와 호흡을 맞췄으며, 진지왕대에도 한 역할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지왕의 폐위로 타격을 받지 않았으면 신라는 김무력, 김서현, 김유신으로 이어지는 금관가야의 왕족들, 즉 신 김 씨들이 차지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김무력의 아들 김서현은 김유신의 아버지이다.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11세손이며, 가야의 마지막 왕인 김구해의 손자이다. 서운 또는 소연이라고도 표기하였는데 아내는 입종갈문왕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만노군(萬弩郡 :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의 태수를 지냈으며, 양주(良州 :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 총관이 되어 백제와의 전투에서 여러 번 승리했다. 진평왕 51년(629)에는 소판(蘇判)으로서 김용춘(金龍春), 김유신 등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을 공격하여 5,000여 명을 참살하고 성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로 진지왕-김용춘-김춘추로 이어지는 사륜계와 상호 긴밀한 협조 관계를 이룬 듯하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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