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10)은 스승인 수선사 1세이자 조계종의 중흥조인 보조 지눌의 뒤를 이어 수선사 2세가 된다. 혜심은 무신정권으로부터 존경과 경제적 도움을 받았고 당대의 권력자 최이(崔怡)가 여러 번 개경으로 초대했지만,1) 스승인 지눌이 그러했던 것처럼, 끝내 사양하는 등 정치권력과 일정한 현실적 거리를 유지하고 수선사의 독자성을 잃지 않는다.

혜심의 시대는 무신난 등의 원인으로 인해 불교계가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며 자기혁신과 발전을 도모하던 시기였다. 이런 때를 당하여 혜심은 한편으로는 조계종의 최고 지도자로서 스승 지눌의 결사정신을 계승하여 이후 수선사가 고려 후기에 이르기까지 16국사를 배출하게 되는 기반을 다지고,2) 다른 한편으로는 스승과는 그 안목이 사뭇 다른, 선에 대한 독자적인 면모를 제시함으로써 이후 한국불교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전술했듯이 지눌은 간화선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자기의 선적 사유체계에 깊숙하게 개입시켰다. 이 점에서 지눌은 최초로 간화선의 우월함을 강조한 선사이다. 그러나 지눌은 간화선을 (화엄)교학 및 일반선법과 비교하며 그 차이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 수행방법론으로서의 장점을 이론적으로 제시하는 등 시종일관 지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그 결과물인 저작들을 남긴다. 반면 혜심은 삶의 현장에서 조사로서의 활발발한 선풍을 보이고 행주좌와의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걸림이 없는 선지(禪旨)를 펼치는 등 간화선법을 임운자재(任運自在)하게 구현하면서 그 생생한 자료인 어록을 남긴다. 상당법어(上堂法語) 등을 담은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이나 짧은 논문의 형태인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 등에서 보여주는 혜심의 선법은 새로운 사상적 방향을 설정한 인물로서의 모습을 확실하게 나타내어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눌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혜심의 독자적인 간화선풍은 이후 한국불교사에서 지남(指南)이 된다.

주지하듯이 지눌의 사유체계에서 화엄교학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의 경우 화엄교학은 선과 거의 대등한 입장을 가질 뿐 아니라, 선적 깨달음의 철학적 토대를 제공한다. 이와 비교해 본다면, 물론 표면적인 경우이지만, 혜심도 역시 화엄을 중시한다. 이것은 《진각국사어록》에서 《화엄경》이 11회나 인용되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도 간접적으로 증명이 된다.3) 그러나 그 내밀한 함의가 꼭 같은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교학에 대한 혜심 간화선(조사선)의 일관된 태도는 단지 ‘계기’로만 사용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굳이 화엄이 아니라 선종의 종지 등과 같은 다른 무엇이라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두 선사 모두 화엄을 같이 인용했다 하더라도 지눌과 혜심은 그 목적과 용도가 다르다. 지눌의 경우 화엄은 선과 동등한 지분을 가지지만, 혜심의 경우 화엄은 재료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혜심은 간화선적 방법과 시각을 가지고 화엄을 시종일관 선적 기틀로 재편하여 활용한다. 참된 조사는 누구나 감각할 수 있도록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평상의 현장에서 자신의 종지를 전개하는 인물이라야만 하며, 주지하듯이 이것은 조사선의 기본적인 입장이다.4) 따라서 교학에 대한 지눌과 혜심의 선법을 동일한 울타리 안에 두는 것은 올바른 안목이 아니다.5)

지눌은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보다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그 중에서도 천성(千聖)의 궤철(軌轍)인 돈오점수문(頓悟漸修門)을 중시한다. 하지만 혜심에 오며는 이러한 성적등지문과 간화일문은 직접 연결된다.

혜심은 “수행의 요체는 지관(止觀)과 정혜(定慧)를 벗어날 수 없다. 제법(諸法)이 공(空)임을 비추는 것을 관(觀)이라 말하고 제 분별을 쉬는 것을 지(止)라 말한다. 지란 허망함을 깨닫고 그치되 마음을 써서 억지로 끊는데 있지 않고, 관이란 허망함을 보고 깨치되 마음을 써서 고찰하는데 있지 않다. 경계를 대하여 움직이지 않음이 정(定)이며, 그렇지만 억지로 제어하는 것이 아니다. 성품을 보아 미혹하지 않는 것이 혜(慧)이며, 그렇지만 억지로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공부가 힘을 얻었나 얻지 못했나를 소식(消息)하여 알 때라야 되는 것이다. 이외에 간화일문이 있으니 가장 빠른 길이며, 지관과 정혜가 자연히 그 가운데 있다.” 라고 말하면서6) 화두 공부를 하면 자연히 지관과 정혜가 생긴다고 하여, 간화일문 속에 지관과 정혜를 포함시키고 있다.7) 따라서 혜심의 경우에는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 상태가 곧 성성적적의 상태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혜심은 지눌에게서 볼 수 있는 사상적 특징인 돈오점수를 언급함이 없이 바로 간화일문의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8)

더 나아가서 혜심 간화선의 중요한 특징은 지눌과는 달리 간화가 더 이상 최상근기만을 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9) 그는 바로 화두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참구의 요령에 대하여 주해(註解)를 제시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원돈신해나 성적등지의 의미조차도 보다 단순화하여 모든 교학적 이치와 선의 종지를 디디고 올라 설 수 있는 기틀로 만들어 버린 다음에 화두를 참구하도록 한다. 이렇게 일상생활 가운데 누구나 간화참구를 할 수 있도록 광범한 출가, 재가의 대중들을 겨냥한 점은 혜심 간화선의 주요한 특징이 된다.10)

혜심의 경우 모든 근기의 사람들에게 간화일문만을 강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선수행의 경우도 오직 간화일문만 용납된다. 지눌은 선교합일의 기본적인 입장에서 선만을 강조하는 수묵지치선(守黙之癡禪)과 교만을 강조하는 심문지광혜(尋文之狂慧)를 힐난했다. 그러나 혜심은 문자에만 끌려 다니는 교학인 심문지광혜를 비판하고,11) 더 나아가서 무공안(無公案)의 수묵지치선인 묵조선마저 비판한다.12)

지눌은 간화선 수행법에 대하여 언급하는 경우, 그 탁월함에 대하여 원론적이자 선언적인 이야기를 주로 한다. 그 결과 구체적으로 화두를 제시하는 경우를 보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13) 그러나 혜심은 주어진 구체적인 현장을 소재로 삼아 구체적으로 화두를 제시하는 것을 우리는 《어록>에서 줄곧 목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화두 공부의 요령에 대해서도 <구자무불성화간병론>에서 그 10가지 병통과 치유법을 제시하였다.

주) -----
1) 본명은 최우(崔瑀), 나중에 최이로 개명했다. 1219년(고종 6) 최이는 부친인 최충헌의 뒤를 이어 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집정자에 올랐다.
2) 이상미, 《무의자의 선시 연구》(서울: 박이정, 2005), pp.35~39.
3) 김호성, <혜심 선사상(禪思想)에 있어서 교학(敎學)이 차지하는 의미>, 《보조사상(普照思想)> 7집(서울: 보조사상연구원, 1993), pp.114~115. 김호성의 조사에 의하면 이외에도 《진각국사어록》에서는 《화엄론》이 2회, 《원각경》이 6회, 《금강경》이 7회, 《능엄경》이 5회나 인용되고 있다고 한다. 물론 그 밖의 경전 인용도 있다.
4) 김영욱, 《진각국사어록 역해 1》(서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p.8.
5) 대혜 《서장》의 경우에도, 인용된 대승경전류의 횟수는 103회이다. 이 가운데 《화엄경》의 인용이 30회로 가장 많다. 이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눌과 대혜의 교학에 대한 입장은 그 안목이 같다고 보기 힘들다. 자세한 것은 다음을 참고. 졸고, <대혜의 《서장》에 인용된 대승경전에 관한 고찰>(서울: 한국불교학회, 2006)
6) 《진각국사어록》,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6책(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1994), p.40a. “修行之要, 不出止觀定慧. 照諸法空曰觀, 息諸分別曰止. 止者悟忘而止, 不在用心印絶, 觀者見忘而悟, 不在用心考察. 對境不動是定, 非力制之, 見性不迷是慧 非力求之. 雖然自檢工夫, 得力不得力, 消息知時乃可耳. 此外有看話一門, 最爲徑截, 止觀定慧, 自然在其中.”
7) 혜심에 와서는 혜(慧)와 관(觀)으로 지눌의 성(惺)이 설명되고, 동시에 지눌의 적(寂)은 정(定)과 지(止)로 설명되고 있는 차이가 보인다. 지는 정과 같고, 관은 혜와 같은 뜻이다. 따라서 지는 정으로도 적으로도 해석되고, 관은 혜와 같고, 혜는 성과 같은 뜻이므로, 관은 혜로도 성으로도 해석된다.
8) 졸고, <혜심의 선사상에 대한 연구>, 《철학연구》20집(서울: 고려대 철학연구소, 1997), pp.126~127.
9) 혜심의 이러한 입장은 대혜 종고와 같다. 대혜 종고는, “이 일단의 일대사 인연에 뜻을 두고 싶지만 ‘너무나 근기가 둔하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오히려 당신께 축하를 보냅니다. 요즘 사대부들이 ‘이 일’에 대해 완전히 요달해서 곧바로 투탈할 수 없는 까닭은 근기가 너무 영리하고 지견이 많아서 선지식이 입을 열고 혀를 움직여 말하는 것을 보면 금방 알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오히려 중·하근기의 사람이야말로 허다한 잘못된 앎이나 잘못된 지각이 없는 탓에 공부하기에 더 좋은 사람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欲留意此段大事因緣, 爲根性極鈍. 若如果此, 當爲左右駕也. 今時士大夫, 多於此事不能百了千當直下透脫者, 只爲根性太利知見太多, 見宗師纔開口動舌, 早一時會了也.”)
10) 이동준, <고려 혜심의 간화선 연구>(서울: 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2), pp.62~78.
11) 《진각국사어록》, p.11c. “悲夫! 空守黙之癡禪, 磨甎作鏡, 但尋文之狂慧, 入海筭沙.”
12) 위의 책, p.27a. “一向閑眉合眼, 空空寂寂, 向黑山下鬼窟裏, 坐地待悟.”
13) 구자(狗子)의 불성(佛性)을 주제로 한 공안(公案)은 당의 조주 종심(趙州 從諗, 778~897)에서 비롯된다. <(한 스님이)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대사가 말했다. “없다.” 학인(學人)이 (다시)물었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는데 개에게는 어찌하여 없습니까?” 대사가 말하였다. “그것은 업식성(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다.” 《조주어록(趙州語錄)》,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13, 《만속장(卍續藏)》118. p.314a. “門. 狗子還有佛性也無. 師云, 無. 學人云, 上至諸佛, 下至螘子. 皆有佛性, 狗子爲什麽無. 師云, 爲伊有業識性在.”>, <(한 스님이)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대사가 말했다. “집집마다 그 문전에는 장안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같은 책, p.324a. “門, 狗子還有佛性也無. 師云, 家家門前通長安.”>

이덕진 | 철학박사, 한국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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