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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양귀비, 전설이 된 이름
비극적 사랑 예술작품 소재로 승화
2017년 08월 01일 (화) 21:13:15 김문갑 meastree@naver.com

1. 어린 참새, 그리고 에디트 피아프

요즘 한 자동차 광고가 TV에 자주 비친다. 높다란 절벽에서 애써 두려움을 누르며 바다로 뛰어내리던 젊은이가 나오고, 성공한 장년의 신사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과속을 즐기는 거친 드라이버로 변신한다. 글쎄다. 거칠고 무모한 게 젊음의 상징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썩 좋아하지 않는 자동차회사의 광고이고 보니 이것저것 트집 잡고 싶은 생각이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경음악에 끌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오래간만에 듣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목소리다.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 아련한 이름만큼이나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an)〉는 나를 먼 젊은 시절로 데려간다.

아니오, 나는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아요.
남들이 내게 한 일은 좋건 나쁘건 나에게는 같은 거예요.
그것은 이미 청산되었지요.
깨끗이 청소가 끝났어요.
잊어버렸어요.
나는 과거를 저주하지 않아요.
추억과 함께 슬픔과 기쁨에 불을 붙였어요.
그런 것은 이제 필요가 없어요.
사랑도 그 트레몰로도 모조리 청산해 버리고,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나의 인생도 나의 기쁨도 지금 당신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에디트 피아프는 1915년 12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거리의 곡예사, 어머니는 거리의 가수였다. 어려서 부모에게 버림받고 그녀는 사창가 포주였던 할머니에게 맡겨져 창녀들 틈에서 자랐다. 제대로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에 걸렸고, 당연히 키는 142cm를 넘지 못했다. 작은 키 때문에 처음 무대에 설 때의 예명이 ‘어린 참새’라는 의미의 ‘라 몸므 피아프(La Môme Piaf)’였다. ‘라 몸므(La Môme)’는 그녀의 일생을 그린 전기영화 《라 비 앙 로즈》의 원제이기도 하다.

   
▲ 에디트 피아프, 타계 50주년 기념 앨범 자켓

20세에 카바레 제니스의 주인 루이 르플레(Louis Leplée)의 눈에 띄어 무대 위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애절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는 곧바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이제 불행은 끝난 줄 알았는데, 그녀에게 예명을 지어주며 데뷔시켜준 루이가 살해되고 그녀는 다시 거리의 가수로 나서야 했다. 이 때 작사가 레이몽 아소(Raymond Asso)가 나타났다. 그는 발성법, 악보 보는 법, 무대 매너 등을 가르치며 에디트를 최고의 가수로 키운다.

재능은 그것을 알아주고 가다듬어 줄 사람을 만나야만 피어나는 법이다.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재능을 주고, 그 재능을 키워줄 사람을 못 만나게 하는 것은 심술이다. 그건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다. 천부의 재능을 갖고 태어나서 꽃 피우지 못하고 죽는 것처럼 불행한 일도 없다. 평범함보다 못한 게 때를 못 만나고 알아주는 사람을 못 만나는 비범함이다.

한편 천재성을 알아보고 키워준 사람과의 이별 또한 필연이다. 더 훌륭한 장인을 만나고 더 큰 무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인 것이다. 에디트에게 루이 르플레가 그녀의 타고난 목소리를 알아준 첫 남자였다면, 레이몽 아소는 더 큰 세계로 도약하게 해준 스승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원석이 보석이 되어 찬란하게 빛난다.

에디트 피아프의 거의 마지막 공연이었을 싶은 영상을 보았다. 아마도 1960년 12월 올랭피아 극장 공연이었을 것 같은데, 45살의 에디트는 걸음을 거의 떼지 못하는 할머니 걸음으로 조심조심 무대 위 마이크 앞에 선다. 그리고 〈아뇨,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를 부른다. 영화 <라 비 앙 로즈>에서도 이 노래가 피날레를 장식하며 그녀의 삶을 압축해 보여준다.

그녀의 고백에 의하면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는 마르셀 세르당이란 권투선수였다. 미국 공연 중에 두 사람은 만났고, 뜨겁게 사랑했다. 하지만 마르셀은 세 아이의 아버지인 유부남이었다. 영화에선 보고 싶다는 에디트의 전화에 무리를 해서 파리로 오다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마르셀이 죽는다. 이후 그녀의 삶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결혼 실패와 뒤이은 심각한 교통사고, 그리고 사고 후유증을 견디기 위해 맞기 시작한 모르핀…. 모르핀 중독은 이 비범한 여인의 생명을 불과 47세에 앗아간다.

1960년 올랭피아의 공연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을 모르핀으로 참아가며 선 마지막 무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친다. 그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목소리이다. 겨우겨우 한 발 한 발 마이크 앞으로 걸음을 옮긴 병든 여자의 노래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어디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지? 의문은 감동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

근래에 어지간히 자주 이 노래를 들었다. 예인(藝人)이란 저런 것인가? 마지막으로 무대 위에 선 에디트의 모습은 참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만약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그래서 가끔은 TV에 얼굴을 비친다면…. 그리운 얼굴 보듯 반가울까? 에디트에겐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어쩌면 그렇게 일찍 죽었기에, 그녀의 노래와 삶이 더욱 감동적인 건 아닐까?

2. 양옥환, 하늘은 그녀에게 재능을 주고, 좋은 환경을 주고, 절호의 기회를 주었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고 했던가. 아름다운 사람이 오래 살면 추해지나? 꼭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곱게 늙으며 노년이 더 아름다운 분들도 무척 많다. 역사 속에 일찍 죽은 가인들은 오히려 적을 것이다.

70년대를 풍미했던 한 일본인 여가수가 자신이 양귀비(楊貴妃)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굳이 그 여가수의 이름을 들먹일 필요조차 없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다만 이 작은 일화에 주목해 보는 이유는 무엇이 1300여 년 전에 죽은 양귀비를 아직도 되살리고 있는지 궁금해서다. 그것도 바다 건너 외딴 나라 일본에서 말이다.

전설에 의하면 양귀비는 살해당하지 않고 살아서 일본으로 건너가 아이까지 낳고 늙어 죽었다고 한다. 그러니 스스로 양귀비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사람도 나오는 것인데, 글쎄다. 사실일까?

양옥환(楊玉環), 그녀는 719년 6월 1일 촉주(蜀州, 지금의 사천성) 숭경(崇慶)에서 하급관리인 양현염(楊玄琰)의 막내딸로 태어난다. 그러나 그녀가 10살이 되기도 전에 부모가 모두 병사하여 하남성(河南城) 낙양(洛陽)에 있던 숙부 양현교(楊玄璬)에게 맡겨진다. 언니 셋은 이미 출가한 후였기에 옥환만 낙양에 가게 되는데, 이 일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된다.

낙양은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국가 재건의 기치를 내걸고 천도를 단행한 이래 일찍부터 고대 도시로 번성하고 있었다. 북위(北魏)의 수도였고, 당대(唐代)에 들어와 무측천(武則天)이 여황제로 있을 때는 부도(副都)로서 수도 장안(長安)을 대신하였다. 동도(東都)로서 정치적 중요성은 물론, 대운하를 통해 강남의 물자가 모이는 경제 중심도시였다. 중국의 남방문화와 북방문화가 만나고,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의 문물이 교차하던 문화 중심 도시이기도 하였다. 일찍이 “낙양(洛陽)의 지가(紙價)가 올랐다”는 낙양지귀(洛陽紙貴)의 고사성어가 만들어진 도시답게 문화를 창조하고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었다. 더구나 개원(開元)의 치세(治世)를 만난 문화의 중심지가 아니던가. 낙양엔 호풍(胡風), 즉 서역의 문물과 문화가 물밀 듯 유입되었다. 낙양사람들은 페르시아풍의 옷을 입고, 로마풍의 모자를 쓰고, 중앙아시아풍의 음악을 들었다. 그런 음악에 맞춰 호선무(胡旋舞)와 호등무(胡騰舞) 같은 서역의 춤이 또한 유행하였다. 이렇게 서역의 문물이 한족의 전통 문화와 어우러지며 이른바 당풍(唐風)이 만개하였던 것이다.

이런 환경은 양옥환의 천부적인 예술성을 일깨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하게 문화가 융성했던 시대의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옥환은 빠르게 낙양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깨달아갔다. 거기에 비록 하급관리였지만 상당한 지식인으로 추측되는 숙부로부터 경서와 시문, 그리고 예의범절 등을 익힌다. 이제 타고난 미모에 도시적 세련미, 그리고 예술성이 더하여 황실의 며느리로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게 된다. 이런 게 아니었다면 어떻게 하급관리의 조카가 황자(皇子)와 결혼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옥환의 남편 수왕(壽王) 이모(李瑁)는 현종(玄宗)이 특별히 사랑하는 무혜비(武惠妃)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당연히 신중히 골랐을 것이다. 비록 당나라 황실이 매우 개방적이고, 양씨(楊氏) 집안이 한때는 잘나가던 명문가문이었다고 해도, 일개 하급관리의 조카딸이 하루아침에 황가의 며느리가 될 때는 옥환에게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잠시 당나라 황실의 예술성에 대해 살펴보자. 고조(高祖) 이연(李淵)은 아들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여생을 비파를 뜯으며 보낸다. 비파의 명인까지는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비파 마니아였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태종 또한 음악과 춤 등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서예(書藝)에 일가견이 있어서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라는 《난정집서(蘭庭集序)》를 손에 넣고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 책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데, 태종이 너무 아껴 죽은 후에 관속에 넣어 저승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측천의 시, 현종의 음악…. 이렇게 당나라 황실엔 예술가의 유전자가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예인(藝人)을 존중하는 기풍으로 이어져, 이백(李白), 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 등 기라성 같은 시인, 그리고 음악인, 춤꾼, 화가들이 양산되었던 것이다. 당풍(唐風)은 동양인의 이상이며, 모범이며, 기준이 되었다.

당나라 황실의 이런 분위기는 이제 수왕부 저택의 안주인이 된 양옥환에게는 그야말로 자신의 예술성을 완성하고 발산시키는 최적의 환경이 되어주었다. 궁중의 세련된 매너와 최고의 예술성이 고스란히 그녀의 재능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녀가 수왕부에 들어가 현종에게 발탁되기까지 4년여의 세월은 그녀의 천재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데 충분한 시간이 되었다. 그녀의 예술성이 세련되어 갈수록 미모 또한 더욱 농익어갔다.

그러던 중 무혜비가 죽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중년의 황제는 쓸쓸한 밤을 보낸다. 대부분의 사서나 야사류의 책에 의하면, 슬픔에 잠겨있는 현종을 위로하고자 환관 고역사(高力士)가 당시 수왕비였던 양옥환을 추천하였다거나, 혹은 누군가가 현종에게 양옥환을 취하라고 부추겼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개방적인 당나라의 황가라고 해도, 누가 감히 며느리를 취하라고 아뢸 것이며, 그렇다고 선뜻 며느리를 대령하라고 명령할 수 있을까? 영화 <양귀비, 왕조의 여인>에서 황제는 옥환의 사랑을 기다리고 옥환은 주저하며 고뇌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과연 그럴까?

옥환이 가기 싫은 황궁에 어쩔 수 없이 갔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에게 황제의 구애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본래 천재는 천재만이 알아보는 법. 진정한 예술은 참 예술가만이 느끼는 것이다. 황가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농후해진 옥환의 예술성이 탁월한 예술가이자 고도의 심미안을 지녔던 현종의 눈에 띄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으리라. 다만 며느리로 여기고 있다가 예기치 않게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공허 속에 불쑥불쑥 떠오르는 옥환의 춤사위며, 손짓, 몸짓이 견딜 수 없게 생각났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황제가 아닌가. 한마디 말로 원하는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사람.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황제는 명을 내렸고, 옥환은 주저 없이 명에 따랐을 것이다. 더 큰 세계를 향해, 드넓은 예술세계에서 마음껏 자신의 끼를 펼치고 싶었을 것이다. 하늘은 옥환에게 천부의 재능과 이를 펼칠 수 있는 환경과 절호의 기회를 준 것이었고, 그녀는 놓치지 않고 그걸 잡았다. 

   
▲ 송말(宋末)의 화가 전선(錢選, 1235~1307)이 그린 당현종과 양귀비가 말에 오르는 모습.

3. 사랑은 예술을 낳고, 죽음은 전설을 낳는다

구름 같은 머리카락 꽃 같은 얼굴 흔들거리는 금장식 雲鬢花顔金步搖
따뜻한 연꽃 휘장 속에서 봄밤을 보내네 芙蓉帳暖度春宵
봄밤은 너무 짧아 해 높이 떠서야 일어나니 春宵苦短日高起
이때부터 황제는 조회를 보지 않았네 從此君王不早朝
1)

이제 본격적으로 양옥환의 예술세계가 펼쳐졌다. 고기가 물을 만난 듯, 명창이 고수를 만난 듯, 그녀의 천부적 재능과 끼는 만개하기 시작하였다. 황제 또한 잠자고 있었던 자신의 예술성이 폭발하였다. 두 남녀는 예술적 동지였으며, 공동 기획자였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이였다.

화청궁 높이 구름 위로 솟고 驪宮高處入靑雲
신선의 음악은 바람 타고 곳곳에서 들려온다 仙樂風飄處處聞
느린 가락 나른한 춤사위 관현악에 맺히는데 緩歌慢舞凝絲竹
온종일 황제는 보고 또 보아도 부족하네 盡日君王看不足
2)

느린 가락 나른한 춤사위는 아마도 〈예상우의(霓裳羽衣)〉 곡과 안무를 형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양귀비, 왕조의 여인》을 만든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이 직접 연출한 뮤지컬 <장한가>가 서안의 화청궁(華淸宮)에서 밤이면 공연되는데, 〈예상우의〉를 기본으로 음악과 안무가 짜여진다. 사실 여부를 어떻게 고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양귀비, 왕조의 여인>보다는 훨씬 낫다.

하여튼 현종과 양귀비 두 사람은 화청궁의 온천탕에서, 혹은 대명궁(大明宮)의 이원(梨園)에서 음악을 가다듬고 춤을 구상하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현종의 자신감이었을까? 아니면 무관심이었을까? 간신 이임보(李林甫)와 시정잡배 양국충(楊國忠)에게 나라를 맡겼다면 이미 거덜 난 것과 다를 게 없다. 황위에서 쫓겨나는 것 또한 시간 문제였을 뿐이다.

양국충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안록산(安祿山)이 난을 일으키고, 현종과 양귀비는 급히 피난길에 오른다. 그리고 마외(馬嵬)의 언덕에서 병사들은 양국충을 죽이고 양귀비의 목까지 요구하기에 이른다. 절대권력자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양귀비의 목에 줄이 걸렸다.

어양 땅에서 북소리 땅을 울리니 漁陽瞽鼓動地來
예상우의곡도 놀라 파하고 驚破霓裳羽衣曲
구중궁궐에 연기 솟아오르니 九重城闕煙塵生
많은 수레며 병사들 서남으로 피난가네 千乘萬騎西南行
화려한 깃발 흔들흔들 가다서다 하며 翠華搖搖行復止
도성 서쪽 백 여리를 나아갔는데 西出都門百餘里
호위군사 더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 할 수 없도다 六軍不發無奈何
아름다운 가인이 군마 앞에서 죽는구나 宛轉蛾眉馬前死
3)

황제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기에 황제를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만든 장본인으로 양귀비에게 책임이 지어진 것이다. 혹자는 현종이 비겁하다고 한다. 하지만 황제란 지위는 본래가 그런 것이다. 책임을 지고 싶어도 질 수 없고, 책임을 안 지려고 해도 안 질 수 없는 자리이다. 장안으로 돌아와 황제의 위를 물려주고 현종은 죽는 그 순간까지 양귀비를 그리워하다가 죽었다. 그리고 양귀비가 자결한 마외의 언덕엔 무수히 많은 시인들의 헌시가 읊어졌다.

그녀의 이야기는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상상력이 동원되고 이야기가 더해졌다. 마치 정전(鄭畋)의 〈마외파(馬嵬坡)〉처럼 양귀비는 매번 새롭게 태어났다.

현종은 돌아왔어도 양귀비는 죽고 없네 玄宗回馬楊妃死
운우의 정 잊을 없으니 날마다 달마다 새롭구나 雲雨雖忘日月新

백거이의 〈장한가〉를 비롯하여 이백의 〈청평조(淸平調)〉 등 양귀비를 읊은 시는 한없이 많다. 소설로도 《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 《장한가전(長恨歌傳)》, 그리고 희극으로는 《당명황추야오동우(唐明皇秋夜梧桐雨)》, 《마진감(磨塵鑒)》, 《경홍기(驚鴻記)》, 《채대기(彩毫記)》, 《장생전(長生殿)》, 《귀비취주(貴妃醉酒)》, 《태진외전(太眞外傳)》, 《마외파(馬嵬坡)》, 《당명황여양귀비(唐明皇與楊貴妃)》 등등이 있다.

그녀는 죽어서 전설이 되었다. 그녀가 만약 현종과 백년해로하였다면, 그래도 전설이 되었을까? 전설은 아쉬움이 만들고 아쉬움은 비극적 상황에서 피어난다. 〈장한가〉에서 백거이는 양귀비는 물론 현종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못다 이룬 사랑을 애석해한다. 어쩌면 산다는 건 이런 애석함과 아쉬움의 연속인지 모른다. 이런 삶의 본질적인 비극성이 유난히도 아쉬움이 짙게 남는 사람에게 투영되면 전설이 만들어진다. 양귀비는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세월이 더 지나면 에디트 피아프도 전설이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아뇨, 난 후회하지 않아요〉를 들으며 그리워하고, 눈물지을 것이다.

주) -----
1) 백거이, 〈장한가〉 중 일부
2) 백거이, 〈장한가〉 중 일부
3) 백거이, 〈장한가〉 중 일부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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