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제의(犧牲祭儀)란 동물이나 사람을 희생시켜 하늘/신에게 바치는 의식행위. 그 역사는 꽤 오래됐다. 고대 인도의 바라문에서는 양을 희생시켜 속죄를 받으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린 양이나 숫염소를 잡아 신에게 바쳤던 고대 이스라엘, 거대한 종교적 행사로 산 사람의 심장을 꺼내 태양신에게 바쳤던 마야문명. 뿐인가. 우리의 심청전에서도 액막이를 위해 심청을 산채로 용왕에게 받쳤던 장면이 나온다. 희생제의는 자연재해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치러지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나라에 심한 기근이나 전염병이 돌 때 지방에서는 소나 돼지, 닭을 잡고 강신(降神), 헌주(獻酒) 등의 절차를 지냈다. 액막이굿을 할 때면 돼지 머리를 상위에 올려놓고 치성을 드렸다. 역시 일종의 희생제의라 볼 수 있다.

종교인류학자들은 희생제의의 보다 근원적 의미는 사회구성원 간의 갈등을 완화시키려 하는데 큰 목적이 있다고 해석한다. 생존에 위협을 받아 사회적 위기가 팽배해질 때 집단적 폭력이 발생될 여지가 있다. 고대의 폐쇄된 공동체에서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구조적 폭력을 개선하기에는 시스템(능력)의 한계가 있다. 민중이 재해로 인한 커다란 고통을 겪게 될 때 지배 권력층은 존재의 위기감을 크게 느꼈으리라. 이 불행한 사태에 대해, ‘잘못/죄’를 안고, 책임을 질 대상이 있으면,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발상을 능히 했음직하다. “어떤 사람이 아무런 잘못이 없지만, 잘못이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대신 벌을 받아 고통을 당하고 죽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속죄하게 되는데, 그것이 신의 뜻”(이사야서 40~55장)이라는 얘기는 이런 심리를 반증한다. 또 희생제의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희생제물인 동물을 대신 바침으로서, 하늘/신에게 잘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면하려는 함의도 있다.

하지만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던 당시대에 예수나 붓다는 희생제의를 거부했다. 이 역시 폭력의 다른 형태임을 알아서일 것이다. 희생 제물에 대한 폭력은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폭력을, 제물에 대한 폭력으로 대체한 것일 뿐. 인간 책임 의식은 부재한다. 끊임없는 전쟁 역사는 인간이 폭력의 충동을 대부분 폭력을 통해서만 해소시켰다는 것을 말한다. 희생제의는 내부의 폭력적 충동을 단지 ‘가짜로 승화’시키려 했던 행태 인 것이다.

오늘날 공식적 성격의 희생제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르네 지라르가 지적했듯이 폐쇄사회에서나 가능했던 희생제의 대신에, 현대사회는 사법제도가 생겨 폭력에 대한 매우 효과적인 치유책이 되었다. 실상 정치권력이란 것도 사법제도를 통한 ‘폭력’의 합법화된 구조다. 법치주의의 옹호도 일차적으로 사회적 폭력을 통제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시대에도 변형된 행태로 희생제의가 세계 곳곳에서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 사그라지지 않는 테러리즘. 그 의식의 바탕에도 사실 반복되는 희생제의의 메커니즘이 작동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렇다. 민주노총 등이 주동이 된 시위 사태에서 종종 희생제의가 치러지고 있음이 목도된다.

그 누군가의 억울한 또는 억울해진 사망으로 말미암아, 집단의 초법적 폭력을 정당화시키려 하는 일. 예컨대 세월호 사태에 대한 지난 3년간의 ‘연장된 애도 반응’을 생각해보라. 이는 실로 매우 비이성적인 반응이었다. 그 사태는 매우 끔찍하고 불행한 일이었다. 허나 여기에 기대어 일부 세력들은 비루한 정치적 희생제의로 산화를 시키고 있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 문재인은 한 방명록에서, “미안하다. (헌데 희생자들에게) 고맙다” 라는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일부 정치인들이 여태까지 달고 다니는 노란 리본은 마치 ‘훈장’처럼 빛난다. 슬픔에 지나치게 오래 끌려 다니다 보면, 본래의 정서는 어색하게 퇴보하게 된다. 순수성은 바래지고 타인의 눈에 자못 저항감마저 안겨줄 수 있다.

참된 종교인이라면, 희생제의에 부화뇌동해선 안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희생제의는 불행한 사태를 그 누구/집단에게 ‘모두’ 뒤집어씌우려는 폭력의 미묘한 왜곡형태임을 드러내고 있다. 희생제의란 사태에서 자신을 제외시킨, 그리하여 자신만은 무죄라는, 책임 회피적 태도도 깔려있음이요, 대중심리를 조작하는 ‘초법적이며 주술적인’ 기만적 행위임도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시인 · 블레스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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