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장육존상과 구층 목탑, 진평왕 천사옥대
신라 제일 사찰 황룡사 과거불 가섭불의 주석처
 

‘천주사석제’ 건도 잘 처리한 진평왕을 이제 신라에서는 함부로 무시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게 들통이 나면 어떻게 할까 걱정이 돼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천사옥대 뮤지컬을 좀 더 키우기로 한다. 전 세계로 해외공연을 가는 것을 기획하기로 한다. 천사옥대만으로 설치기에는 부족함을 느낀 진평왕은 누구도 함부로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 진평왕의 위업을 떠올린다. ‘아 그렇다!’라고 탄식을 낼만한 업적이 1개 더 있었다.

진평왕은 어려서 할아버지 슬하에서 귀여움을 받고 자랐는지 효심이 깊다. 그래서 할아버지 진흥왕의 장육상도 신라 삼보로삼고 자신의 천사옥대도 신라 삼보로 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가족들과 먼저 상의한 후 ‘진지왕’을 폐위시킨 국인이라고 하는 무서운 신하들과도 의논한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의 영수들을 대하는 정조처럼 진평왕도 무척 땀을 뻘뻘 흘렀을까? 잘 모르겠다. 여하튼 계획을 세운 진평왕은 할아버지가 세운 궁 앞의 황룡사로 나간다.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황룡사는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과거 7불이 주석했다는 경주 일원의 일곱 사찰의 유적지) 중 하나이다. 규모나 사격(寺格)에서 신라 제일의 사찰이다. 553년(진흥왕 14)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를 불사(佛寺)로 고쳐 황룡사라 하고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 말이 절이지 왕의 별궁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여하튼 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는 이 절을 가섭불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았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법당인 황룡사 금당 안에는 장륙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 제자상, 2구의 신장상(神將像)이 있었다. 서천축(西天竺)의 아쇼카왕(阿育王)이 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분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쇼카왕은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고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륙존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발원하였으며, 1불과 2보살의 모형까지 같이 실어 보냈다는 설화가 전한다. 이 금과 철을 서울인 경주로 실어 와서 574년(진흥왕 35) 3월에 장륙상을 주조하였는데,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이 1만 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은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336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이 남아 있다. 몽고가 우리에게 참으로 몹쓸 짓을 많이도 했다.

여하튼 진흥왕의 황룡사 장육불과 함께 자신의 천사옥대를 신라 2보로 정한 진평왕의 딸 선덕여왕도 참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신라 선덕왕(善德王) 12년(643)에 짓기 시작하여 선덕왕 14년(645)에 완성된 구층탑을 마지막으로 신라 3보 시리즈를 마친다. 다섯 개나 일곱 개를 만들지 않아도 될 정도로 신라의 왕권은 선덕여왕 이후 안정된 듯싶다.

후에 고구려왕이 신라 정벌을 도모하면서 말하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범할 수 없다고 하는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자, (신하가 말하기를) “황룡사(皇龍寺)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이 그 첫째요, 그 절의 구층탑이 둘째이며,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그 셋째입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계획을 그치었다.

진흥왕-동륜태자-진평왕-선덕여왕으로 이어지는 4대 간에 만들어진 신라 3보의 핵심은 역시 구층탑이다. 그런데 거기에 장육존상과 천사옥대를 넣은 것은 역시 선덕여왕이고, 천사옥대까지는 믿지 않았던 고구려 왕도 ‘구층탑’에는 조금 찔끔했나 보다. 여하튼 효심이 깊은 증손녀 때문에 졸지에 위대한 진흥왕도 신라3보의 주인공으로 역사상에 길이 남게 되었다.

“구름 밖의 하늘이 준 옥대를 두르니 임금의 곤룡포에 아름답게 어울리네. 우리 임금의 옥체 이제부터 더욱 위중해지니 다음에는 쇠로써 섬돌을 만들어야 마땅하네.”라고 찬(讚)했다.

《삼국유사》에 몇 개 안되는 ‘찬’이 있는데 박수쳐야 할 때 치는 그런 내용으로 가득하다. 저자가 정말 이 설화를 믿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신라3보 설화를 읽은 사람에게는 믿게 하고 싶었나 보다. 여하튼 구름 위의 하늘에 계신 상제가 준 옥대를 두른 곤룡포를 포함하여 진평왕의 패션 감각도 칭찬한다. 돌계단 세 개를 부러뜨릴 정도의 위신력과 신성성을 가진 진평대왕의 행차에 성해날 돌이 없을 듯하니 섬돌을 쇠로 만들어야 한다는 아부성 높은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근데 너무 오버했다. 북한의 김정은도 이 정도의 말을 들으면 소름이 돋았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런 제안은 실패했다. 왜냐하면 이미 섬돌에 본드를 잔뜩 발라서 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섬돌이 쇠로 바뀌지 않게 되어 오히려 행복한 사람이 한 명 있다. 사서에 이름을 남기진 않았지만 존재했다는 정황이 있는 실직을 면한 경비병을 벌써 잊진 않았으면 좋겠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