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탄생 1천 4백년
 다툼 멈추고 화해하는
 유연한 화쟁으로
 사회분쟁·갈등 해소되길
 

새해가 밝았다. 1월 1일 새벽, 올해도 많은 사람이 산과 바다에서 새해 첫 일출을 맞으며 각자의 소망을 빌었을 것이다. 한 해가 저물고 새해를 맞을 때마나 늘 되새기는 말이지만, 지난해처럼 ‘다사다난’이란 말이
적절한 때가 또 있었나 싶을 만큼 2016년은 힘겨웠다. 새해가 되면 지난해의 문제는 일단락 짓고 미래의 희망을 얘기해야 하건만, 구중궁궐의 오불관언(吾不關焉)은 바뀔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그곳을 향한 국민의 분노는 주말마다 서울 중앙에서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다.

이즈음에서 대통령은 용퇴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자신과 부모, 더 나아가 국가와 국민에게 조금이나마 덜 죄를 짓는 일이다. 대통령이 고집을 부리면 부릴수록 우리 국민의 정신과 삶은 피폐해질 것이고, 국가위신은 더욱 추락하여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청와대에서 특정 의약품을 대량 구매한 일이 전파를 타 망신은 톡톡히 당했다).

2017년은 원효대사가 태어난 지 1천4백년이 되는 해다. 원효가 활동하던 시기는 고구려·백제·신라가 치열한 쟁투를 벌이다 끝내 고구려·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통일을 이룬 때였다. 정치적·군사적으로는 삼국이 전쟁을 일삼고, 불교계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의논이 구구할 때 원효는 ‘화쟁(和諍)’사상을 주창하며 상호간의 소통과 화해를 시도했다. ‘쟁(諍)’이란 글자를 파자(破字)하면 알 수 있듯, 그 뜻은 ‘말다툼’ 정도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화쟁’을 아주 쉽게 풀이하면 구구한 말다툼을 멈추고 서로 화해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다툼은 나와 너의 생각이 다른 데서 비롯한다. 나는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 너는 내 생각이 틀렸다고 지적하면서 다툼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내 관점에서 사물과 현상을 파악하므로 내 생각이 옳고, 너는 네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이해하기 때문에 네 생각이 맞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와 너는 각각 자기 관점과 위치에서만 사물을 파악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맞다/틀리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비근한 예로 《열반경》의 ‘맹인모상(盲人摸象)’ 설화를 생각할 수 있다. 맹인은 저마다 코끼리를 손으로 더듬어 그 형체를 알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아는 것은 전체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 각자의 코끼리에 대한 해석은 부분적으로 옳지만 전체적으로는 옳지 않다. 우리의 다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부처님이 평생 중생을 위해 설한 법문의 내용(진실)은 한 가지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말씀을 해석하는 신도들의 생각에 차이가 생기고, 그에 따라 삼론종(三論宗)이니 유식종(唯識宗)이니 하는 종파가 생겨 논쟁이 붙는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그런 논쟁이 무의미함을 지적한 것이다. 원래는 하나인데 그것을 나누다 보면 둘, 넷, 여덟…… 무한대로 늘어난다. 무문혜개 화상의 말처럼 큰 진리에는 문이 없으나[大道無門], 사람들은 문을 만들어 방을 나눈 뒤 그 속에 숨길 좋아한다. 문이 없는 곳은 광장이고 문이 있는 방은 밀실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모여드는 광화문지역은 문이 없어 누구나 올 수 있는 광장이다. 문이 닫혀 있는 밀실도 문을 열면 옆방과 통해 하나가 되고, 문을 모두 없애면 사방으로 트인 공간이 된다. 하지만 문을 닫으면 두 공간으로 나뉘어 협소해진다.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고집불통 지도자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 2107년에는 예정했던 일정보다 빨리 대선이 치러질 것이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지도자는 ‘나만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도 옳고 너도 옳다’는 유연한 사고를 지닌 인물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효대사가 태어난 지 1천4백년이 되는 해의 첫아침을 맞으며 우리 사회의 분쟁과 갈등이 해소되길 기원한다.

-동국대 문창과 교수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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