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은 육체적으로 제한된 유한한 삶을 살아야하는 인간의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탄생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육체적으로 제한된 유한한 삶을 살아야하는 인간의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탄생했다. 《비극의 탄생》의 여러 주제문 중의 하나인 “인간이 비자연적인 방법을 써서 자연에 저항해서 승리하지 않는 것 말고, 인간이 자연으로 하여금 그 비밀을 털어놓도록 강요할 방법이 달리 있는가!”가 말하는 바와 같다. 그리스인들이 비자연적 방법인 [그리스]비극을 통해 자연의 잔혹성-잔인성에
저항해서 승리하려고 한 것처럼 니체가 《비극의 탄생》을 통해 자연의 잔인성-잔혹성에 저항해서 승리하려고 했다.

비극은 인간이 ‘존재’(하이데거)와 접촉하는, 혹은 ‘존재의 근원’(니체)과 접촉하는 사건일지(事件日誌) 그 자체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용어로서, 카타르시스 미학 1차적 부분을 말해야 할 때 그것은 연민과 공포에 관해서이다. 카타르시스 미학 2차적 부분을 말해야 할 때 그것은 물론 연민과 공포의 배설에 관해서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비극론을 플라톤의 하늘-형이상학과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의 땅-형이상학, 그 ‘단호한 형이상학’에 부응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니체 용어로 말하면 디오니소스적 배설, 그리고 아폴론적 배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 형이상학이 없을 리 없다. 일상을 영위하는데 장애가 되는 격정들을 배설시켜 일상을 제대로 영위하게 하는 것, 이 또한 형이상학이라면 형이상학이리라.

아폴론적 배설 중의 하나가 연민과 공포라는 방식으로 ‘비극적-영웅적’ 주인공과 동일화과정을 거침으로써 관극자 자신의 절대적 힘을 상기시키는 것이다─형이상학이다. ‘아폴론적인 것’의 주안점은 대사가 아니라 장면에 있다. 무대-형상-의상-동작-대사 등의 조형성이다. [물론 아폴론적인 것에서 음악성 또한 배제되지 않는다. 대사의 억양-템포-박자 등이 음악성과 관계한다] 신(神)과 영웅 세계의 비현실성, 그 가상의 세계가 그 ‘가상으로서 현존’을 시인(是認)시킨다. 있는 것인가-없는 것인가, 꿈인가-생시인가, 형이상학이다. 아폴론적 배설 또한 존재자가 처한 자연의 잔혹성의 배설이다. 생-로-병-사의 현존을 생-로-병-사의 잔잔한 멜로디로 시인시킨다. 디오니소스적 배설이 그리스비극의 본래적 배설이다. 합창-디티람보스가 그 거대한 실존으로, 그 거대한 합창-율동-기악 등으로, 디티람보스합창단과 관객의 뒤섞임으로, 실존의 잔혹성을 뱉게 한다. 생-로-병-사의 현존을 생-로-병-사의 광포한 멜로디로 시인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 비극론 중 카타르시스론의 2차적 부분인 ‘격정의 배설’을 니체의 ‘미적 현상에 의한 현존 시인(是認)’(“세계 현존은 오로지 미적 현상에 의해 정당화된다”)과 유사관계가 아닌, 유비관계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차이는 잔잔함과 광포함의 차이이다. [그리스비극의 형이상학은 아폴론적 형이상학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디오니소스적 형이상학이다]

디오니소스적 도취에 의한 자기망각이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현존의 부조리’를 덮어쓰는 방식이다. 모든 개체-삶의 ‘생성과 소멸의 고통’을 전면적으로 시인하는 방식이다. 자기망각의 다른 말이 망아적(忘我的) 합일이다. 니체 어조: ‘망아적 합일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인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겠는가.’ 개체 몰락을 ‘[아름다운] 변용’으로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개체 몰락을 그 폭발적 방종Kränkung이 야기하는 경악Betroffenheit으로서 보여준다.─디오니소스적 도취에 의한 자기망각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변용은 비극의 두 번째 구성단계로서, 아폴론적 아름다운 가상 속, 주인공 형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개별자가 합창단 무리 맞은편에서 합창단무리에 의한 디오니소스적 해체, 그 해체에 저항하는 시도를 한다. 아폴론적 꿈-예술은 꿈이 말하는바 무엇보다도 조형예술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적 인식에는 종교가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온갖 대답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 비극은 철학적 인간학의 보고이다. 셰익스피어 비극은 비극이지만 비극 일반의 ㅡ 니체 관점에 근거해서 말하면 ㅡ 비극적 초월이 없다. [물론 햄릿-천재에서 비극적 초월을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비극의 형이상학을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비극적 초월이 의미하는 것은 ‘패배하면서 승리한다.’이다. 자연과 신에 대해 패배하면서 승리하는 것이다, 적확하게 말하면 ‘패배하면서 승리하는 것처럼’ 승리하는 것이다. 자연과 신은 그 승리에 일말의 관심도 없다. 니체식의 비극적 초월을 야스퍼스식(式)으로 말하면 ‘가장 볼품없는 구원’이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작품을 생산하는 것은 비극성에 대한 환영적 직관력이 아니라, ‘철학적 경향’이다. 철학적 경향이라는 말 대신에 철학적 직관능력을 말하는 게 좋겠다. 철학적 직관능력은 존재의 심연을 꿰뚫어보는 능력이다. 이러한 철학적 직관능력이 청동기시대의 그리스인들에게 있었다. 그들의 그 철학적 능력을 기반으로 해 그리스인들은 디오니소스-제례를 만들었다. 기원전 6세기 이후에 디오니소스제례와 전혀 다른 형태로서 피타고라스식 제례가 출범했다. 물론 피타고라스제례에도 형이상학이 있다.

-시인 · 추계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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