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봉 당시 제목으로는 《컨택트(Contact)》, 미국 개봉 당시 제목으로는 《어라이벌(Arrival)》 의 원작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는 SF소설이다.

이 작품은 두 개의 축으로 구성돼 있다. 한 축은 주인공인 루이즈 뱅크스가 외계인들의 체경(體鏡, 우주선 장비)에 들어가 외계인들과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고, 다른 한 축은 주인공이 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네 아버지가 지금 내게 어떤 질문을 하려고 해. 이것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나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억에 새겨두려고 하고 있지. 그이와 나는 밖에서 디너쇼를 보기 위해 파티오에 나와 있어. 춤을 추고 싶다고 네 아버지에게 말하자 그이는 쾌히 응했고, 그래서 지금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춤을 추고 있어. 달빛 아래에서, 십대들처럼, 삼십대의 남녀가 앞뒤로 천천히 몸을 흔들면서. 밤의 한기는 전혀 느끼지 않아. 이윽고 네 아빠는 이렇게 말해.
“아이를 가지고 싶어?”


그리고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세월이 흐른 뒤에는 네 아버지도 떠나가고, 너도 떠나가게 될 거야. 이 순간으로부터 내게 남겨질 것은 오직 헵타포드의 언어밖에는 없어. 그래서 나는 주의를 기울이고, 그 어떤 세부도 놓치지 않을 작정이야.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내가 달성하게 될 것은 최소화일까, 아니면 최대화일까?
이런 의문들이 내 머리에 떠오를 때, 네 아버지가 내게 이렇게 물어.
“아이를 가지고 싶어?”
그러면 나는 미소 짓고 “응”이라고 대답하지. 나는 내 허리를 두른 그의 팔을 떼어내고, 우리는 손을 마주잡고 안으로 들어가. 사랑을 나누고, 너를 가지기 위해.


이처럼 소설은 주인공이 딸에게 너를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시작해서 끝이 난다. 일종의 수미쌍관(首尾雙關)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왜 이런 구성을 택한 것일까? 그 이유를 소설 속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사건을 일정 기간에 걸쳐 바라봄으로써 만족시켜야 하는 조건, 최소화나 최대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처음과 마지막 상태는 주인공이 딸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원인은 무엇이고, 그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결과에 대한 지식은 무엇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주인공은 남편이 떠나고 딸마저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딸을 가지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원인은 딸을 갖는 것이고, 결과에 대한 지식은 남편과 딸을 모두 잃는다는 것이다.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알면서도 주인공은 왜 남편과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의 결과로 딸을 갖는 것일까?

주인공 루이즈에게는 일생 동안 두 번의 중대한 전화를 받는다. 하나는 웨버 대령에게서 걸려온 전화, 즉, 외계인과의 대화에 참여해달라는 전화이고, 다른 하나는 산악구조대에서 걸려온 전화, 즉, 딸이 등산하다가 사고로 죽었다는 내용의 전화이다.

웨버 대령의 전화를 받고서 루이즈는 캠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체경(looking glass)이라는 별명이 붙은 외계인의 기계장치로 향한다. 이런 체경은 전 세계에 112개가 있다. 물리학자와 언어학자가 각기 한 명씩 구성된 과학자 팀이 체경 하나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루이즈와 한 팀이 된 것은 물리학자 게리 도널리이다. 루이즈와 게리가 본 외계인의 모습은 아래와 같다.

외계인은 일곱 개의 가지가 맞닿은 지점에 올려놓은 통처럼 보였다. 방사상으로 대칭이었고, 가지는 모두 팔이나 다리로 기능할 수 있었다. 내 앞에 있는 그것은 네 다리를 써서 걷고 있었고, 나머지 세 개의 가지는 팔처럼 측면에 말려 올라간 상태였다. 게리는 이들을 헵타포드라고 불렀다.

헵타포드(heptapod)는 그리스어에서 7을 뜻하는 hepta와 발을 뜻하는 pod를 합친 조어이다. 비유하면 외계인의 모습은 문어와 유사하다. 외계인과의 대화는 언어가 다른 탓에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다. 두 문명의 대화가 물꼬를 트는 것은 루이즈가 영어 단어들을 보여주면서부터이다. 루이즈가 영어 단어들을 써서 보여주자 외계인들도 자신들의 문자들을 보여준다. 외계인의 문자를 묘사하면 아래와 같다.

새둥지처럼 얽히고설킨 문장 어디에서 읽기 시작해도 좋았고, 그대로 뻗어가는 절(節)들을 따라가면 결국 문장 전체를 읽게 된다.
완성된 문장의 획과 최초의 획을 비교하며, 나는 이 획이 메시지에 포함된 몇 개의 다른 구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획은 하나의 연속된 선이었고, 플래퍼가 가장 먼저 쓴 획이었다. 헵타포드가 최초의 획을 긋기도 전에 문장 전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될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거의 만다라에 가까웠다. 나도 모르게 명상상태에 빠져 전제조건과 결론을 호환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숙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을 때도 있었다. 각 명제들 사이의 관계에 고유한 방향성은 없었고, 특정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사고의 맥락’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유에 관여된 모든 요소의 힘은 동등했고, 모두가 동일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루이즈는 외계인의 문자를 어의문자(語義文字)라고 명명한다. 인류의 표음문자나 표의문자와는 다른 형태인 것이다. 가장 큰 차이는 인류의 언어가 정보 전달에 목적이 있는 반면, 외계인의 언어는 계획의 현실화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루이지는 “수행문적 언어에서, 말하는 것은 그것을 실행하는 것과 등가이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해내고, 연대기를 실연해 보이기 위해 행동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루이즈가 외계인 문자의 특성, 즉, 최초의 획을 긋기도 전에 문장 전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될지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동안 게리는 외계인의 물리법칙은 인과적 해석보다는 목적론적 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외계인이 게리가 보여준 물리법칙 중에서 유일하게 관심을 보인 것이 페르마의 원리이다. 페르마의 원리는 대표적인 합목적적인 변분 원리이다. 페르마의 원리에 대해 루이즈가 묻자 게리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게 의인화를 통해 확대해석을 해도 무방하다면, 빛은 일단 선택 가능한 경로들을 검토하고 각각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계산해야 해.
목적지가 없다면, ‘가장 빠른 경로’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지지. 그리고 해당 경로를 가로지르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그 경로 중간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이를테면 수면이 어디 있는지 등의 정보도 필요해.


이는 바꿔 말해 광선은 움직이기 전에 이미 당도할 곳을 사전에 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빛은 이전의 지점을 향해 출발한 다음 나중에 진로를 수정할 수는 없다. 게리의 설명을 듣고서 루이즈는 속으로 이렇게 곱씹는다.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위 문장에서 광선은 외계인의 언어와 물리법칙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루이즈 자신의 운명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루이즈는 외계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기억의 재가 뒤뿐만 아니라 앞쪽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기억은 연속적으로 도착하지는 않는다. 그 기억은 외계인과의 인터뷰로 시작해서 루이즈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 과정에서 루이즈는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경험한다. 루이즈의 의식은 시간 밖에서 타다 남은 반세기 길이의 잿불이 된다. 이런 경험을 할 때 루이즈는 세월 전체를 동시에 지각한다.

그런 까닭에 루이즈는 외계인과의 대화에 참여한 인연으로 게리와 결혼을 하게 되고, 오래지 않아서 이혼을 하고, 게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불의의 사고로 잃게 된다는 것을 일찍이 알게 된다.

미래가 현재의 사건에 개입하지만 미래의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없다. 루이즈는 자신의 운명을 달게 받아들인다. 루이즈에게 미래란 게리와 사랑하고, 그 사랑의 결과로 딸을 갖는 기쁨의 시간인 동시에 게리가 떠난 뒤 딸마저 잃어야 하는 슬픔의 시간이다. 루이즈가 미래에 낳게 될 자신의 딸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인상 깊다.

나는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유대 관계의 증거, 네가 내 뱃속에 있던 자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고양감을 느껴. 설령 너의 모습을 직접 본 일이 없다고 해도, 나는 수많은 갓난아이들 사이에서도 단번에 너를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저쪽은 아녜요. 아, 쟤도 아닙니다. 잠깐, 저기 저애예요.
예, 그 아이가 맞아요. 제 딸입니다.

루이즈는 신생아실에서 수많은 갓난아이 중에서 대번 딸을 찾을 수 있다. 루이즈에게 딸은 가없는 환희의 존재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루이즈는 방부제 냄새가 나는 시체안치실에서 대번 딸을 찾아낸다. 루이즈에게 딸은 끝없는 슬픔의 존재인 것이다.

소설은 이렇게 수미쌍관(首尾雙關)을 이루면서 끝이 난다. 아니, 끝이 남으로써 다시 시작된다. 그렇게 끊임없이 영겁회귀(永劫回歸)한다. 그 구성은 과거, 현재, 미래 시제가 없는 외계인의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사랑함에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딸을 떠올리게 한다. 시작하는 지점에서 끝이 나고, 다시 끝이 나는 지점에서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을 불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시공간을 비선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비선형적인 시공간에서 루이즈가 택하는 삶의 방식은 처절하다 못해 숭고하다.

소설 속에서 루이즈가 딸에게 책을 읽어주는 대목은 인상 깊다.

“벌써 무슨 얘긴지 알고 있는데 왜 나더러 읽어달라는 거야?”
“얘기를 듣고 싶으니까!”


딸의 대답에서 루이즈가 비극적 결말을 알면서도 그 여정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게 된다.

유응오 | 소설가, 전 주간불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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