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법이 틀린 <벗고개길> 알림판 또는 보람판 이야기를 했는데, 익은 진서말로 하자면 잘못된 ‘표지판’ 이야기가 되겠다. 그런데 이 표지판이 골칫거리이니, 많은 이들이 ‘표식판’이라고 읽고 쓰는 것이다. 몇 해 전
세계에서도 가장 좋은 공항으로 연달아 뽑혔다는 인천공항에 갔던 적이 있는데, 손짐을 찾기 위하여 일행들이 기다리던 곳에도 ‘표식판’으로 적혀 있고, 어떤 텔레비전 사극에서도 사극영화에서도 그리고 아나운서며 기자들도 ‘표식’이라고 말하며, 많은 글과 책에서도 ‘표식’이라고 쓰고 있다. 무슨무슨 박사며 교수라는 이들도 그렇게 말하며 쓰고 있다. 지어 평양에서 온 소설집 《고발》에도 識(식, 지) 양음이 있음.

‘識’자는 안다는 의미에서 식(알 식)이요, 기록한다는 뜻에서 지(기록 지)이다.
◯ 標識(표지)=목표, 안표
* 標識를 ‘표식’으로 읽는 독자가 허다하다. 국정교과서인 중등국어 (4288.3, 31발행)2~1권 10면에 <……꽃은 봄의 중심이요, 목숨의 표식(標識)이다.>운운의 ‘표식(標識)’이란 용어가 있나니 ‘표식’이 아니요 ‘표지’가 옳은 것은 재언을 요치 않는다.

‘識’자는 기록한다는 뜻에서 ‘지’(기록할지)니, ‘誌’자와 또는 ‘목표가 되는 기(旗)’를 의미하는 ‘幟’자와도 의통(義通)하나니 標識란 양자의(兩字意) 그대로 목표 안표(眼標)를 의미한다. 標識를 ‘표지’로 옳게 읽는 예문으로 경향신문(4289.2.2.)에 “……해병대가 사용하는 것과 동형차였는데 아무런 표지도 없었다”운운.

단기 4289년 10월 1일 초판이 나온 《국어정화교본》이라는 책에 나오는 대문이다. 학술서적 같은 데 보면 자서(自序) 끝에 ‘著者識’이라고 쓰인 경우가 있는데, ‘저자식’이라고 읽는 이른바 먹물들이 많다.

“일제의 질곡에서 해방된 지 어언 10년, 이제 우리는 국권회복과 아울러 우리의 언어를 찾았다 하나 아직도 일제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날이 가고 해가 거듭할수록 우리의 언어질서는 더욱 더 혼란이 가중하고 있으니 뜻있는 자 어찌 통탄치 않을 수 있으랴!
보라!
식자간의 대화중에 혹은 교단에서 직장에서 논설에서 또는 공회석상에서 흔히 보는 애매한 문자와 혼란한 어음, 우리문화의 표상이요 사상의 그릇인 국어의 혼란 실로 형언에 절한 상태에 놓여 있으니 이 어찌 반만년 문화민족의 일대 수치가 아니랴!”

자못 비장한 말투로 걱정하고 있는 <국어연학회>라는 곳이다. 그로부터 어느덧 67년이 지나간 단기 4350년 오늘은 어떠한가? ‘민족의식’이 그래도 조금은 남아 있던 그때는 그래도 ‘요순시절’이었다고 하겠으니-‘민족’이라는 말만 꺼내도 그야말로 덜 떨어진 옛날사람 취급하는 오늘이다. ‘왜말’만 하여도 숨가쁜 판인데, ‘양말’까지 ‘쓰나미’로 덮쳐 오고 있으니, 한마디로 절망적이다.

우리겨레에게는 예로부터 삼독번뇌(三毒煩惱)가 있어왔으니, 한독(漢毒) · 왜독(倭毒) · 양독(洋毒)이 그것이다. 저 리제(麗濟)의 애잡짤한 무너짐부터, 만주와 연해주의 활찌고 마안한 벌판을 잃어버린 다음부터, 한족과 왜족과 양족들에게 갈가리 찢겨지고 짓밟혀서 만신창이로 거덜이 나버린 것이 우리 역사이니, 모두 931회나 쳐들어옴과 억누름에 시달렸던 것이다. 삼국시대와 고리 때는 그만두고 조선왕조 때만 360회가 넘는 외세의 쳐들어옴과 집적거림을 받았다. 어림잡은 것이 아니고 《삼국사기》 《고리사》 《조선왕조실록》에 적혀 있는 것을 꼼꼼하게 살펴본 것이라고 한다. 김달수(金達壽)가 쓴 《태백산맥》에 나온다.(우리가 쓰고 있는 ‘고구려’나 ‘고려’는 ‘고구리’와 ‘고리’가 맞으니, ‘麗’자를 ‘아름다울려’로 읽어서는 안 되고 ‘나라이름리’로 읽어야 하기 때문임.)

그 가운데서도 첫째로 생채기 나서 피를 흘리게 된 것이 문화일 것이다. 모로미 지나온 자취의 밑바탕이 되는 문화. 대컨 문화의 고갱이를 이루는 것이 말인데, 앞서 말한 삼독으로 말미암아 어느 사이 겨레말이 더럽혀져 잡탕밥 꿀꿀이죽이 되어 버린 오늘이다.

말이 살아 있어야 한다. 무릇 천지 정기를 받은 것이 사람이요, 사람 몸을 맡아 다스리는 것이 마음이며, 사람 마음이 밖으로 펴나온 것을 가리켜 말이라고 부른다. 말을 되살리지 않고서는 그 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민족문화가 올바르게 설 수 없고, 민족문화가 올바르게 서지 못하면 참된 뜻에서 민족얼 또는 민족삶은 있을 수 없다.

<국어연학회>에서 부르짖는 말 가운데도 듣기 거북한 것이 있으니, ‘잔재’냐 ‘잔자’냐는 그만두고 ‘애매’라는 말이 그것이다. 아마도 왜말 ‘曖昧’를 따다 모호하다라는 뜻으로 쓴 것 같은데-우리말 ‘애매’는 죄가 없다는 말이 되므로, ‘애매’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흐릿하다, 흐리터분하다, 흐리멍덩하다, 아리송하다, 알쏭달쏭하다, 똑똑하지 않다는 뜻에서 “애매모호하다”는 말을 썼지 그런 뜻에서 ‘애매’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그런데 요즈막에는 모두들 ‘흐릿하다’는 뜻에서 ‘애매’라는 말을 쓰고 있으니, 그야말로 “애매한 두꺼비 돌에 치었다”는 꼴이다. ‘애매’란 아무 까닭없이 벌을 받게 되었거나 남의 원망을 받게 되었을 때 쓰던 말이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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