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의 이야기는 오이디푸스 신화의 변형이다. 김병수의 아버지 살해 장면은 대단히 외설적이면서도 정치구도적이다. 김병수는 “고향에서는 사내가 쌀가마를 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아버지라도 손을 못 댔다.”(31쪽)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폭행을 당하지 않는 상황임에도 김병수는 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김병수가 아버지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술만 마시면 어머니와 누이를 두들겨 팼기 때문이다. 엄동설한에도 어머니와 누이의 옷을 모두 벗겨 내쫓는 아버지의 모습은 ‘외설적 아버지’, 즉, ‘오브제 프티 아(object little a)’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김병수는 어머니와 누이를 위해서 아버지를 죽인 것처럼 비춰진다. 하지만 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상황에서 경쟁관계인 아버지를 제거했다는 것은 김병수가 집안의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는 부친 살해의 신탁을 피하느라 코린토스로 떠난다. 그런데 외려 코린토스에서 유폐된 기간으로 말미암아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상간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병수가 자신은 오이디푸스와는 다르다고 완강하게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김병수는 “나는 처음부터 내가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을, 죽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후에 잊은 적도 없다.”는 말을 두 차례나 한다. 김병수가 처음으로 그 말을 하는 것은 아버지를 살해했던 것을 회고할 때(29쪽)이고, 다음으로 그 말을 하는 것은 오이디푸스와 자신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할 때(129쪽)이다.

오이디푸스가 거울을 보면 내 모습이 거기 있을 것이다. 닮았지만 좌우가 뒤집혀 있다. 그는 나와 같은 살인자였지만 자기가 죽인 사람이 아버지인지도 몰랐고 나중엔 그 행위마저도 잊어버렸다. 그러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각하면서 자멸한다. 나는 처음부터 내가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을, 죽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후에 잊은 적도 없다. 나머지 살인들은 첫 살인의 후렴구였다. 손에 피를 묻힐 때마다 첫 살인의 그림자를 의식했다. 그러나 인생의 종막에 나는 내가 저지른 모든 악행을 잊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를 용서할 필요도, 능력도 없는 자가 된다. 절름발이 오이디푸스는 늙어서 비로소 깨달은 인간, 성숙한 인간이 되지만 나는 어린아이가 된다. 아무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유령으로 남으리라.
오이디푸스는 무지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파멸로 진행했다. 나는 정확히 그 반대다. 파멸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무지로, 순수한 무지의 상태로 이행할 것이다.
(129쪽)

그러나 김병수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의 삶 역시 오이디푸스와 마찬가지로 “무지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파멸로 진행”된다. 김병수는 과거에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어머니와 누이를 구했듯, 가까운 미래에 박주태를 살해함으로써 딸 은희를 구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김병수는 오이디푸스에 대해 평가하면서 “어머니와 동침한 것은 수치요, 아버지를 죽인 것은 죄책감이었겠지.”(128쪽)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자신에 대해서는 “나는 수치는 느끼지만 죄책감은 없다.”(105쪽)라고 평가한다. 이 대목에서 작가가 왜 김병수 인생의 세 번째 시기, 즉, ‘살인 없이 살아온 평온한 삶’을 만들었는지 명확해진다. 자기 유폐의 지난한 시간 속에서 김병수가 딸인 은희를 살해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결국 김병수는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배신당함으로써 자신이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수치심을 맛본다.

김병수는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98쪽) 더군다나 치매에 걸린 까닭에 김병수는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와 같다. 점차 시간이 빨라지고 숨이 가빠지는, 벽이 좁혀지는 감옥 안에서 김병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미래 기억’밖에 없다. 미래 기억은 앞으로 할 일을 기억한다는 뜻이다. “치매 환자가 가장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그것”(93쪽)이기 때문이다.

김병수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 순으로 순차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단절된 기억 속에서 가까운 과거와 미래는 사라지고 아득히 먼 과거만 남게 된 것이다. 김병수가 기억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근대(近代)라고 부르는 참으로 가깝고도 먼 시공간적 좌표에 있다.

김병수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는 늘 악몽을 꿨다. 잠꼬대도 심했다. 죽는 순간에도 아마 나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31쪽)이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살아남았다는 전쟁은 정황상 6·25전쟁이다. “올해로 일흔”이라는 말에서 김병수가 1940년대 중반에 태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병수는 ‘전근대-근대-탈근대’라는 격동의 역사를 한 몸에 겪어야 했던 세대이다.

그런데 그는 근대화 과정에서 다른 동년배 사람들과 달리 도시로 이주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한 세상이 좋다. 도시에서는 살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소리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 너무 많은 표지판, 간판,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표정들. 나는 그것들을 해석할 수가 없다. 무섭다. (94쪽)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이행은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도시로의 대이동에 김병수는 동참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표정을 읽을 줄 몰랐던 까닭에 남이 찡그릴 때 찡그렸고 남이 웃을 때 웃어야 했던 김병수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그리고 그 도시가 만들어내는 풍경들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병수가 농경문화에 맞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다.

내 고향 앞길은 벚꽃이 좋았다. 일제시대에 심은 그 벚나무 터널 아래로 봄이면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면 나는 부러 그 길을 에돌아 다녔다. 꽃을 오래 보고 있으면 무서웠다. 사나운 개는 작대로 쫓지만 꽃은 그럴 수가 없다. 꽃은 맹렬하고 적나라하다. 그 벚꽃길, 자꾸 생각난다.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그저 꽃인 것을. (86쪽)

김병수가 두려워했던 것은 도시만이 아니다. 맹렬하고 적나라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모든 존재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은 감정을 솔직히 드러낼 수도 없고, 타인의 감정을 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김병수는 산업화 과정에서도 그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지 못하고 주변인의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선사시대에 속한 인간인데 엉뚱한 세상에 떨어져, 거기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39쪽)고 푸념한다. 그 근거로 선사시대 인류의 유골을 조사해보면 태반이 살해당한 것임을 제시한다.

그러나 김병수가 바라보는 근대의 과정은 ‘두개골에 구멍이 뚫려 있거나 뼈가 예리한 것으로 잘려’서 살해당해야 하는 선사시대보다도 더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다.

4·19와 5·16을 겪었다. 박정희가 시월유신을 선포하고 종신독재를 꿈꿨다. 육영수가 총에 맞아죽었다. 지미 카터가 와서 박정희더러 독재 좀 그만하라고 하고는 팬티만 입고 조깅을 했다. 박정희도 암살당했다.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김영삼은 국회에서 제명됐다. 계엄군이 광주를 포위하고 사람들을 때려죽이고 총으로 쏴 죽였다.
그러나 나는 오직 살인만 생각했다. 이 세상과 혼자만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죽이고, 달아나서, 숨었다. 다시 죽이고, 달아나서, 숨었다. 그때는 DNA 검사도, 폐쇄회로 TV도 없던 시절이었다. 연쇄살인이라는 용어도 생경했다. 수십 명의 거동수상자와 정신병자가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몇몇은 허위 자백까지 했다. 경찰서들끼리는 서로 협조를 하지 않아 다른 지역에서 사건이 벌어지면 별개의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경찰 수천 명이 작대기를 들고 애먼 야산만 쑤시고 다녔다. 그게 수사였다.
(32~33쪽)

위 문장은 두 단락으로 나눠져 있다. 앞 문장은 4·19혁명, 5·16쿠데타, 10월 유신,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광주민주화항쟁 순으로 전개된 질곡의 한국 근대사를 김병수 특유의 시니컬한 어투로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뒤 문장은 그 질곡의 현대사 내내 김병수 자신은 죽이고, 달아나서, 숨길 거듭했으나 경찰은 도시문명을 지킬 능력이 없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경찰(Police)의 어원은 도시(Polis)다. “내가 경찰력 안에 들어와 문명인이 됐다.”라는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경찰력은 도시문명을 지킴으로써 법치주의를 집행하는 데 존재 가치가 있다.

작가가 위 문장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한국의 근대사에서 국가의 파시즘은 연쇄살인범의 행위만큼이나 야만적이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또한 연쇄살인범의 소행을 북한의 무장간첩의 소행으로 치부해버리는 시대상을 통해서 제도에 의한 이데올로기의 폭력이 개인에 의해 자행되는 유희의 폭력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

사람들이 공산당이라는 유령을 잡으러 다닐 때, 나는 나만의 사냥을 계속했다. 내가 1976년에 죽인 한 남자는 무장간첩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공식 발표됐다.
“범인은 피해자를 잔인하게 살해한 후 바로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 범행의 잔인함으로 미루어볼 때 북괴의 소행임이 분명하다.”
유령에 의한 죽음이었으니 범인은 잡을 필요도 없었다.
(90쪽)

사람들이 모인 공설운동장에서 연사들이 나와 목청이 터지도록 “붉은 돼지 김일성을 찢어 죽이자”, “공산당을 물리치자”고 외쳐대고, 동원된 깡패가 “공산당 개새끼들을, 이 이 개새끼들을, 지구상에서 박멸하자”고 외치면서 품안에서 칼을 꺼내들어 주저 없이 새끼손가락을 자르고, 깡패가 쓴 ‘멸공’이라는 혈서를 두 여자가 맞들어 높이 쳐들고, 그에 맞춰 군가 ‘멸공의 횃불’이 군악대의 연주로 공설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모습은 폭력적이다 못해 공포감을 유발한다. 주목할 것은 작가는 연쇄살인범의 이야기임에도 연쇄살인에 대한 묘사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반면 근대사의 파시즘적 징후에 대해서는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작가가 전작 장편소설인 《빛의 제국》에서 지적한 “‘수령’과 ‘당’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국가’와 ‘민족’만 넣으면 되었다.”(188~189쪽)는 이 땅의 근대 민족주의의 폐해가 민낯을 드러낸다.

작가는 김병수라는 인물이 근대화의 공포가 만들어낸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의 투영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스핑크스가 “아침에는 네 발로, 낮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오이디푸스는 “인간”이라고 답했다. 베르낭(Jean-Pierre Vernant)이 잘 간파했듯이 오이디푸스의 대답은 정답이면서 오답이다. 오이디푸스가 말한 ‘인간’은 특정한 한 인물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인간은 네 발로 기다가 두 발로 걷다가 나중에는 지팡이를 짚고 걷는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처럼 세 세대의 삶을 한 번에 살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 상간함으로써 아버지가 되었고, 어머니와의 사이에 자식을 낳음으로써 자식들과는 형제가 되었다. 네 발로 기는 자식인 동시에 두 발로 걷는 자기 자신인 동시에 지팡이를 짚으며 걷는 부모가 된 사람. 김병수는 한국 근대사가 만들어낸 오이디푸스이다. 김병수는 전근대, 근대, 탈근대라는 세 시대를 한 번에 경험한 사람이고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아버지가 되고, 딸을 죽임으로써 딸이 된 사람이다. 게다가 김병수는 오이디푸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도정일이 《20세기의 오이디푸스》에서 주목했듯이 “삼종 혼합인간 오이디푸스는 결국 인간의 얼굴, 새의 날개, 사자의 몸통을 한 몸에 가진 삼종 혼합 괴물 스핑크스인 것”처럼 삼종 혼합인간 김병수는 결국 삼종혼합괴물인 한국 근대사의 표상인 것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작가의 현대문학상 당선작인 〈당신의 나무〉와 가장 유사하면서도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정부분 주제의식에서 불교사상에 빚을 지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동일하다. 하지만 부정에서 긍정으로 이행하는 〈당신의 나무〉와 반대로 《살인자의 기억법》은 긍정에서 부정으로 이행한다. 여기서 긍정과 부정의 대상이 되는 가치관은 관계론이다. 〈당신의 나무〉는 ‘당신’이라는 2인칭의 화자가 ‘한때 새의 깃털쯤에 묻어온 씨앗에서 발아되었을, 하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 근원을 어림할 수 없을 웅대한 생명체 앞’에서 ‘나무와 부처처럼 서로를 서서히 깨뜨리면서, 서로를 지탱하면서’ 사는 상생의 삶을 깨달음으로써 개인 화자 당신에서 이 세상의 모든 당신으로 관계성을 확대해가는 로드로망이다. 〈당신의 나무〉의 주요한 화소(畫素)인 나비효과도 이 세상의 모든 관계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중중무진법계연기(重重無盡法界)’의 법칙에 의해 이뤄졌다는 화엄(華嚴) 사상을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나(김병수)’라는 화자가 끝내 왜곡된 기억의 심연에 스스로를 은폐시킴으로써 모든 관계를 차단하는 파국적 결말을 맞는다.

오디세우스는 끝까지 망각과 싸우며 귀환을 도모했다. 왜냐하면 현재에만 머무른다는 것은 짐승의 삶으로 추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모두 잃는다면 더는 인간이랄 수가 없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상의 접점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증 치매 환자와 짐승이 뭐가 다를까. 다른 것이 없다. 먹고 싸고 웃고 울고, 그러다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어떻게? 미래를 기억함으로써, 과거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117쪽)

김병수는 자신을 오이디푸스가 아닌 오디세우스와 동일시하고 있다. 미래를 기억함으로써 과거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수십 명을 살해한 과거는 잊어도 좋지만, 그러나 미래, 즉, ‘박주태를 죽여야 한다.’는 계획만큼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병수는 “오디세우스에게는 애타게 기다리는 아내가 있었다. 내 어두운 과거 속에서 나를 기다리는 이는 누구인가?”(118쪽)라고 자문한다.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uroboros)처럼 이 소설의 수미쌍관을 이루고 있는 《반야심경》 구절은 중관학(中觀學), 즉 공(空) 사상의 요체이다. 여기서 공(空)은 그냥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유무(有無)의 경계를 여의고 중도(中道)의 이치를 직관한 것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 생존의 필수 구성요소인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처(六處),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등 십이연기(十二緣起)가 모두 공(空)함을 깨닫는 것이다.

십이연기 사상이 주는 교훈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관계성에서 비롯되므로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병수가 마지막에 읊조리는 《반야심경》은 어떤 깨달음의 구경에 닿는 게 아니라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소설에 인용된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는 《금강경》 구절은 육조 혜능이 불가와 인연을 맺게 된 구절로 유명하다. 이 구절의 사전적 의미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킬지니라.’이지만, ‘나의 마음이 불토(佛土)를 구성하는 육경(六境)에 머물러서는 아니 된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하지만 대숲 밭에 묻어놓은 시체들이 삶의 유일한 장엄(莊嚴)이었던 김병수에게는 이 구절이 ‘아무도 이길 수 없는 시간’, 그 영겁회귀의 주문에 지나지 않다. “미지근한 물속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공(空)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148~149쪽)라는 마지막 문장은 김병수가 꿈꿨던 구원의 이미지, 징벌방에 대한 환상과 일치한다.

관을 연상시키는 좁은 방에 갇혀 뒷수갑이 채워진 채 혀로 식기를 핥아먹는 장면을 거듭 떠올리곤 했다. 나는 처절하게 짓밟힌 채 탈진하여 내가 떠나온 세계, 흙의 세계를 극도로 갈망하며 발버둥을 치게 될 것이다. <중략> 내가 아무나 죽여 파묻을 수 없는 곳, 감히 그런 상상조차 하지 못할 곳, 내 육체와 정신이 철저하게 파괴될 곳. 내 자아를 영원히 상실하게 될 곳. (87쪽)

그렇게 김병수의 기억은 까마득한 심연으로 떨어져 한 점 티끌이 된다. 두 눈이 멀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오이디푸스처럼,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공간에서 김병수는 “나머지 노래는 내세에서 들으리.”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지금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세가 있다 한들 그게 어떻게 나일 수 있으랴.”(28쪽)

유응오 | 소설가, 전 주간불교 편집장, arche44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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