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일대기를 그린 한승원의 장편소설 《사람의 맨발》(불광출판사)은 에필로그와 프롤로그가 곽시쌍부(槨示雙趺)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사라쌍수하(沙羅雙樹下) 곽시쌍부(槨示雙趺)는 석가모니가 마하 가섭 존자에게 전한 삼처전심(三處傳心) 중 마지막이다. 내용인즉슨, 세존께서 사라쌍수에 계시어 열반에 드신 지 7일 만에 가섭 존자가 이르렀고, 가섭 존자가 관을 세 바퀴 도니 세존께서 관에서 두 발을 내어 보이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곽시쌍부의 의미는 무엇일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테지만, 한승원 작가는 그 의미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맨발’에서 찾고 있다. 소설의 주제라고 봐도 무방한 일부 내용을 인용해보겠다.

“관의 한쪽 면이 터지면서, 싯다르타의 두 맨발이 나란히 나온 그 사건이 말해주는 심오한 뜻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맨발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있는 카샤파만이 알고 있었다.

싯다르타의 두 발은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떠난 출가자의 슬픈 표상이었다. 평생 대중 교화를 위해, 온 세상의 험난한 길을 밟고 다닌 맨발이었다. 발가락과 발톱들은 돌부리에 차이고 삐죽한 자갈과 가시에 찔리고 긁히는 상처를 입었다가 아물고, 또 상처를 입었다가 아물기를 거듭한 까닭으로 곳곳에 암갈색 옹이들이 박히었고, 짐승의 낡은 가죽을 덮어씌운 것처럼 두껍고 너덜너덜 보풀이 일어나 있었다.

왕자인 싯다르타는 궁중에서 출가를 하기 전, 물소 가죽으로 만들어 금장식 은장식을 한 신을 신고 살았었다. 신은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고, 삐죽한 돌부리와 가시들과 독충을 막아주는 것이었다. 출가를 하여 삭발을 하면서 그 신을 버리고 맨발이 된 것이었다. 고행 끝에 부처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 슈도다나 왕은 아들인 싯다르타의 맨발이 안타깝고 짠하고 민망하여 가죽신을 신기려고 들었고, 마가다 왕국의 빔비사라 왕은 싯다르타의 발에 금장식이 된 신을 신기려고 들었지만, 싯다르타는 정중히 사양을 하고, 그 가죽신 살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었다.

이후 여든 살이 넘어 열반에 들 때까지 만천하의 인민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치기 위하여 내내 험한 길을 걸어 다닌 그 맨발을, 싯다르타는 지금 수제자 카샤파에게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아, 이것은, 죽는 날까지 영원히 이 맨발의 뜻을 잊지 말라는 당부이다.”


출가자의 슬픈 표상인 ‘맨발’은 모든 욕망을 내려놓은 끝에 얻은 깨달음의 산물인 것이다. 한승원은 〈작가의 말〉에서 “나는 성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고, 출가에 맞추어 이 소설을 썼다”고 밝혔는데, 실제로 이 소설은 싯다르타가 출가하기까지 이야기가 전체 분량의 3분의 2가량을 차지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맨발》은 한 나라의 태자인 싯다르타가 금장식 은장식을 한 신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뜨거운 사막을 걸어가는 데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사람의 맨발》에서 주목할 것은 싯다르타가 출가 전 당시 사회에 퍼져 있던 다르마(Dharma, 法)와 싯다르타가 출가 후 몸소 체득한 다르마의 대비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장에서 싯다르타의 스승 비슈바미트라는 인생의 네 가지 목표에 대해 설명한다. 인생의 네 가지 목표는 아르타(Arhta), 카마(Kama), 다르마(Dharma), 모크샤(Moksha)이다. 간단히 말해, 아르타는 소유욕, 카마는 애욕, 다르마는 종교적 혹은 도덕적 의무, 모크샤는 영적인 해탈을 일컫는다. 이중 다르마에 대해 비슈바미트라가 설명하는 대목을 인용해보자.

“신이 내려준 네 계급 ……숭엄하게 사제로서의 성직을 수행하는 브라만, 나라를 다스리는 왕족과 귀족인 크샤트리아, 상인과 농업인인 바이샤, 노예로서 상전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수드라들은 창조주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들이 해야 할 구실이 있습니다.”

싯다르타에게 베다를 가르치는 스승인 비슈바미트라는 다르마가 성스러운 율법이라고 강조한다.

발터 벤야민은 논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에서 법에는 ‘법보존적 폭력’과 ‘법정립적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고 역설했다. 말 그대로 법보존적 폭력은 법을 보존하기 위해 행사되는 폭력이고, 법정립적 폭력은 법을 개혁하기 위해 행사되는 폭력이다. 법은 법이라는 이유 때문에 법이 제정되는 순간 법을 보존해야 하는 의무와 함께 법을 개혁해야 하는 의무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베다의 다르마는 ‘신의 뜻’이라는 미명 아래 행사되는 전형적인 법보존적 폭력에 해당한다. 그것을 잘 알기에 싯다르타는 금장식 은장식을 한 신을 신은 채 말을 탄 전륜성왕의 길이 아닌 맨발로 사막을 걸으며 전법교화를 하는 부처의 길을 택하는 것이다.

《사람의 맨발》에는 경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여 작가가 창작한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이 눈에 띈다. 특히, 싯다르타가 불가촉천민의 마을을 개간(開墾)하여 7년 만에 명주도시를 만드는 대목이나, 이 명주도시를 장인인 다리나 재정대신이 딸들의 명의를 내세워 차지하는 대목이나, 이 일로 싯다르타가 다리나 재정대신의 세력에 의해 연금을 당하는 대목은 소설의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한다. 개혁을 실천하려는 주인공의 의지를 지배세력이 방해한다는 점에서 《사람의 맨발》은 작가의 전작 《원효》(김영사)와 유사하다. 붓다와 원효는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수행자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런 까닭에 작가는 두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을 쓰려면 어쩔 수 없이 역사소설에 중점을 둘 것인지, 아니면 구도소설에 중점을 둘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한승원의 《사람의 맨발》과 《원효》는 구도소설보다는 역사소설에 비중이 실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리나 재정대신의 세력에 의해 연금당하면서 싯다르타는 전륜성왕의 길을 걸어서는 계급의식을 타파할 수 없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절대고독에 휩싸인 싯다르타가 출가의 원력을 세우게 된 것은 늙은 망고나무 아래서 결가부좌를 한 채 명상을 하고 있는 사문을 보고서이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나무를 닮아간다는 것 아닐까. 땅에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를 통해 기운을 받은 몸통과 머리로 하늘을 떠받치고 사는 저 나무의 의젓하고 성스러운 삶이 부처의 모습 아닐까.” 하는 생각 끝에 싯다르타는 스승 비슈바미트라가 말한 만다라를 떠올린다.

“만다라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그라미, 말하자면 핵이 오른쪽으로 돌면서 부챗살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데, 그 힘을 가장자리의 동그란 테가 눌러주고 있는 수레바퀴 같은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고 돕니다. 우리들의 삶의 결과 무늬는 오른쪽으로 돌도록 마련되어 있습니다. 세속적인 세상은 한 전륜성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굴러가는 것이고, 초월적인 세상은 부처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굴러가는 것인데, 그것은 신의 뜻입니다. 해와 달이 동편에서 떠서 서편으로 지고, 별들이 휘도는 것이 다 만다라의 원리입니다.”

만다라의 원리를 떠올리고 나서 싯다르타는 사고의 전환을 꾀할 수 있었다. 싯다르타의 눈에 비친 자연은 “지렁이를 물총새가 쪼아 먹고, 그 물총새를 매가 낚아채가는” 농경제전에서 보았던 약육강식의 광경이 아니라 “새들은 가지들 속에 동그란 둥지를 틀고, 멀리 날아가 먹이를 물고 와서 새끼들을 키우고, 새끼들은 자라서 떠나갔다가 다시 둥지로 돌아오고, 나무는 땅속에 뻗은 뿌리로 물기를 빨아올려 마시고, 그것을 가지와 잎사귀를 통해 하늘 쪽으로 뿜으며 숨을 쉬고, 그 습한 숨결은 구름이 되어 떠돌다가 비를 뿌리고, 그 비를 수목들이 빨아먹고 살고, 대지 위의 수목들이 빨아 먹고 남은 빗물은 강물이 되어 바다로 가고, 바다의 물은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구름은 다시 대지 위로 날아와 비를 뿌려주는” 상생과 순환의 광경이 되는 것이다. 하여, 싯다르타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정할 수 있게 된다. 그 길은 부처가 되어 세상 모든 사람의 탐욕을 없애주는 것이다.

흔히 싯다르타가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계기를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고 보고 있다. 사문유관은 싯다르타가 가비라성(迦毗羅城)의 밖으로 놀러 나갔다가 동문 밖에서는 노인을, 남문 밖에서는 병든 사람을, 서문 밖에서는 죽은 사람을, 북문 밖에서는 승려를 만남으로써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인생의 괴로움을 몸소 경험한 뒤 출가를 결심했던 것을 일컫는다. 그런 까닭에 계급사회를 타파하기 위해 출가했다는 작가의 설정이 일부 독자에게는 다소 작위적이거나 낯설게 느껴지는 게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삶과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연기사상이라는 관계론을 주목한 것을 봤을 때 작가의 설정은 제법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출가하면서 싯다르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금장식 은장식을 한 신을 벗어던지고 맨발이 된 것이다. 싯다르타는 고행주의자인 마하 바르가바와 선정주의자인 마하 우드라카 라마푸트라에게 찾아가 깨달음을 구하지만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지는 못한다. 마하 바르가바의 고행은 천상의 세계에서 태어나 영원히 성스럽고 화려한 삶을 살기 위한 데 목적이 있었다. 싯다르타가 그토록 경계했던 ‘신의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마하 우드라카의 선정은 “생각 자체를 떠나서 생각도 생각 아님도 아닌 그윽하고 고고한 지상(至上)의 경지”이긴 했으나, 이 역시 자기 혼자서만 세상의 고통을 초월하고 그 경지를 즐기는 것이어서 일종의 개인적인 쾌락주의라고 할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돼 있지는 않지만 마하 우드라카의 선정은 비슈바미트라가 싯다르타에게 가르친 모크샤의 내용과도 다르지 않다. 비슈바미트라에 따르면 “모크샤라는 네 번째 목표도 다르마라는 준엄한 법칙으로 인해 차갑고 딱딱해진 인성을 부드럽고 깨끗하게 풀어주기 위해 신이 만든 것”이다. 선정삼매에 빠져 안락하게 삶을 영위하는 것이 싯다르타에게는 중생들을 외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중생제도를 위한 자신의 출가 본뜻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출가를 결심하면서 느낀 만다라의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만사가 인연 따라 생멸한다는 것, 태어난 자리에는 죽음이 있고, 죽음의 자리에는 반드시 태어남이 있다는 것을 동녘 하늘에 떠서 반짝거리는 샛별을 보면서 깨닫게 된다. 깨달은 뒤 붓다는 전법교화의 길을 나선다. 그중 목갈라나와 사리푸트라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장면은 인상 깊다. 가죽신 한 켤레를 갖고 와서 내미는 목갈라나와 사리푸트라에게 붓다는 아래와 같이 설한다.

“출가자에게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가죽으로 만든 신이오. 이 땅을 맨발로 밟고 다닌다는 것은 중생들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과 괴로움과 아픔을 함께 나눈다는 것이오. 그대들이 신겨주려고 하는 이 신은 한 고귀한 생명을 도살하고 그것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오. 나는 그 생명체의 가죽을 발바닥에 붙이고 다닐 수 없소.”

한승원의 《사람의 맨발》을 읽고 나면 인도의 신 비슈누가 떠오른다. 인도인들은 비슈누가 붓다로 화현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비슈누의 화신 중 하나인 바마나는 발리라는 악마의 왕을 굴복시켰다. 난쟁이인 바마나가 세 걸음을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자 발리는 난쟁이가 얼마나 걷겠는가 싶어 이를 허락했다. 발리는 첫 번째 걸음에 세상의 끝에, 두 번째 걸음에 우주의 끝에 닿았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발걸음이 떨어진 곳은 발리의 머리였다.

싯다르타의 무기는 칼과 창이 아니라 맨발과 진리였다. 그런 까닭에 싯다르타의 전법교화의 길은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감으로써 가장 높은 곳에 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싯다르타의 작디작은 맨발과 바마나의 크디큰 맨발이 다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실, 맨발은 자연에, 신발은 문명(文明)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자연의 구성원들은 인간 말고는 모두 맨발이다. 문명의 이기(利己)를 경험하지 못한 존재들은 온몸으로 자연을 견뎌야 한다. 맨발의 사람에게는 인생의 시간이 참으로 더디게 흐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비바람과 불, 산과 바다, 식물과 동물마저도 두려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보행(步行)은 인류의 특징적인 행동이다. 걸을 수 있기에 인류는 양손으로 도구를 만들 수 있었다. 인간은 신과 동물의 중간자적 존재이다. 손이 신의 영역에 가까운 것이라면 발은 동물의 영역에 가깝다. 인류는 신발을 신으면서 문명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아스팔트 도로가 깔렸고 그 도로 위로 차들이 질주했다. 차의 속력을 올리듯 인류는 문명의 발전 속도를 높였다. 모든 게 신속해졌다. 하지만 문명의 가속도가 붙으면서 인류는 자연이라는 본향(本鄕)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맨발은 신발을 신지 않은 발이다. 문명이 아닌 자연의 발이고, 인위적이지 않은 무위(無爲)의 발인 것이다. 삶을 수행으로 비유한다면, 그 수행의 기록은 맨발의 발바닥에 새겨진 무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응오 | 소설가, 전 주간불교 편집장 arche442@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