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암에서 중신 모임 후 김유신에게 힘 쏠려
우지산은 남산, 청송산과 파전 위치 비정 못해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한 땅이 있어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 대신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면 일이 꼭 성공했다고 한다. (사령지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고, 둘째는 남쪽의 오지산(亐知山)이다.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고,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이 왕 때에 비로소 설날 아침의 조례〔正旦禮〕를 행하였으며, 시랑(侍郞)의 호칭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나라의 대사를 다루는 일이니 당연히 대신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 대신들이 모여 의논을 한다는 것 자체가 큰일이긴 하지만 꼭 나랏일만은 아닐 수 있다. 요즘 말로 정당이나 파벌의 대표들이 모여서 힘자랑을 한 것이다. 다당제였는지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표 대결을 하는 ‘치킨게임’의 장소다. 칼만 안 들었지 전쟁터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아니 칼도 차고 와서 여차하면 ‘자토이치’로 단칼에 벨 수도 있는 자리였으니, 정말 스펙터클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영화보다 더 영화다운 장면을 한번 보고 싶을 정도다. 아니 어쩌면 전생에 한번 봤을지도 모르겠다.

진덕여왕(647∼654) 때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 김유신) 등 중신들이 남산 오지암에 모여 국사를 의논한 적이 있었다. 왜 모였을까? 결국 알천공과 유신공의 세 싸움이었다. 알천공이 세긴 셌지만 결국 무리들은 유신공을 따랐다는 뜻이다. 《초한지》에서 보듯 항우와 유방의 싸움처럼 결국 센 놈이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놈이 센 것인가 보다. 특별히 국사를 나눈 것도 아니니 이 날 이후로 ‘유신공’의 세상이 되었을 것이며 그가 원하는 대로 이뤄졌을 것이다. 아니 성공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대신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고 결정하면 꼭 성공했다. 즉 일이 이뤄졌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새빨간 거짓말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유신공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투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신라의 기대나 희망 나아가 열등감이 반영된 기사일 따름이다.

《삼국유사》 권 제2 ‘남부여 전백제’ 조에는 “호암사에는 정사암(政事嵓)이라는 바위가 있으니, 나라에서 재상을 선출할 때는 당선될 후보자 3~4인의 이름을 써서 봉함을 하여 바위 위에 두었다가 조금 뒤에 집어 보아 이름 위에 도장 자국이 있는 자로써 재상을 삼으니, 이 때문에 정사암이라 한 것이다.”라는 기사가 있다.

백제 고위 귀족들은 수상인 상좌평(上佐平)을 선출할 때 이렇게 조용히 투표를 했다. 민주적인 투표를 한 것에 비해 신생국 경상도 신라는 힘 대결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 듯하다. 그러니 정사암에 대한 열등감으로 사영지가 더 신성하다는 식으로 떠든 것 같다. 만약 신성하다면 한 군데만 거론해도 될 것을 네 군데나 있다고 떠벌이는 것 자체가 ‘열등’한 것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있다. 여하튼 그런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고, 사영지 가운데 남산 오지암에서 배출한 유신공이 자신의 천하를 이루었으니 고구려의 영역과 향후 우리의 북방정책을 생각해 볼 때 좀 아쉬운 점이 있다.

여하튼 정사암보다는 못하지만 신라는 사영지를 중요시했다. 아니 중요시하려고 했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 수 있다. 종교적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중요했던 곳이다. 금강산은 왕경의 북쪽에 있고 우지산은 남산으로 비정되지만, 청송산(靑松山)과 피전(皮田)의 위치는 확실치 않다. 대사를 정하기 위해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병도 많이 데려갈 수 없으며, 데려가더라도 비용이 만만치 않았으며 그럴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청송산과 피전은 경주 주변의 경치 좋은 곳이라고 생각해도 크게 틀림은 없을 것이다.

왕경을 둘러싼 지역에는 국가의 대사(大祀)로 지정된 삼산(三山)이 있다. 신라 삼산이라고 하는 왕도 및 주변 세 곳의 산이다. 습비부(習比部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의 동쪽 및 동남쪽)의 나력(奈歷, 또는 奈林), 절야화군(切也火郡 :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의 골화(骨火), 대성군(大城郡 :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로 추정)의 혈례(穴禮)가 있다. 나력의 경우에는 경주 낭산설(狼山說)이 있고, 골화의 경우에는 영천의 금강성산설(金剛城山說)과 경주 북방의 금강산설(金剛山說), 혈례의 경우에는 청도의 부산설(鳧山說), 영일의 운제산설(雲梯山說), 월성과 영일 사이의 어래산설(魚來山說) 등이 있다.

다 설에 불과하니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영지와 신라 삼산이 겹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구분도 편견에 불과하다. 몇 개는 겹치고 몇 개는 겹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딘지 궁금하나 어디라고 말할 근거가 부족해서 안타깝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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