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 潙仰宗)

원주 앙산의 혜적통지(慧寂通智)선사는 소주 회화 섭(葉)씨의 아들이다. 아홉 살 때 광주 화안사(和安寺)의 통선사(通禪師)를 따라 출가했다. 그런데 그가 14세 되던 해 부모가 환속을 권유하여 결혼시키려 했다. 그때 그는 부모의 말씀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그 자리에서 무명지와 새끼손가락 두 개를 잘라 부모 앞에 내밀곤 말했다. “절대 환속은 불가합니다. 출가하여 정법을 닦아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이 저의 간곡한 뜻입니다.”하였다. 이에 부모는 할 수없이 그의 출가를 더 이상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그는 구족계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행각에 나섰다. 먼저 혜충국사의 법사 탐원의 응진선사(應眞禪師)에게서 현지(玄旨)를 깨닫고 뒤에 위산(潙山)의 영우선사(靈祐禪師)를 뵙고 그 법을 이었다. 
 
 97개의 원상 건네자
 한 번 보고 모두 불태워

선사가 탐원에게 갔을 때의 일이다. 탐원이 “선사 혜충국사가 육조선사의 원상(圓相)아흔 일곱 개를 모두 받아 나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 죽은 뒤 30년이 지나면 남방에서 한 사미가 와 법을 크게 일으키리라. 그러므로 이 원상을 전수해 끊어지지 않게 하라’ 이르시었다. 지금 내 곁에 온 그대에게 주고자 한다.”하곤 97개의 원상을 혜적에게 주었다. 혜적은 이것을 한 번 본 뒤 나중에 불 속에 던져 태워버렸다. 뒷날 탐원이 전수한 바 있는 원상을 소중히 간직하라고 다시 한 번 주의를 환기시키자 혜적은 불태워 버렸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탐원은 크게 놀라면서 혜적을 책망했다. 그러나 혜적은 “저는 이미 그 뜻을 십분 알았기 때문에 불태워버렸고 언제든 다시 그려낼 수 있습니다.”하곤 제상(諸相)을 모두 그려 바쳤다. 탐원은 이런 혜적에게 또 한번 경탄했다.
혜적이 위산영우선사를 친견할 때의 일이다. 위산은 처음 그를 상견하는 혜적에게 물었다.

위산: 그대는 주인이 있는 사미인가, 주인이 없는 사미인가?
혜적: 주인이 있습니다.
위산: 주인이 어디 있느냐?
위산은 거듭 물었다. 이에 혜적은 아무 말도 없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서 멈추어 섰다. 위산이 이 모습을 보고 예사로운 사미가 아님을 눈치 챘다. 어느 날 혜적은 위산선사를 보고 “어디가 참된 부처님이 계신 곳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위산은 “생각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참으로 묘하여 끝없이 타오르는 신령한 불꽃을 돌이켜 생각한다. 생각이 다 하여 본래대로 돌아와 성품과 형상이 같이 있고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면 참 부처니 그와 같은 것이리라.”하였다. 이 한 마디로 혜적은 깨달았다. 이로부터 위산화상을 모시기를 15년. 오랜 세월이 계속되었다. 그 뒤 강능에 가서 수계하여 율장을 깊이 탐구했다. 또 암두선사를 상견한 일도 있었다.

▲ 삽화=강병호 화백

스님에겐 하나의 기서(奇瑞 이상하고 상서로운 징조)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한 범승(梵僧)이 찾아왔다.
혜적: 어디서 오셨습니까?
범승: 서천 인도에서 일부러 왔습니다.
혜적: 언제 그곳을 출발하셨습니까?
범승: 오늘 아침에 출발하였습니다.
혜적: 대단히 늦었군요.
범승: 중도에서 산수구경하느라고 조금 늦었습니다.
혜적: 신통유희는 없지 않지만 사리불법은 모름지기 저에게 돌려줘야 하겠습니다.
범승: 동쪽 땅에 와서 문수보살을 만나자고 했더니 작은 석가 부처님을 뵙게 됐습니다.
범승은 이렇게 찬탄한 후 패다엽(貝多葉 종이가 없었던 시절에 패다라수나무 잎사귀에 경사한 것, 즉 경전이란 뜻)을 꺼내어 혜적에게 건네 준 후 구름을 타고 하늘을 힘차게 날아갔다. 이후부터 혜적선사를 ‘소석가(小釋迦)’라 부르게 되었다.
혜적이 동평에 살고 있을 때 스승 위산선사가 사승 편에 경서와 거울을 보내왔다. 스님은 상당해서 이 두 가지 물건을 보이며 말했다.
“이것은 위산선사의 거울인가, 아니면 동평(스님 자신)의 거울인가? 만약 이것이 동평의 거울이라 말한다면 위산스님으로부터 보내 온 것이며 또 이것이 위산스님의 거울이라면 지금 내 동평의 손 안에 있다. 이것을 말할 수 있다면 그냥 두고, 말하지 않는다면 이를 깨뜨려 버리겠다.”
대중 가운데 누구 한사람도 말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스님은 결국 그 거울을 깨어버리고 내려오셨다.
탐원선사로부터 원상을 전수받은 바 있는 혜적스님은 이후 원상을 통해 사람을 제접하는 경우가 많았다. 스님이 쓰는 원상에는 손으로 공중에 그리는 우선(右旋)원상, 좌선(左旋)원상이 있는가 하면 중원상(重圓相)도 있었다. 또 원상 가운데는 ‘불(佛)’ ‘사(師)’ ‘수(水)’등 글씨를 넣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당 건부 6년에 원주의 대앙산(大仰山)으로 옮겨 주석했다. 뒤에 강서의 태평산 관음원에 있었고 양 정명 2년엔 또 다시 소주의 태평산으로 옮겨 그 해 시적하였다. 입적을 앞두고 스님은 시봉 들던 몇 명의 제자를 앞에 두고 게를 남겼다.

일이이삼자 평목복앙시 一二二三子 平目復仰視
양구이설무 즉시오종지 兩口二舌無 卽是吾宗旨
반듯한 눈 다시 쳐들고 살핀다.
두입 한결같이 혀 없는 것이 바로 나의 종지이다.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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