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대사 때 천사옥대 반드시 착용 신성성 권위 과시
제사권은 왕의 고유 권한…궁궐에 제석천 신궁 마련
 

참석한 사람들에게 모두 보안각서를 쓰게 하고, 예술 총감독으로 도화랑을 임명해 연출하고 마무리한 뮤지컬 ‘천사옥대’가 성공리에 끝났다. 그 결과 상제가 옥대를 줬다는 기록이 여기저기 저잣거리에 낱장광고와 함께 나돌았다. 멋모르는 백성들은 모두 백정왕이 얼마나 쪼잔한 인간인지 모르고 그냥 사는 게 귀찮아서 진평대왕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백정왕은 엄청 성이 안찼나보다. 여하튼 열등감이 있는 인간을 왕으로 앉혀놓으면 어떻게 할 수가 없나보다. 그래서 성이 안차서 다른 스토리도 만들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신라 삼보 중 두 번째인 천사옥대가 매우 길었다는 것은 역시 진평왕이 매우 컸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은 아닐까. 정말 키도 크고 몸도 크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곰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제 곰은 머리가 좋지만 곰 같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혜롭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요즘 잘 보면 곰처럼 생겼는데 하는 짓은 ‘여우’같은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니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을 듯하다. 여하튼 진평왕은 교묘대사(郊廟大祀) 때 천사옥대를 반드시 착용함으로써 왕의 신성성(神聖性)과 권위를 돋보이고자 하였다.

진평왕은 이름도 하얗고 깨끗하다는 의미의 백정이라고 할 정도로 무슨 편집증이나 결벽증이 있는 듯하다. 처염상정(處染常淨)한 연꽃이며, 연꽃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구루 린포체의 아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참으로 작은 일도 안 놓치고 다 챙겼다. 아마도 삼촌 진지왕이 즉위 4년 만에 국인(國人)에 의해 폐위된 것이 평생 후유증으로 남았나 보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려고 신성성을 강조하고 몸이 크다는 것을 내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잘 먹혀서 왕권도 강화되고, 53년이라는 장기간의 집권을 가능하게 하였다.

왕이 창건한 내제석궁(內帝釋宮)이라고도 하고 천주사(天柱寺)라고도 하는 곳으로 행차하였다.

당시의 제사권은 왕의 고유한 권한이었다. 하늘과 통하는 제사장의 역할이기에 왕의 신성성을 상징한다. 궁궐 안에 제석궁을 마련하였다. 제석천왕을 모시는 신궁이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제석천이 하늘의 기둥이니 천주사라고 했을 수 있다. 천주사 안에 제석궁이 있었을 수도 있다. 궐 안에 있었던 제석(帝釋)을 모신 불당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못 가 봤으니 할 말은 없다. 다만, 천사옥대를 준 상제와 무관한 곳은 아닐 듯하다.

일본에 가면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신을 모신 신사나 신궁이 많다. 그곳에 가면 절도 함께 있거나, 절 안에 신사가 있거나, 신사 안에 절이 있기도 하다. 모두 신라의 천주사나 내제석궁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예가 하나여서 말하기는 그렇지만 이런 안목으로 찾아보면 더 많은 사료가 있을 수도 있겠다.

돌계단〔石梯〕을 밟으니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의 사람들에게 일러 “이 돌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어, 후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성안에 있는 다섯 개의 부동석(不動石) 중 하나이다.

궁 안의 천주사 돌계단 정도야 정말 쉬운 일이다. 키도 크고 허리둘레도 넓은데 힘도 세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찾은 게 정말 손 안대고도 코 풀 수 있는 쉬운 방법이었다. 뮤지컬 ‘천사옥대’를 하느라 국고를 탕진했는지 여하튼 저비용의 가성비 높은 연출을 한다. 바람잡이와 야바위꾼 한두 명 정도면 가능한 ‘천주사 석제’ 즉 ‘돌계단’ 편을 앵콜송이나 ‘에필로그’ 같은 후속편으로 간단하게 찍는다. 살짝 밟아도 금이 가게 만들면 되는 저비용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석재의 특성상 영구적인 재활용이 가능하니 옮기지 말라고 하는 쩨쩨함도 여전히 보여준다. 그리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색칠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야광색으로.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나 보다. 신라 역사상 다섯 번이나 있었는지, 아니면 이 진평왕 대에 다섯 번이나 일어났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돌이 다섯 개나 경주에 왕성 안에 있었다고 한다. 내용을 잘 보면 아무래도 진평대왕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 여하튼 그 덕택인지 진평왕은 53년간 장기집권을 이루고 만다.

부동석이란 움직일 수 없거나 움직여서는 안 되는 돌을 의미한다. 결국 그 뜻은 맘만 먹으면 백성들도 쉽게 움직일 수 있는 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힘이 장사거나 한두 명이 힘을 합치면 옮길 수 있는 것이 돌계단이다. 그러니 그걸 움직이지 않게 하려면 돌계단에 본드를 붙이거나 못을 박아서라도 꼼짝 못하게 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도 안심이 안 되니 옮기지 말라는 명령을 담은 게시판도 만들고 지키는 경비병도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천주사 석제는 궁궐 안에 있으니 별 문제가 없겠지만, 다른 성안의 다섯 개 부동석은 문제가 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걸 53년 동안 지켜야 했던 경비병은 조선시대 한명회가 했다는 능참봉보다도 더 좋은 보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람에게 갤럭시 폰을 주고 게임을 시켰다면 아마 챔피언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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