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 법문만 읽다 보면 독자들이 지루하게 느낄 듯하여 이번에는 경허 스님의 성공(性空) 경계를 잘 보여주는 시 한 수를 소개할까 한다. 당(唐)나라 방 거사(龐居士)는 견성을 두고 “이는 부처 뽑는 과거장이니 마음이 공하면 급제하여 돌아간다[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라 했거니와 기실 선(禪)은 심공(心空), 성공(性空)의 도리를 깨닫는 것 밖에 다른 특별하고 이상한 그 무엇일 수 없다. 선문답(禪問答), 선어(禪語), 선게(禪偈) 등이 가리켜 보이려는 것도 바로 이 성공(性空)의 경계일 수밖에 없는데, 다만 성공을 드러내 보이는 방법이 저마다 다를 뿐이다.

경허 스님은 음주 식육을 하는 까닭을 묻는 화엄사 진응(震應) 스님의 물음에 자신은 성공을 보고 있어 걸림이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고인의 공안과 게송을 되새겨 선리(禪理)를 제창하기보다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성공의 경계를 곧바로 보여주는 것이 경허 스님 선(禪)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그래서 경허 스님의 시에는 목전의 사물에서 성공(性空) 경계를 보고 읊은 작품들이 많다. 산, 물, 새 울음, 구름, 꽃 등 자연 경관을 읊은 시들은 대다수 그러하다.

우음(偶吟)이란 제목의 오언절구(五言絶句)이다.

당처에 허공이 무너지고 當處殞虛空
공화가 비로소 봉오리를 맺누나 空花方結實
이 또한 봄빛임을 아노니 知此亦春光
그윽한 향기가 내 방에 불어온다 幽香吹我室

허공에 아른거리는 허공꽃, 즉 공화(空花)를 읊은 시이다. 허공과 꽃이 본래 둘이 아니지만, 우리가 허공이라 파악하는 허공은 성공(性空)의 경계에 비하면 둔탁한 장벽과 같다. 이 장벽이 무너지고 그 무너진 자리에 공화, 즉 허공꽃이 피는 것이다. 공화이지만 봄날에 피는 꽃과 둘이 아니라서 경허 스님은 그윽한 향기를 느낀다. 당처에서 허공의 장벽이 무너지고 공화가 피고 있다고 한 것은 문학적 수사나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경허 스님이 목전에서 보고 느끼는 실제 경계를 표현한 것이다.

허공에 핀 공화는 허공을 의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처에 피어있으며, 땅에 핀 꽃은 땅을 의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처에 피어 있다. 또한 세존이 견성할 때 본 샛별은 하늘에서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당처에서 빛나고 있었다. 세상에 어떠한 사물도 당처(當處)를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어느 곳을 가든 당처가 아님이 없는 것이다.

당(唐)나라 방 거사가 약산(藥山)에 머물다 떠날 때 약산 유엄 선사(惟儼禪師)가 선객들을 시켜 산문 밖까지 배웅하게 하였다. 방 거사가 공중에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좋은 눈 송이송이 딴 곳에 떨어지지 않는구나.”
이 때 한 선객이 물었다.
“어느 곳에 떨어집니까?”
그러자 방 거사가 한 대 때렸다. 그 선객이 말하였다.
“거사는 거칠게 굴지 마시오.”
방 거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그러고도 선객이라 불리는가? 염라대왕이 그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은 만해(卍海) 스님이 설악산 오세암에서 읊었다는 오도송이다.

남아는 가는 곳마다 고향인 것을 男兒到處是故鄕
몇 사람이나 오래도록 나그네 시름 겪었던고 幾人長在客愁中
한 소리 할로 삼천세계를 타파하니 一聲喝破三千界
눈 속의 복사꽃이 조각조각 날더라 雪裏桃花片片飛

이 오도송을 만공 스님에게 보냈다. 만공 스님이 “날아가는 놈은 어느 곳에 떨어지는가?”라고 반문하니, 만해 스님이 “거북 털이요 토끼 뿔이로다.”라고 회답하였다.

만공 스님이 법문할 때 이 일을 들어서 “눈 속에서 조각조각 나는 복사꽃이 어느 곳에 떨어졌는가?”라고 물으니, 비구니 법희(法喜) 스님이 “눈이 녹으니 한 조각 땅[一片地]입니다.”라 대답하였다. 한 조각 땅은 바로 당처를 가리켜 말한 것이니, 정답이다. 만해 스님의 답은 맞지 않다. 그래서 만공 스님이 마지막 구(句)에서 날 ‘飛’ 자를 붉을 ‘紅’ 자로 바꾸어 “눈 속의 복사꽃이 조각조각 붉더라[雪裏桃花片片紅].”로 고쳤다고 한다.

만공 스님이 하루는 선객들과 마루에 앉아 있는데 새 한 마리가 처마에서 날아갔다. 만공 스님이 “저 새가 하루에 몇 리를 날아가는고?”라고 물으니, 보월(寶月) 스님이 “촌보(寸步)도 처마를 여의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하였다.

허공을 나는 눈송이와 새 뿐만 아니라 현상계의 어느 것도 당처를 벗어날 수 없다. 당처에서 보면, 나는 일찍이 한 걸음도 그 자리를 떠난 적이 없다. 당처에서 모든 사물을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비유하면, 우리가 기차를 타고 갈 때 자신이 기차를 타고 가는 줄 아는 놈은 누구인가. 만약 자신이 참으로 기차와 함께 움직인다면 움직이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주위 풍경과 평형을 유지하여 이동한다면 이동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본래의 자기는 결코 당처를 떠난 적이 없기에 자기 몸과 기차가 움직여 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니, 거울이 경대를 떠나 움직이지 않기에 움직이는 사물을 비추어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실은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기차가 내 안에서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한 번도 당처를 벗어난 적이 없는 구래부동여여불(舊來不動如如佛)이건만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사물을 따라 다니며 사물과 자기를 동일시(同一視)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를 한 마디로 ‘미기축물(迷己逐物)’, 즉 자기를 망각하고 사물을 좇는 것이라 하였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캄캄한 밤중에도 마음 놓고 침대에 몸을 던지는 것은 침대가 그 자리에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자신의 몸도 침대도 당처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마음의 근저에서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마음 놓고 침대에 몸을 던져 그토록 애착하던 목전의 현상계를 조금도 미련 없이 버리고 죽음과도 같이 깊은 수면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깊은 잠 속에서도 자신은 당처를 벗어나 딴 데로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당장에 보고 듣는 현상계를 꽉 움켜쥐고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꽃은 당처에 피어 있고 눈송이는 당처에 흩날리고 있다. ‘눈송이가 어느 곳이 떨어지느냐’고 물은 선객은 선방에서 먹은 밥값을 내놓아야 하니 호되게 맞아야 한다. 복사꽃이 떨어지는 것을 두고 ‘거북 털 토끼 뿔’이라고 답한 만해 스님도 엉뚱한 망상을 피워 동문서답을 했으니, 방망이를 맞아야 마땅하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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