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불교경전 내용은 세 번 인용된다.

소설의 세 번째 단락에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킬지니라.”(4쪽)라는 《금강경》 구절이 인용되고, 여덟 번째 단락에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11~12쪽)라는 《반야심경》의 구절이 인용되고 있다.

소설 서두에 수수께끼 같은 불교경전 내용을 두 차례 인용한 뒤 소설 끝 두 번째 단락(148쪽)에서 동일한 《반야심경》의 구절을 다시 싣고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반야심경》의 구절로 수미쌍관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소설 전반에 걸쳐 불교경전이 인용되거나, 소설에 승려나 불교신자가 등장하거나, 불교적인 제재를 다루고 있지 않는데도, 책의 해설을 쓴 권희철 평론가는 <웃을 수 없는 농담, 사드-붓다의 악몽>에서 불교 사상에 입각해 소설을 평하는데 상당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이 소설은 이미 제목에 함유돼 있듯, 한 연쇄살인범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려서 점차 기억을 상실해 가는 과정의 이야기다. 작가는 왜 이런 흉포(凶暴)한 작품의 앞뒤에 불교경전 내용을 인용한 것일까?

이 소설의 화자는 ‘김병수, 올해로 일흔’(27쪽) 살이 된 남자이다. 의사는 그의 뇌를 찍은 MRI 사진을 가리키면서 알츠하이머가 분명하다고 진단하면서 “최근 기억부터 없어질 것”(13쪽)이라고 말한다. 김병수는 “뭐든지 기록하고 그 기록을 몸에 지니라.”는 의사의 충고를 충실히 따르지만, 김병수가 보기에 자신이 기록한 “개개의 메모지들은 마치 우주의 별들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들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인다.”(45쪽)

이처럼 김병수의 기억이 파편화되다 보니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비의(秘義)를 풀 수 있는 단서 역시 김병수의 기억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작가는 실재〔眞〕와 가상〔妄〕이라는 두 개의 덫을 놓고 독자를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니 독자는 애오라지 조각난 김병수의 기억, 그 파편들을 갖고 퍼즐을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병수라는 화자가 사라져가는 기억에 대해 기술한 소설인 만큼 김병수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병수가 왜 연쇄살인범이 됐는가, 그리고 왜 연쇄살인을 멈추게 됐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그의 가족관계에서 유추가 가능하다.

김병수가 첫 살인을 벌인 것은 열여섯 살 때였고, 당시 살해대상은 아버지였다. 그래서 김병수는 “아버지는 나의 창세기”(30쪽)라고 정의한다. 김병수가 “나머지 살인들은 첫 살인의 후렴구였다. 손에 피를 묻힐 때마다 첫 살인의 그림자를 의식했다.”(29쪽)고 회고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 살해는 김병수에게 잊히지 않는 강렬한 경험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김병수는 열여섯 살에 시작해서 마흔다섯 살까지 살인을 계속하였다. 30년간 살인을 해온 김병수가 왜 마흔다섯 살 이후부터는 살인을 하지 않게 된 것일까? 그 해답의 열쇠는 김병수가 살인을 끊은 뒤부터 함께 살고 있는 의붓딸 은희가 갖고 있다.

은희 엄마는 김병수의 마지막 제물이었다. 그녀를 땅에 묻고 돌아오던 길에 차가 나무를 들이박고 전복됐고, 김병수는 두 번의 뇌수술을 받았다. 김병수는 은희 엄마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

나는 오랫동안 은희 엄마를 노렸다. 그녀는 내가 다니던 문화센터에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종아리가 예뻤다. <중략> 나는 아직도 내가 알던 나인지를 알아보고 싶어졌다. 눈을 뜨니 바로 눈앞에 은희 엄마가 있었다. - 우연은 불운의 시작일 때가 많지.

그래서 죽였다.
그런데 힘이 많이 들었다.
실망스러웠다.

아무 쾌감 없는 살인, 그때 이미 나에게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두 번의 뇌수술은 그것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을 뿐.
(23~24쪽)

그러니까, 김병수가 살인을 멈추게 된 동기는 두 가지이다. 첫째, 은희 엄마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실망스러움을 느꼈고, 둘째, 살해 직후 교통사고가 나서 두 번의 뇌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대부분은 치매 걸린 연쇄살인범 김병수와 김병수의 피해자 딸인 은희가 위태로운 동거를 하는 내용이다. 이 둘 앞에 젊은 연쇄살인범 박주태가 등장한다. 김병수는 차갑고 냉혹한 뱀의 눈을 가진 박주태를 보는 순간 자신과 같은 과의 사람임을 대번에 알아본다. 그런데 박주태가 며칠 후에는 은희의 약혼자가 되어서 집에 나타난다. 김병수가 보기에 박주태는 은희를 희생물로 삼으려는 게 분명하다. 딸만은 살려주겠다는 은희 엄마와의 약속 때문인지, 아니면 25년간 키우면서 정이 들었는지 김병수는 기억이 소멸해가는 과정 속에서도 은희를 지키기 위해서 사력을 다한다. 김병수와 박주태의 팽팽한 경쟁구도 속에서 누가 과연 승리할 것인가, 하는 데 관심이 모아진 채 이 소설은 결말을 향해 전력 질주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갈수록 흥미진진함은 사라지고, “해삼처럼 변해간다. 구멍이 뚫린다. 미끌거린다. 모든 것이 빠져나간다.”(22쪽) 소설에 인용된 니체의 말처럼 ‘혼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혼돈이 당신을 쳐다’보고 있는 꼴이다.

소설 말미에서 모든 게 바뀐다. 김병수와의 짜릿한 한판 승부를 기대하게 했던 박주태는 경찰이 되어 나타난다. 과거의 연쇄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김병수를 찾아온 안 형사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김은희는 김병수의 딸이 아니라 김병수를 간병하던 요양보호사이다. 그리고 김병수는 25년 전 세 살짜리 은희를 살해했음은 물론이고 요양보호사인 김은희도 살해하였다. 그렇게 소설 서사의 축이 일순간 연쇄적으로 무너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설의 주된 서사인 김병수와 김은희의 동거 내용도, 김병수와 박주태의 경쟁 관계도 모두 김병수가 지어낸 망상이라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 와서는 독자들도 “비슷한 얼굴의 타인들이 모두 함께 자기를 속이고 있다”(17쪽)고 믿을 수밖에 없는 김병수의 심정이 된다.

그래서 독자들은 김병수와 마찬가지로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문득, 졌다는 생각이 든다.”(143쪽) 독자들이 느끼는 열패감은 작가의 작란(作亂)에 놀았다는 것에서 기인한 것인 만큼 이 소설은 잘 짜인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화자가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범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시종일관 단문의 아포리즘으로 이끌고 나간 것도 그 형식에 내용이 부합한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게다가 중간 중간에 이 이야기가 허구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깔아놓았다는 점에서 작가의 노련함이 빛을 발하고 있다. 가령,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 아니 몰래카메라다. 깜짝 놀랐지? 미안, 그냥 장난이었어.”(35~36쪽) 같은 문장이 그러하다.

작가가 깔아놓은 암시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시로 출현해 독자들을 혼동케 하는 개이다. 권희철 평론가가 주목했다시피 소설 속에서 개는 일정한 시차를 두고 출현하는데, 그 개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가 매번 다르다.

돌멩이를 던지는 김병수에게 “그 개는 우리 개”라고 했던 은희가 나중에는 “우리한테 개가 어디 있어요?”라고 묻는가 하면, 김병수를 찾아온 안 형사가 “전에도 있던데요. 이 집 개 아니에요?”라고 묻기도 한다.

작가는 개의 출현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자공안(無字公案)을 던지는 것만 같다. 선가(禪家)에서 가장 널리 쓰는 화두인 무자공안의 기원은 조주 선사가 “개에도 불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있다”고 답했고, 다음에는 “없다”고 답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가에서 무자공안을 중시하는 이유는 선(禪)의 목적은 유무(有無)의 분별심(分別心)을 떠나는 데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작가는 개의 잇단 출현을 통해서 김병수의 기억이 사실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꾸며낸 것인지 맞춰보라고 묻는 동시에 보다 근원적으로는 실재〔眞〕와 허구〔妄〕의 경계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김병수는 왜 헛된 망상을 만들어낸 것일까? 김병수는 자신의 삶을 세 시기로 나누고 있다.

내 인생은 셋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를 죽이기 전까지의 유년, 살인자로 살아온 청년기와 장년기, 살인 없이 살아온 평온한 삶. 은희는 내 인생 제3기를 상징하는,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부적 같은 것 아니었을까. 아침에 눈을 떠 은희를 볼 수 있다면, 나는 희생자를 찾아 헤매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었다. (54쪽)

그러니까 김병수가 만들어낸 은희라는 허구의 인물은 ‘평온한 삶’을 상징하는 부적 같은 것이다.

김병수가 아버지를 살해한 뒤 어머니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구체적인 진술이 없다. 누이인 영숙은 악성빈혈로 고생하다가 죽었다.

무미건조한 몇 줄의 문장으로 처리된 김병수의 결혼 생활도 행복하지 않았다. 첫 번째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종적을 감췄다. 두 번째 아내와는 혼인신고도 했지만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우면서 이혼을 요구했다. 김병수는 아내와 바람을 피운 놈을 죽인 후 토막내 돼지우리에 던졌다. 가족도 없이 외롭게 늙어가는 김병수를 지키는 것은 입에 왕겨를 가득 머금은 채 웃고 있는 아버지의 환영과 대숲에 파묻힌 시체들뿐이다.

물론 김병수를 외롭게 한 것은 김병수 자신이다. 김병수가 얼마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서툴렀는지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잘 드러난다.

내 마음은 사막이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습기라곤 없었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어린 날도 있었다. 내게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나는 늘 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그들은 나를 소심하고 얌전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거울을 보며 표정을 연습했다. 슬픈 표정, 밝은 표정, 걱정하는 표정, 낙담하는 표정. 그러다 간단한 요령을 익혔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이다. 남이 찡그릴 때 찡그렸고 남이 웃을 때 웃었다.
(34쪽)

모든 인간관계에서 단 한 번도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머물러야 했던 김병수는 타인과 함께하는 일에서는 당최 기쁨을 얻을 수 없다. 그의 직업이 수의사인 것도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병수는 홀로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여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쾌락을 찾게 된다. 살인은 김병수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유일하게 주체적일 수 있는 일이다. 장기 미제 사건을 조사하는 경찰대 학생들이 찾아왔을 때 김병수가 “너희들이 보고 있는 그 기록들에는 주어가 없지. 목적어와 술어만 즐비한 불구의 기록. 거기 ‘불상자’로 갈음했을 그 이름, 내가 바로 그 이름, 그 주어다.”라고 속말을 하는 것도 연장 선상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인생’이라는 글에서 김병수 자신이 ‘주어’일 수 있는 경우는 ‘살인’밖에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김병수는 교통사고 직후 극심한 섬망을 겪는다. 꿈속에서 그는 세 아이의 아빠다. 위로 딸이 둘, 막내는 아들. 아내가 챙겨준 도시락을 들고 관공서처럼 보이는 어떤 곳으로 출근을 한다. 평생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안정된 삶의 달콤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꿈에서 깨어난 후 그는 어떤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김병수는 자문한다.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상실이었을까? 실제로 갖지도 않았던 것에 대해서 느끼는 이 기묘한 상실감이 은희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병수는 은희라는 가상의 인물과 함께 동거하기 시작한다. 김병수에게 은희는 좀비와 다르지 않다. 예전에 죽었음에도 살아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금 눈에 안 보인다고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법은 없다.”(46쪽)고 우긴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 보자면, 김병수가 은희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낸 동기는 자기 유폐의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안온한 삶을 꾸리고 싶다는 판타지에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으므로 자신의 미래 또한 통제할 수 있다는 아만(我慢)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응오 | 소설가, 전 주간불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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