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의 성품을 불성이라 한다. 중생들은 이 불성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하여 흔히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 불성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면 좀 더 착하게 살 것이고 부처가 되기 위해 더 열심히 보살도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성이 있는 줄을 어떻게 아는가. 《열반경》에서는 두 가지 불성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형체를 가지고 있는 불성이요, 둘째는 형체가 없는 불성이다. 형체를 가지고 있는 불성이란 부처님과 보살을 말하고, 형체가 없는 불성이란 중생이라 한다. 부처님은 불성이 그대로 발현된 결과이니 당연히 불성을 가지고 있는 줄 알 수 있고, 보살은 불도를 이루기 위해 서원을 세우고 보살도를 닦기 때문에 장차 부처가 될 것이므로, 불성이 있는 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중생들은 어떠한가. 중생들은 감각에 의해 파악되어야 만 있다는 것을 확정한다. 곧 불성이 있다는 것은 불성이라는 형체[色]가 눈으로 보여지고 만져져야만 있다고 아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중생들이라면 불성의 형체가 보이지 않고 보살과 같이 장차 부처가 될지도 알 수 없다. 경에서는 이런 중생의 불성은 들어서 볼 수 있다고 한다. 곧 중생들은 형체로 볼 수 없는 불성을 가지고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거나 선지식의 가르침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중생들이 불성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불성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경에서는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고, 그렇다고 잃어버리거나 부서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중생들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중생에게 불성이 있는 것은 비유하기를, 금강역사가 가지고 있는 불성은 소에게서 짜낸 우유 속에 타락(酪蘇: 우유를 처음 발효하여 나오는 즙)이 있는 것과 같고, 부처님의 불성은 우유에서 청정한 제호가 된 것과 같다고 한다. 타락이나 제호라는 불성은 안에도 밖에도 있는 것이 아니다. 곧 우유 자체에 타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유 속에 제호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유에서 타락이 나오고 우유에서 제호가 나오듯이, 중생에게서 부처가 되므로 불성이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불성이 드러나는 것은 제각기 시절이 있다는 것이다. 우유 상태일 때는 그 자체에서 타락도 제호도 찾을 수 없다. 우유의 안에도 밖에도 타락과 제호가 없듯이 중생의 안과 밖 어디에도 불성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은붙이를 녹이고 두드려서 은기구를 만들어내면 은장이라 부르고, 쇠붙이 녹이고 두드려 농기구를 만들어내면 대장장이라고 하듯이 중생이 팔정도를 닦고 육바라밀을 닦으면 불성이 보인다. 불성이 나타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정인(正因)과 연인(緣因)이 있다. 보통 정인은 바로 부처가 드러나는 불성을 말하고, 연인은 시절인연에 의해 불성이 드러나는 경우이다. 어떤 사람이 선근을 지으면 이 선근에서 불성이 나오는 것과 같다. 《열반경》에서는 정인이란 우유에서 바로 타락이 생기는 것과 같고, 연인이란 효모나 따뜻한 온기와 같아서 우유에서 타락이 나오게 해준다고 한다. 우유에서 타락이 나오고 제호가 나오므로 우리는 우유에 타락과 제호의 성품이 있다고 하듯이 중생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한다. 이 불성은 정인과 연인이 시절이 맞아서 불성이 나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타락을 구하는데 우유와 뿔〔角〕이 있다면 어느 것을 취하겠는가. 물론 모두에서 타락을 구할 수도 있다. 우유에서는 타락이 직접 나오고, 뿔에서는 우유를 부어 타락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우유를 고를 것이다. 중생들도 마찬가지여서 각기 다른 사대(四大)로 된 몸을 가지고 있다. 이 사대가 온갖 색법의 인연이 되므로 천차만별의 중생이 있고 불성의 발현에도 각기 차이가 있다. 중생은 이와 같이 각각 다른 형체(色)를 가지고 있어서 정인불성과 연인불성의 두 가지 불성이 있다. 정인불성은 일체의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진여 불성이고, 연인불성은 진여를 일으키는 인연이 되는 육바라밀 등의 수행을 말한다. 우리가 처음에는 불성이 있는지 보이지 않지만 육바라밀을 열심히 닦아가노라면 어느새 불성이 있는지 알게 되고, 보살도를 닦아 부처가 되면 마침내 불과를 얻게 된다.

그렇다면 불성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가 기다란 칼을 가로로 세워 놓고 얼굴을 비추면 길게 얼굴이 보이고, 가로로 놓고 보면 넓게 얼굴이 보인다. 이 얼굴이 다른 이의 얼굴이라면 자기와 다른 얼굴이 비출 것이요, 자신의 얼굴이라면 자기의 얼굴로 인하여 비춘 것이다. 불성도 이와 같다. 자신이 행해온 갖가지 업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형체의 얼굴이 거울에 비추어지듯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불성이 있다. 또한 그 불성은 자신이 전도심에서 보는지, 산란심에서 보는지, 선정에서 보는지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보인다. 우리가 불성을 인지하는 것은 우리 눈의 광명이 쫓아가서 칼 속의 얼굴을 보기 때문에 칼 속의 얼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눈의 빛이 쫓아가서 비로소 알게 된다면 불을 바라볼 때는 우리의 눈의 광명이 불에 닿게 되니 곧 타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수정 속에 있는 물건이나 물속에 있는 고기를 볼 수 있고, 담박에 있는 물건을 볼 수 없다. 결국 눈의 광명이 저곳에 이르러 알게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불성도 이와 같아서 우리의 눈의 지각으로 그것의 있고 없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성은 이미 원인 속에 들어 있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우유를 살 때 우유에 타락의 성품이 있다고 하여 타락의 값을 더하여 우유를 사지는 않는다. 또한 어떤 사람이 아내를 맞았는데, 회임하였다. 아기가 여자 아이일 것이라고 하였는데, 낳고 보니 그와 같았다. 그렇다고 하여 그 아내가 여자아이를 낳을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옳지 않다. 다음에 회임하여 남자아이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유가 그 빛깔이 아침 점심 저녁 등 때에 따라 다르고, 담아 두는 그릇에 따라 다르고, 맛도 시간에 따라 다르고, 온도와 효소에 따라 결과도 다르니 우리의 불성도 마찬가지이다. 《열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게송하고 있다.

“본래는 없으나 지금은 있으며,
본래는 있으나 지금은 없으니
이 세상 앞 세상 지나간 세상에
있다는 모든 법 옳은 곳 없나니”(이운허 역)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lkiw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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