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구달의 《희망의 밥상》을 읽은 후 작은아이는 채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얼마 안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벌써 1년째 고기를 먹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고기 끊기는 술이나 담배 끊기보다 어렵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그런 결단을 내리게 했는지 궁금해 남편도 《희망의 밥상》을 읽었습니다. 그러더니 남편도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가족 4명 중 두 사람이 고기를 먹지 않게 됐습니다. 그러다보니 집에서 고기 요리는 하지 않게 됐습니다. 이렇게 《희망의 밥상》이 우리 집에 일으킨 변화는 컸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한국, 2017)가 아마도 이런 변화를 일으킬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서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당분간은 고기를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입니다. 죄책감 없이 고기를 먹기 힘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삼겹살을 먹으면서 돼지를 떠올리지는 않았습니다. 돼지에게 감정과 생각이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돼지는 그저 먹거리 정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먹고 있는 돼지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근접거리로 다가가자 돼지에게도 감정이 있고 생각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죽음을 너무나 두려워하는 존재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런데도 고기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옥자>는 봉준호 감독의 글로벌 프로젝트 두 번째 영화로 넷플릭스라는 헐리우드 자본으로 만들졌습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공장식 축산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비인간성을 폭로했습니다. 영화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났을 때 동물에 대해 불쌍해하는 마음이 생기고 또 고기를 적게 먹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는 건 영화의 설득력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경우는 원래 고기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먹지 않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 집 큰애 같은 경우에는 고기반찬이 없으면 밥 먹은 것 같지 않다고 느낄 정도로 고기를 좋아하는데 이 영화를 본 후 고기를 1주일에 한 번만 먹어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을 보면 봉준호 감독은 확실히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는 영화를 통해 사회를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그의 의도가 먹혀들었으니까요.

영화 <옥자>는 강원도 청정지역에서 슈퍼돼지 옥자와 산골소녀 미자(안서현)가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아가는 미자에게 옥자는 세상에서 유일한 친구입니다. 늘 옥자와 어울려 다니며 감도 따고 물고기도 잡고 산을 놀이터 삼아 뛰놀고, 밤에도 옥자와 함께 잠들 정도로 미자에게 옥자는 세계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옥자에게 미자는 어떤 존재냐면, 집으로 돌아오다가 미자가 절벽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때 옥자는 이쪽 벼랑에서 저쪽 벼랑으로 자신의 몸을 날리며 미자를 살리려고 애썼습니다. 미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옥자에게 미자는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런 이타심은 사람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숭고한 것입니다.

반면에 슈퍼돼지 옥자의 창조주라고 할 수 있는 초국적 기업 미란도의 CEO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는 옥자를 그저 먹거리로만 바라보는 인물입니다. 칠레의 한 농장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슈퍼돼지를 만들고, 그걸 26개국에서 키우게 하고, 그들 중 가장 크고 튼튼하게 자란 돼지를 뽑아 콘테스트를 개최하고자 하는 목적 또한 친환경 기업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루시의 이런 계획으로 인해 옥자는 미국으로 끌려가게 됐습니다.

옥자가 사람들에게 끌려가고 나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미자는 몹시 분노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빼앗긴 미자는 지옥이라도 가겠다는 태도였습니다. 벼랑에서 옥자가 그랬던 것처럼 미자 또한 친구를 구하는 데 거침없었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향해 돌진하는 거침없는 태도는 영화에서 매우 신선한 에너지로 작용했습니다. 미자는 옥자를 되찾아오기 위해 서울로 가야 하는데 그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저금통을 내리쳤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저금통이 깨지면서 동전과 지폐가 방안에 가득 흩어졌는데, 이 장면은 돈을 위해 가족인 옥자를 버린 할아버지에 대한 저항과 분노를 표출한 장면이기도 하고, 배금주의 사회에 대한 반항으로도 비쳐졌습니다.

미자는 할아버지가 옥자를 키우는 대가로 받은 금돼지를 들고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산을 뛰어내려오는 미자의 모습은 가족을 찾기 위해서라면 지옥이라도 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졌습니다. 옥자가 갇혀있는 미란도의 서울지사로 들어갈 때도 미자는 몸으로 돌진해 회사 창문을 부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이때도 매우 저돌적이었습니다. 옳은 것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수 있다는 순수한 정의감이 보는 이로 하여금 통쾌감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미자에게 중요한 건 오직 옥자뿐이기에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때 보인 미자의 모습은 헐리우드적 영웅의 모습이었습니다. 정의를 위해 싸웠던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의 액션을 닮았습니다. 그러나 옥자에겐 그들이 갖고 있는 초능력이 없습니다. 대신에 가족인 옥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있기에 이들 영웅 못지않은 강한 에너지가 느껴졌습니다.

한편 산에서 끌려 내려온 옥자의 처지는 참으로 처참했습니다. 산에서 살 때 옥자는 하나의 생명체로 존중받았고 또 미자의 가족이었지만 산에서 내려온 옥자는 그저 고기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옥자를 물건 취급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동물박사로 통하는 조니(제이크 질렌할)조차 살코기의 질감과 맛을 연구하기 위해 옥자의 살점을 떼 내는 역할을 할 뿐이었습니다.

컨테이너 트럭에 실려 가던 옥자가 탈출해서 지하상가에서 쫓기는 장면은 오늘날 동물들의 처지를 적절하게 보여주는 상황이었습니다. 옥자는 사람들에게 쫓겨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지하상가에서 우왕좌왕 뛰어다니면서 넘어지고 물건을 깨트리고 한바탕 소동을 벌였는데 현대의 도시 한가운데를 커다란 동물이 뛰어다니는 상황은 너무나 이질적이었습니다. 이곳은 돼지가 있어야 할 곳이 못됐습니다.

마침내 옥자는 공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돼지들은 스턴건으로 죽임을 당하고 회전통에서 굴러 나오는 순간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살코기가 분류됐습니다. 넓은 공터에는 수많은 슈퍼돼지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뱉는 단말마의 울음이 어두운 하늘로 울려 퍼졌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유태인의 모습 같았는데 감독이 이 상황을 차용한 것은 동물의 처지가 그때 유태인의 처지처럼 억울하고 불쌍하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함입니다.

오늘날의 동물의 처지는 너무나 처참합니다. 유전자 조작으로 생겨난 동물은 유전자 조작 사료와 항생제를 먹고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공간에서 키워지고, 인공적으로 번식하고, 그리고 마침내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순식간에 부위별로 분류됩니다.

그들은 오직 먹히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삶의 질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옥자>는 동물의 이런 실정을 알려주는 영화였습니다. 이런 진실을 마주했을 때 인간으로서 동물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자는 미란도의 CEO에게 금돼지를 던져주고 옥자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옥자를 데리고 산으로 돌아왔습니다. 도시에서 살코기 취급을 받았던 옥자는 산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미자와 할아버지의 가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이렇게 미자의 옥자 구출기로 끝났지만 동물에 대한 우리 인간의 잔혹성을 문제로 남겨놓았습니다.

인간이 고기를 먹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전에도 집에서 키우던 닭을 잡기도 하고, 마을 잔치가 있을 때는 돼지나 소를 잡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시대는 너무나 많이 고기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1년에 몇 번 특별한 날 고기를 먹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매일 고기를 먹고 있습니다. 그러니 고기에 대한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고기 양은 한정돼 있고, 그러다보니 적은 비용에 높은 생산량을 자랑하는 공장식 축산이 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고기를 먹는 횟수를 줄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그래서 공장식 축산이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방콕여행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길거리에 고양이 밥이 차려져 있는데 그 밥상이 너무나 정성스러웠습니다. 밥그릇이 무려 4개인 곳도 있었습니다. 밥과 물, 그리고 반찬과 디저트까지, 이렇게 정성스럽게 고양이 밥을 챙겨주었습니다. 동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다정한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길거리 고양이나 개들이 사람을 참 편하게 대했습니다. 버스 정류장이든 절이든 가리지 않고 들어와 사람 옆에 누웠습니다.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방콕은 대도시지만 이렇게 동물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갔습니다. 조금 더 바람을 가져 본다면, 세상의 모든 도시가 방콕처럼 동물들도 살기 좋은 곳이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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