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생사고해의 속박이라고 하고, 이러한 생사고해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이러한 생사고해의 속박과 해탈은 누가 묶고 누가 푸는 것인가. 이에 대해 《열반경》에서는 현재의 오온과 중음신의 오온과 미래의 오온이 어떻게 삼세를 통해 속박과 해탈하는지 해명하고 있다.

오온은 물질적인 덩어리인 색온(色蘊),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는 수온(受蘊), 생각 관념의 주체인 상온(想蘊), 의지·충동·의욕의 주체인 행온(行蘊), 인식 판단의 주체인 식온(識薀)이 그것이다. 식온의 육체에, 수온·상온·행온·식온의 네 가지 정신작용이 합해져 있는 것이 우리 중생이고, 이 오온이 모여 끊임없이 작용하므로 오취온(五取蘊)이라 한다.

우리 중생들의 오온(五蘊)은 끊임없이 생멸을 반복하니 잠깐 잠깐 사이에 났다가 없어졌다 하므로, 만일 났다가 없어졌다 한다면 과연 누가 묶고 누가 푸는 것이냐는 것이다. 중생의 삶은 현재의 오온으로 인하여 뒤의 오온을 내는데, 죽음에 이르면 중음신의 오온이 생긴다. 그러면 이때는 현재의 오온이 스스로 멸하고 중음신의 저 오온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중음신의 오온을 볼 수 없으니 우리가 이제껏 보아온 오온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지만 비록 저 중음신의 오온에 이르지 않더라도 능히 저 오온을 낸다는 것이다.

경에서는 중음신의 오온은 우리 중생의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 없고 천안(天眼) 정도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를 비유하면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오는데, 이 씨앗이 싹에 이르는 것이 아니지만, 싹에 이르지 않더라도 능히 싹을 내는 것이다. 곧 현재의 우리 오온이 죽음에 이르면 중음신이 있게 되는데, 이 오온이 곧 중음신에 이르는 것이 아니지만, 중음신에 이르지 않더라도 능히 중음신을 내게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이 오온을 풀고 다시 중음신의 오온을 만드는 것인가.

《열반경》에서는 ‘등불과 어둠의 비유’와 ‘도장의 인(印)’에 대한 두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중생의 생사는 중생의 업과 과보로 이 오온이 없어질 때 저 오온이 계속해서 생겨나니, 마치 “등불이 켜지면 어둠은 사라지고 등불이 꺼지면 어둠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도장에 있는 인(印)에 인주를 묻혀서 찍으면 도장과 인주가 합해져 글씨가 생기고 도장은 없어진다”고 하니, 도장의 인이 변하여 인주에 있는 것도 아니고 글씨가 인주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다른 데서 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도장과 인주의 인연으로 글씨가 생기고, 등불의 인연으로 어둠이 생긴다고 할 수 있다.

곧 우리의 생사는 현재의 오온이 없어지면 중음신의 오온이 생기니, 현재의 오온이 변해서 중음신의 오온이 되지도 않고, 스스로 중음신의 오온이 생기는 것도, 다른 데서 오는 것도 아니다. 곧 현재의 오온이 원인이 되어 중음의 오온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마치 도장에 있는 인을 인주에 묻혀서 서류에 찍으면 도장이 사라지면서 글씨가 생기는 것과 같이 현재의 오온이 인연 화합하여 사라지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중음의 오온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사의 속박은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풀 것인가.

우리는 현재의 오온에서 오취온하여 살고 있다. 곧 색온의 육근에서 육경을 인연하여 끊임없이 수·상·행·식하면서 무수한 선업과 악업을 짓고 산다. 그렇지만 우리는 얼마나 큰 선업 악업을 지었는지 보지 못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그런데 죽음에 이르면 이 업이 보인다고 한다. 사람들이 임종에 이르면, 스스로 크게 괴로워하면서 친척들이 둘러앉아 울고불고 슬퍼하는 것을 보는데, 본인도 놀라서 공포가 밀려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비록 오근의 오정(五情)은 있지만 감각이 사라지고, 팔다리는 떨리어 스스로 진정하지 못하며, 몸이 식어가고 기운이 다해가면 비로소 그동안 닦아왔던 선업과 악업의 과보를 보게 된다고 한다. 마치 등불이 꺼지면 어둠을 보듯이….

죽음에 이르면 이와 같이 생전에 오온이 닦은 과보에 따라 오온의 중음신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 중음신에는 세 가지 먹는 것이 있어서 영위한다는 것이다.

첫째, 사식(思食)은 식욕을 일으켜 물질적 음식을 먹어서 실제로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 생각으로 먹는 비물질적인 식사이다.

둘째 촉식(觸食)은 육근을 충족시켜주는 식사로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이 만족하는 식사이다.

셋째 의식(意食)은 뜻으로 하는 식사이다. 중음신은 선한 업의 과보와 악한 업의 과보를 따라, 선한 업을 원인으로 해서는 선한 각관(覺觀)을 내고 악한 업을 인해서는 악한 각관을 내어 부모의 인연 따라 탁태하게 된다. 이때 중음신의 오온은 사라지고 후생의 오온을 내는 것이 마치 도장에 묻혀진 인주의 인(印)이 소멸하고 글씨가 나타남과 같이 육근이 갖춰진다. 이 육근에서 탐심을 내고 무명을 내니 이들이 인연하여 마침내 육경의 경계를 보는 것이 전도되어서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보고, 내가 없는 것을 내가 있다고 착각하며, 즐거울 만한 것이 없는 데도 즐겁다고 하며, 청정하지 못한 것을 청정하다고 한다. 이를 네 가지 전도(顚倒)된 마음이라고 한다. 이 네 가지 전도 망상으로 선한 업과 악한 업을 짓는다. 곧 번뇌가 업을 짓고 업은 번뇌를 지으므로 속박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생사의 속박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이 오온의 중생이 부처님이나 불제자 선지식을 만나서 십이부경을 듣고, 법문을 들으면 착한 경계를 관하고, 선한 경계를 관하여 큰 지혜를 얻고, 지혜를 얻으면 바른 지견으로 생사의 악업을 뉘우쳐서 탐욕을 타파하게 된다. 탐욕을 무너트리고 생사에서 벗어남을 해탈이라 하고, 전도심으로 번뇌가 일어나 오온의 생사가 일어나는 것을 속박이라 한다. 곧 번뇌가 있으므로 속박이라 하고, 번뇌가 없으므로 해탈이라 한다. 마치 주먹과 손바닥을 모으는 것과 깍지 끼는 것이 합하고 흩어져서 났다 없어졌다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