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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결사와 백련결사 : 지눌과 요세 ③
정혜결사는 지눌의 대사회적 실천 철학
2017년 05월 31일 (수) 14:54:21 이덕진 01081101@hanmail.net

세 번째 전기는 41세(1198년) 되는 해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일어났다. 지눌에 의하면 “마치 어떤 물건과 같은 것이 가슴에 걸리어 마치 원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더니, 지리산에 있을 때에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을 얻었는데, 거기에 ‘선정(禪定)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일상인연에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날마다 일상인연에 응하는 곳이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고 참구해야 한다. 만일 갑자기 눈이 열리면 비로소 그것이 집안일임을 알 것이다.’ 하였다. 나는 거기서 가만히 그 뜻을 깨치게 되어, 저절로 물건과 같은 것이 가슴에 걸리지 않고 원수도 한 자리에 있지 않아 당장에 편하고 즐거워졌다.”1)

지눌은 이때 깨침의 경지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이때까지의 지눌을 크게 발심하여 공부하던 사람이라고 본다면 이때 이후의 지눌은 깨달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지눌을 견성하게 한 직접적인 동기는 《대혜보각선사어록》이었고, 그 방법론적 자각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간화선(看話禪)이었다.

당대의 승려들은 지눌에게 말법시대를 당하여 미타(彌陀)를 염(念)하고 정토(淨土)의 업(業)을 함께 닦자고 권했다. 그렇지만 지눌은 이것을 거부했다. 동시에 그는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아 정법을 구현하고, 선교 간의 불필요한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는 일이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눌은 실천적인 결사운동과 결사운동을 할 장소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수행도량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절집을, 불법의 본분을 다하는 수행도량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는, 개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은둔의 장소를 구하여, 그곳에 하나의 청정하고 모범적인 불교적 도덕세계를 구축하고, 거기에서 법향(法香)이 펴져 나오게 하는 것이, 오히려 세속사회와 불조(佛祖)의 은혜를 되갚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눌의 정혜결사 운동은, 불교 이론의 측면으로 보면 선정과 지혜를 균습하는 오후(悟後)의 수(修)라는 내용적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불교 실천의 측면으로 보면 문란한 승풍의 회복과 본분을 이탈한 출가자를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리고자 하는 결사이며, 이 일을 통해서 시대가 자기에게 부여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고 본 대 사회적 실천철학이다.

지눌은 당대의 반도덕적 상황을 도덕적으로 개혁하기 위해서 먼저 그 자신만이라도 작은 규모의 불교적 도덕공동체(定慧結社)를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지눌이 불교계를 개혁함에 있어서 피상적이 아니라 의식의 대전환을 통해서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1188년(명종 18년), 지눌은 31세 되던 해에 팔공산(八公山) 거조사(居祖寺)에서 본격적인 수선결사(修禪結社)를 시작하였다. 그 2년 뒤에 결사(結社)의 취지를 밝히는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지어 반포하고 도반들의 동참을 촉구하였다.2) 세속에서는 무인(武人)들의 전횡이 계속되어 마침내 1196년(명종 26년)부터 최 씨 장기집권이 시작됐다.

1198년(신종 원년), 지눌은 선객 몇 사람과 함께 바리때 하나만 가지고 지리산을 찾아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숨어 살면서 공부했다. 1200년(신종 3년), 지눌은 43세 되던 해에 정혜결사를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로 옮기면서, 산명(山名)을 조계산(曹溪山), 사명(寺名)을 정혜사(定慧寺)로 고쳤다. 1203년(신종 6년), 지눌이 46세 되던 해에 진각 혜심(眞覺 慧諶, 1178~1234)이 지눌 문하로 입산 출가한다.3) 1205년(희종 1년), 지눌은 48세 되던 해에 송광산 길상사(吉祥寺, 定慧寺)를 왕명에 의해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로 개칭하고 결사를 계속했다.

지눌은 항상 선(禪)을 토대로 하되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함으로써 대부분의 선승(禪僧)들이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미끼로 하여 편파적으로 교학의 교리를 외면하던 것을 적극 지양하였다.

지눌은 수선사에 입문한 사람들로 하여금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경절문(徑截門)의 세 가지 방법으로써 선정과 지혜를 함께 갖추도록 가르쳤고, 불경으로는 《금강경(金剛經)》, 《육조단경(六祖壇經)》과 대혜 종고의 《대혜보각선사어록》 등을 권하면서 읽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수선사를 중심으로 한 선종이 크게 일어났으며, 그 전통은 고려 말기까지 수선사 16국사(國師)를 배출하면서 계속 이어졌다. 특히, 수선사 제4세(世) 혼원(混元)이 최우(崔瑀)가 창건한 강화 선원사(禪源寺)의 주지가 되어 교세를 떨치게 됨에 따라 선원사는 수선사의 별원이 되었으며, 또 수선사의 선풍(禪風)이 국가와 연결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지눌은 1200년(신종 3년) 길상사로 옮긴 뒤 1210년(희종 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1년 동안 선(禪)을 닦는 결사를 이끌어 위로는 왕족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정혜결사에 입사(入社)하는 이가 줄을 이었다. 이때 사방의 승려와 속인들이 풍성을 듣고 모두 모여드는데, 심지어 명예도 벼슬도 처자까지도 버리고는 옷을 물들이고 머리를 깎고 친구에게 권하여 함께 오는 사람도 있었고, 왕공(王公)과 사서(士庶)들로서 수선사에 들어와 이름을 적는 이도 수 백인이 되었다. 조정의 관심도 다대하여 심지어 희종은 왕위에 오르자 칙명으로 송광산의 이름을 고쳐 조계산이라 하고, 길상사(吉祥社)를 수선사(修禪社)로 고친 뒤에 친필로 그 현판을 쓰고, 만수가사(滿繡袈裟) 한 벌을 내리기도 했다.4)

지눌은 그가 누구이든 오는 사람을 막은 적이 없지만, 그 스스로 세속세계에 나아가서 중생들을 교화한 적도 없다. 여기에 지눌의 독특한 점이 보인다. 지눌은 그가 추구한 불교적 도덕세계의 폭을 도량 밖으로 확대한 적이 없다. 그는 개경(開京)을 포함하여 당시의 타락하고 굴절된 세계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 이유는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과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에 여실히 보인다.

마음 닦는 이들이 세상을 피해서 결사할 장소를 구하려 한 것이 1190년(명종 20년), 33세 때의 정혜결사 운동이었다면, 1205년(희종 1년), 48세 되던 해에 수선사에서 승단생활의 청규로서의 <계초심학인문>이라는 생활규범을 교시한 것은 수선사라는 은둔의 장소를 경영하고, 그 곳의 화목과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5) 즉 지눌은 불교적 도덕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청정한 공동체로서 은둔의 장소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지눌은 1210년(희종 6년) 3월 20일에 병을 보이고, 그달 27일에 입적한다. 입적할 때에 “천 가지 만 가지가 다 이 속에 있다.”라는 게송을 남겼다.6) 세속의 나이로는 53세였고 법랍으로는 36세였다. 진각 혜심이 33세의 나이로 지눌의 법을 이어받아 수선사 제2세가 됐다.

주) -----
1) <비명(碑銘)>, 《보조전서(普照全書)》, p.420b. “有物礙膺, 如讐同所, 至居智異, 得大慧普覺禪師語錄云,‘禪不在靜處, 亦不在鬧處, 不在日用應緣處不在思量分別處. 然第一不得捨却靜處鬧處, 日用應緣處, 思量分別處叅. 忽然眼開, 方知皆是屋裡事.’ 予於此契會, 自然物不碍膺讐不同所, 當下安樂耳.”
2) 이종익(李鍾益)은 1190년(명종 20년)을 정혜결사가 시작된 해로 본다. 그러나 최병헌(崔柄憲)은 1188년(명종 18년)부터 정혜결사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종익, 《韓國佛敎の 硏究》, pp.53~54과 최병헌, <지눌(知訥)의 수행과정(修行過程)과 정혜결사(定慧結社)>, 《知訥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 pp.273~274를 각각 참조.
3) 수선사 제2세. 속성은 최(崔) 씨이고, 이름은 식(寔), 자(字)는 영을(永乙), 자호(自號)는 무의자(無衣子), 휘(諱)는 혜심(慧諶). 1178년(명종 8년)에 전라남도 나주(羅州) 화순현(和順縣)에서 출생. 어록을 모은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과 시집인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논문인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 그리고 편찬집(編纂集)인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30권 등이 있음. 자세한 것은 이규보(李奎報), <조계산제이세고단속사주지수선사주증시진각국사비명(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35권, 서울, 명문당영인본(明文堂影印本, 1982), p.375를 참조.
4) <비명>, 《보조전서》, pp.420~421. “上 自潛邸素重其名, 及卽位, 勅改號松廣山, 爲曹溪山, 吉祥寺, 爲修禪社, 御書題榜, 旣又就賜萬繡袈裟一領, 以褒異之, 篤敬光護之誠, 他無等夷.”
5) 허우성, <지눌 윤리사상의 특성과 한계>, 《지눌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 pp.143~146.
6) <비명>, 《보조전서》, p.421. “千種萬般, 摠在這裡.”

이덕진 | 창원문성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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