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봄날은 간다> 포스터.

1. 보편자와 개별자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유지태 분)가 이별을 통보하는 은수(이영애 분)에게 한 말이다. 너무도 유명해서 영화는 몰라도 이 대사는 아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이다. 영화는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와 지방의 라디오 방송국 PD 은수와의 짧고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느린 화면 속에 담아낸다. 두 남녀는 겨울에 만나 봄에 서로 사랑하고 여름에 갈등하다가 마침내 헤어진다. 봄날이 영원할 수 없듯이 사랑도 변한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상우는 사랑은 영원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변치 않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은수는 사랑은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변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혼의 아픔이 있는 은수는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다. 서로 만나 사랑하다가 사랑이 식으면 깨끗이 헤어지길 바란다. 영화 포스터는 사랑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엇갈린 시선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의 사랑이 진짜일까? 혹시 당신은 상우의 사랑이 지고지순하고 은수의 사랑은 저급한 싸구려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나? 그렇다면 사랑에도 등급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혹시 각자 선택의 문제라고 한다면 도대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이란 게 있기는 한 건가?

지금부터 천여 년 전, 유럽에는 보편논쟁(普遍論爭)이 시대적 화두가 되어 있었다. (1) 과연 보편자(Universals)는 실재하는가? 실재한다면 어디에 있는가? (2) 보편자와 개별자(Individuals) 중에 무엇이 우선하는가? 등의 문제가 이 논쟁의 주요 쟁점이었다. 당시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은 보편자가 실재한다고 보는 실재론(實在論)과 이름뿐이라는 유명론(唯名論)으로 나뉘어져 열띤 논쟁을 벌였다. 논쟁은 13세기에 이르기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칫 논쟁에서 패하기라도 하면 이단으로 몰려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도대체 먹고사는 문제하고는 아무 관련도 없을 것 같은 철학적 논쟁에 왜 사람들은 그토록 열을 내었을까?

상우와 은수와 상수와 민희가 있다. 이들은 서로 얼굴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다. 하지만 모두 사람이라는 점에서 똑같다. 보편 실재론자들은 사람이라는 보편이 상우나 은수 같은 개개인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이 보편자는 개별자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사랑에 대해서도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의 이데아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서 진정한 사랑이란 불변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반면에 보편 유명론자들은 사람이라는 보편은 단지 이름뿐이고 실재하는 것은 상우니 은수니 하는 개별자들이라고 한다. 사랑 또한 영원불변의 사랑이란 이름뿐이고, 사랑은 다만 두 사람 사이에서 꽃피었다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실재론과 유명론을 절충한 견해로 보편은 개별자 속에 존재한다는 주장도 있다. 개별적인 사랑 속에 영원한 사랑이 깃들어 있다는 말이겠다.

보편논쟁은 그 용어가 어려울 뿐 핵심은 개별자, 즉 사람으로 말하면 독자적인 개인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고, 교회로 말하면 각 지방으로 나누어져 있는 개별 교회들의 독립성을 인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결국 중세 말의 보편 논쟁은 교회와 교황 중심의 신권 체제에 균열이 생기고, 그 틈새로 개별적 주체, 즉 개인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2. 아벨라르의 철학, 그의 사랑

이런 보편논쟁의 한가운데에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가 있었다. 그는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며, 변증론과 논리학의 대가였고, 수도원장을 역임한 성직자이었다. 그는 프랑스 낭트 근처 팔레 출신으로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그의 스승은 물론 당대의 석학들과 논쟁하며 그들을 하나씩 패배시켰다. 아벨라르의 주된 목표는 주로 보편 실재론자들이었다. 그의 논리(論理)와 변증(辨證) 앞에 실재론자들의 허상은 여지없이 붕괴되었고,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다. 자만이 하늘을 찔렀다.

나는 아주 명백한 논거를 가지고 그(샹포의 기욤)에게, 그가 오래전부터 지녀온 보편 개념의 학설을 수정하게 만들었네. 아니 차라리 그 학설을 무너뜨렸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일세. …… 나는 오만과 방종이란 병을 앓고 있었네. - <나의 불행한 이야기>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를 향한 시기와 질투 또한 강해지고 있음을 느꼈으나, 아벨라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매우 솔직했고 지나치게 논리적이었다. 그는 당대의 석학들을 하나씩 논파해 나갔고, 그때마다 적들도 늘어났다. 그의 탁월한 논변은 세상이 그를 증오하게 만든 이유였다.

그는 30대에 파리 노트르담 성당 부설 학교의 교수가 된다. 그리고 노트르담 성당의 참사회원 퓔베르의 조카딸 엘로이즈를 만난다. 총명한 눈빛에 성숙한 사고력을 가진 17살의 아름다운 처녀는 아벨라르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매혹이었다. 많은 아가씨들의 구애와 귀부인들의 은근한 추파에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아벨라르도 그녀의 매력 앞에서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유일한 여인이었다. 그는 먼저 그녀와 단둘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였다.

우리는 먼저 한 지붕 밑에서 자리를 같이했고, 다음에는 마음으로 함께하였네. 교육을 이유로 사랑을 나누기에 딱 좋은 별실이 제공되었네. 책을 펼쳐 놓고 철학보다는 사랑에 관한 대화가 더 많았고, 설명보다는 입맞춤이 더 빈번했지. 내 손은 책보다도 더 자주 그녀의 가슴으로 갔다네. 우리들의 눈은 글자를 더듬을 때보다 서로 마주볼 때가 더 많았다네.


▲ 에드문트 라이튼(E. Leighton, 1853〜1922), <아벨라르와 그의 제자 엘로이즈>(1882)
의심을 피하기 위해 때로 나는 그녀를 매질했네. 분노의 매가 아니라 사랑의 매, 미움의 매가 아니라 애정의 매였네. 이 매질은 어떤 향료보다도 달콤했다네. 우리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사랑에 탐닉했으며, 사랑이 베풀어줄 수 있는 모든 희열을 맛본 것일세. 그 기쁨들이 새로울수록 우리는 더욱 열정적으로 그 일에 빠져들었고, 끝을 모를 정도로 추구하였네. - <나의 불행한 이야기>

결국 엘로이즈는 임신을 하게 되고 두 사람은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비밀 결혼식은 처녀를 임신시킨 것에 대한 책임과 성직자가 되고자하는 욕망에서 나온 나름의 타협책이었다. 하지만 비밀 결혼을 허락한 퓔베르의 심사는 달랐다. 명예와 야망에 상처를 입은 퓔베르는 아벨라르의 하인을 사주하여 그의 성기를 자른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의 그 복받치는 정열이 얼마나 빈번히 우리의 육체를 추행으로 몰아넣었던가 말이오. 주님의 수난일이며 또 그 밖의 큰 제전 날까지도, 나는 염치도 신에 대한 공경심도 잊은 채, 욕정의 진구렁에서 헤매며 자신을 억제하지 못했던 것이오. 더구나 당신은 그 짓을 원하지 않았으며, 있는 힘을 다하여 반항하였고, 또 나를 타일렀지만, 당신은 여인인지라 힘이 약하였고 또한 나는 때론 위협과 매질로 당신을 순종케 했던 것이오. 나는 순전히 욕망의 불길에 의해서만 당신에게 열중하였던 것이며, 이제 와서는 그 명칭을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울 정도의 가련하고도 불순한 향락 때문에 신과 나 자신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오. 그리하여 하느님은 너그럽게도 내게서 향락의 근원을 완전히 빼앗아가지 않고는 나를 구제할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보신 것 아니었겠소. — <아벨라르가 엘로이즈에게 보낸 편지>

성기를 절단 당한 아벨라르에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 놓여졌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마침내 사제 서품을 받고 수도원장까지 오르지만, 오래지 않아 이단의 학설을 주장하였다는 혐의로 고발되고 만다. 이미 60대의 노인이 되어 아벨라르는 교황에게 탄원하기 위해 로마로 가던 도중에 병을 얻어 클뤼니 수도원에서 요양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엘로이즈는 22년을 더 살며 존경받는 수녀원장으로 죽었다. 그녀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파라클레의 예배당 안에 있는 아벨라르의 무덤 속에 합장되었다.

3. 사랑과 용기, 엘로이즈 이야기

아벨라르와 엘로이즈가 주고받은 편지를 읽다보면 아벨라르의 비겁함과 엘로이즈의 용기가 선명히 대비된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에게 그녀와의 사랑은 음탕한 정욕이며 추악한 쾌락이었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선, 이 비천한 일과의 접촉으로부터, 그리고 저 진흙탕과 같은 관능적인 쾌락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신 것이오. 그렇소, 나의 신체에 가해진 단 한 번의 벌로서, 하느님은 나를 온통 사로잡고 있던 정욕의 모든 불길을 냉각시키셨으며, 나를 음란한 방탕으로부터 건져 내신 것이오. — <아벨라르가 엘로이즈에게 보낸 편지>

이 말이 과연 아벨라르의 진심인지, 아니면 그렇게 말함으로써 엘로이즈로 하여금 수도자의 삶에 더욱 충실하게 하기 위한 배려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아벨라르의 편지는 엘로이즈에게는 비수가 되어 아픈 상처를 찌르는 것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코 아벨라르를 원망하지 않는다.

나는 하느님을 노하시게 하는 일보다 당신을 노하게 할까 더 근심해 왔습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욕망보다도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욕망이 더 컸습니다. 내가 수녀의 옷을 입은 것은 당신의 명령 때문이었지, 성스런 부름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보낸 편지>

그 엄혹했던 시절에 이런 고백이 과연 가능할까? 과연 하느님보다 한 남자가 먼저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사랑의 환희를 솔직히 고백하는 엘로이즈에게선 사랑하는 여인의 강한 용기가 읽힌다.

나는 우리가 함께 맛본 저 사랑의 기쁨이 너무나 달콤하여 그것을 뉘우칠 생각이 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내 기억에서 지워 버릴 수도 없습니다. 어디를 향하든, 그것은 항시 욕망이 되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잠들어 있을 때조차도 그 환상은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가장 순수해야할 미사 중에도 그 환락의 영상은 가엾은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과에 대해서 회한을 품고 있어야할 시기에, 나는 도리어 다시는 범할 수 없는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보낸 편지>

아벨라르가 회한 속에서 징징거릴 때 엘로이즈는 그 시절 사랑의 환희가 그립다고 고백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망임을 알기에 그 그리움이 더 절실한 것이다.

당신은 내가 결혼보다는 사랑을, 그리고 구속보다는 자유를 선택하게 된 이유를 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신께 맹세합니다만, 전 세계를 다스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나에게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하며 청혼하여도, 나는 그의 황후로 불리기보다는 당신의 창부로 불리기를 원합니다. —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보낸 편지>

엘로이즈는 결혼을 반대하였다. 그것은 결혼이 싫어서가 아니라 아벨라르의 미래와 퓔베르의 성정을 고려해서였다. 이 사려심 깊은 여인의 간청을 끝내 물리치고 결혼을 강행한 대가가 자신의 불행의 시작이었음을 아벨라르 또한 고백하고 있다. 엘로이즈는 진실로 아벨라르의 숨겨놓은 애인으로 평생을 보내도 좋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녀는 분명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고자 하였다. 몽매와 엄숙이 지배하던 시절에 비할 데 없는 용기로 사랑과 욕망의 지침을 따랐던 것이다.

4. 나(개인)를 발견하다, 근대(近代, modern)가 밝아오다

근대란 대개 중세 이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이성(理性)의 시대를 가리킨다. 이 시기가 되어 인간이 다시 우주와 세계의 전면에 나서고, 인간이성이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은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한다.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의 전환, 이것이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였다.

중세는 암흑시대가 아니었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세에 대한 넓고 깊은 지식으로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신의 이름으로 인간성이 억압받고, 신앙을 빙자하여 대량 살육이 자행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처구니없는 독선이 지식인의 입을 막고 대중에게 질곡을 씌운 사실도 그대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이전, 즉 전근대(前近代)라는 말에는 미개와 몽매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봄이 올 때가 되면 동토의 얼음 밑에도 강물은 흐르고, 깊은 어둠 속에서도 새벽빛이 어스름 밝아 오는 법이다. 중세 말 보편논쟁은 여명(黎明)을 알리는 신호였다. 보편논쟁에서 어떤 주장이 승리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중세란 이름이 적용되는 한, 유명론이 승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세는 여전히 보편 실재론의 시대였던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논쟁 자체가 개별자, 즉 보편적인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철수와 영희로, 한 여자의 남편, 한 남자의 애인, 혹은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으로 나를, 그리고 너를 보기 시작하였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한 남자, 혹은 한 여자를 향한 사랑의 노래가 불리어지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신을 향한 사랑, 혹은 인간 전체를 향한 사랑이 아닌, 나와 너, 그와 그녀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사랑을 소중하게 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근대의 새벽은 그렇게 밝아왔던 것이다.

※ 이 글에 나오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들은 을유문화사 판, 정봉구 옮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에서 인용한 것으로, 표현을 조금 수정했음을 밝힌다.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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