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기(別記)》라는 책도 있었겠지만, 여기서는 본문에서 본 것과 다른 기록을 인용한 것이라고 봐도 크게 틀림이 없다. 여하튼 다른 문헌에 따르면 선덕여왕 때 돌탑처럼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

어떤 이는 첨성대가 지상 세계와 천상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였으며, 선덕여왕이 도리천으로 올라가는 상생 통로, 혹은 도리천의 지배자인 제석(帝釋)이 지상 세계로 내려오는 하생 통로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리천에 묻혔다는 이야기는 죽은 후에 만들어진 조작일 가능성이 크고 첨성대는 살아생전에 만들어졌기에 시간적인 차이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한 검토의 여지가 있다. 만약에 후대 사천왕사 건설과 맞물려 있는 것이라면 당시의 국정홍보처에서 첨성대 건을 대충 다루고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대적으로 다뤘다면 선덕왕 지기사사(知幾四事)가 되었을 것이다. 근데 왜 등장한 걸까? 막판에 갑자기 첨성대가 말이다.

첨성대는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다. 신라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건물로 추정한다. 높이는 약 9.5m이다. 국보 제31호로 지정돼 있다. 일월행성의 운행을 관측해 역법을 만들려는 목적과 천문 현상을 관찰해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점성(占星)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그렇다는 증거는 없다. 별을 보려고 했다면 그 자리가 아닌 남산 꼭대기나 낭산, 토함산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인왕동에 만든 것은 첨성대의 의미가 좀 다르다는 것은 아닐까.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축조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첨성대가 <왕력(王曆)> 편에도 등장한다.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이야기 끝에 “능은 점성대(占星臺) 서남에 있다.”라는 기사가 그것이다. 현재 내물왕릉과 첨성대의 위치에 잘 부합되므로 보다 신빙성을 갖게 된 이 기사에서 첨성대는 점성대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별자리 점을 쳤다는 것이 된다.

천문 현상을 관찰하여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일이 점성이다. 이러한 점성은 조선시대 말까지도 계속되었는데, 고대로 올라갈수록 그 비중이 컸던 것 같다. 제사(祭祀)에 동반한 점복(占卜)의 경우 왕의 신성성을 높이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신성한 계림 주변에 단을 쌓아 올리고 왕만 올라가 별자리를 관찰하며 하늘에 뜻을 묻는 제의를 지냈다면 어떨까?

만든 돌의 수나 위치 등이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실상 동남아시아 불교국에 존재하는 여러 불탑들이 첨성대 형태와 상당히 유사한 것도 그런 이유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첨성대 내부가 비어 있는 우물 형태 구조라는 점과 상부의 돌들이 우물 정(井) 자처럼 보여 정자석(井字石)으로 불린다는 점을 근거로 우물 제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생명의 근원, 풍요의 상징인 우물의 상징성도 띄우고 기우제도 지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토착 신앙의 용신(龍神) 사상과 불교의 미륵(彌勒) 신앙이 결합된 복합 종교적 상징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전륜성왕(轉輪聖王: 고대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이상적 제왕)으로서 선덕여왕의 하생을 기원하는 종교적 구조물로 보는 견해도 틀리지 않다. 다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일 따름이다. 고대의 제의에는 한 가지 의미보다는 다양한 성격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굳이 이거다 저거다 한정지어 생각할 이유는 없다. 현대적인 관점의 고대에의 투영인데, 사실 현대 역시 복합적인 이유로 예술적인 상징 건물을 짓고 있음을 간과한 것일 수 있다.

동지 일출 시점이 일 년 중 가장 중요하고 상징적인 ‘여명기(黎明期)’란 사실에 주목해 첨성대가 동지 일출 시에 경주의 천정을 지나는 별빛을 담는다는 상징성을 띄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첨성대란 단어에 들어가는 별 성(星) 자처럼, 별의 별 학설이 다 가능하고 다 맞는 견해일 수 있다. 다만, 선덕여왕이 계림을 거닐다가 거기서 별을 보고 사랑을 나눴다면 어떨까? 성스러운 계림 숲속을 성골인 여왕과 단 둘이 들어가 거닐었다면? 그리고 첨성대에 올라가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밀회를 즐겼다면? 남들에게 체면상 말하기 어려워서 목욕재계하고 올라가서 별점을 봤다고 하면 그만이다. 언젠가 비가 오지 않았을 때는 거기서 기우제도 지냈을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을 운우(雲雨)라고 표현한다. 남녀 간의 밀회(密會)나 정교(情交)를 이르는 말로는 무산지몽(巫山之夢)이라는 고사도 있다. 전국시대 초나라 회왕이 낮잠을 자다가 무산의 여자인 무산선녀(巫山仙女)를 만나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나누고 이별한 꿈 이야기이다. 또한 운우는 하늘의 비구름 별자리이다. 만물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물을 제공하는 별자리이다. 기우제를 위해 밀회를 나눴다고 해도 충분히 문제가 안 된다는 홍보팀을 대동한 선덕여왕. 그녀가 만든 첨성대에 대한 기록을 전한 별기, 즉 특별한 기록이 나오면 진실이 밝혀질 것 같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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