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백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추대…존호 ‘성조황고’ 올려
진평왕, 왕비 마야부인으로 개명 여왕 계승 명분 쌓아
 

덕만(德萬)이라고도 하는 제27대 덕만(德曼)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다. 성은 김 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선덕여왕은 신라의 제27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32~646년이다.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선덕왕은 신라 최초로 여자로서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이 없으면 조카가 즉위하면 된다. 하지만 대왕을 칭할 정도로 열등감이 강했던 진평왕은 어렵게 얻은 왕위를 남 같은 조카들에게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장녀에게 왕위를 물러준다.

선덕여왕의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진평왕의 왕비인데, 성은 같은 김 씨로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이다. 진평왕은 마야부인에 이어 승만부인(僧滿夫人) 손 씨를 후비로 두었으나, 왕통을 이을 왕자를 얻지 못하였다.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던 것은 사실 일 수 있다. 그런데 왜 아들을 가지고 싶어 했을까? 아들이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조카들에게 왕위를 내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마야부인도 승만부인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럼 다른 부인을 가지면 되지 않을까? 근데 신라는 골품제 사회이다. 성골 부인이 없으면 그 자녀도 성골이 될 수 없었다.

여하튼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선덕여왕을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여제라는 뜻으로 황고를 올렸으니 성조란 성골의 뜻이 포함되어 있을 듯하다. 그런데 정말 화백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선덕여왕을 추대했을까? 그것도 진평왕이 죽고 나서 그랬을까? 진평왕이 죽기 직전에 화백회의를 통과시키고 사후에 회의 보고서를 올린 것은 아닐까?

당시 신라 구조를 보면 모든 성골들이 여왕의 즉위를 달가워했을 것 같지는 않다. 온갖 당근을 제시하고 채찍도 들이대며 귀족들을 협박하고 회유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국민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아니 ‘여왕 계승’의 대의명분을 찾고 나아가 대대적인 홍보를 위해서 선덕여왕의 출생담부터 고쳤을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가 마야부인의 이름이 아닌가 싶다.

전륜성왕 신앙에 따라 진흥왕은 동륜과 금륜이란 이름을 태자와 왕자에게 지어줬다. 그리고 동륜태자의 아들인 진평왕은 그의 부인에게 ‘마야부인’의 이름을 선사한 것은 아닐까? 마야부인의 원래 이름은 아버지 복승갈문왕의 ‘복’자를 딴 복힐구(福肹口)였다. 왕비의 이름이 마야가 된 것은 역시 신라 불교를 통치이념으로까지 채용한 때문은 아닐까? 인도의 카스트제도에서의 석가족과 같이 성골을 만들어 골품제를 만든 것은 아닐까?

불교신도라면 누구도 아는 바와 같이, 마야는 석가족 호족(豪族)의 딸로서 가비라바소도〔伽毘羅衛〕의 성주(城主) 정반왕(淨飯王)의 왕비가 되어 석가를 낳았다. 전설에 따르면, 석가는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부인에게 흰 코끼리로 현몽하여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내로 들어갔다고 한다. 출산하기 위해 친정으로 가던 중, 룸비니라는 동산에 이르러 무우수(無憂樹)에 오른팔을 뻗어 나뭇가지를 잡는 순간, 석가가 오른쪽 겨드랑이 밑을 뚫고 탄생하였다고 한다. 마야부인은 석가 출산 후 7일 만에 타계했다고 전한다. 그 마야부인이 환생한 것이 복힐구라면 그의 아들 같은 큰 딸 선덕여왕은 누가 될까?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존재로 받들어졌다면 그녀에게 ‘성조황고’란 칭호는 그리 과분한 것이 아닌 게 된다. 부처님과 같은 존재가 된 선덕여왕은 당연히 불교를 신봉하는 신라 사람들에게는 ‘관세음보살’에 버금갈 것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런 복힐구의 딸이 왕위에 오르겠다는데 감히 반대할 사람이 있었을까? 천사옥대 무대를 성공적으로 흥행시킨 진평왕의 지혜는 이렇게 놀라웠다. 그리고 그런 지혜는 그 딸 선덕여왕에게도 그래도 유전된 듯하다. 왜냐하면 짜맞춘 듯이 딱딱 떨어지는 ‘지기삼사’의 해프닝이 그것을 증명한다.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에 즉위하였다. 나라 다스리기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 있었다.

선덕여왕은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乙祭)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해 백성들을 진휼(賑恤)했다. 다음해인 633년에는 주(州)·군(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해 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芬皇寺),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645년에는 아버지가 만든 신라 2보에 이어 신라 3보의 마지막인 황룡사 구층목탑(皇龍寺 九層木塔)을 건립하였다. 그녀가 이렇게 사찰을 많이 건립한 이유는 무엇이었을지 말하면 관객 모독이 될까봐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