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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쾌락과 고통, 그 삶의 지배자
쾌락의 가벼움과 고통의 무거움 이 시대를 관통하는 화두
2016년 12월 01일 (목) 10:19:14 김문갑 meastree@naver.com

1. 고통을 견디는 자는 모두 영웅이다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헤라클레스가 겪은 극심한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은 옷이다. 이 옷에는 히드라의 맹독과 네소스의 피가 묻어 있었다. 히드라 퇴치는 헤라클레스에게 주어진 과업 중의 하나였다. 그는 히드라를 죽이고 담즙을 화살에 묻혀 사용하였다. 히드라의 담즙은 맹독으로 약간만 스쳐도 극심한 고통 속에 죽게 되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스는 12개의 과업을 마치고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끝에 아름다운 여인 데이아네이라를 아내로 맞았다. 칼리돈의 하신(河神) 아켈로오스를 무찌르고 얻은 사랑이었다. 둘 사이에서 아들 힐로스도 생기고, 모처럼만에 한가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뜻밖에 왕의 측근을 죽이는 사고를 저지르고 칼리돈을 떠나야만 하였다. —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실수라면 이 또한 광기이다. 헤라클레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많은 실수와 비합리적인 선택으로 곧잘 불행을 자초하곤 한다. —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트라키스로 향하던 중 에우에노스 강에 이르렀을 때, 마침 네소스가 나타나 데이아네이라를 업고 강을 건네주겠다고 제안하였다. 네소스는 반인반마인 켄타우로스 족이다. 거센 물살에 고민하던 헤라클레스는 네소스의 호의를 믿고 아내를 맡겼다. 하지만 네소스는 데이아네이라를 납치하였다. 처음부터 계획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강을 건네주는 동안에 마음을 빼앗긴 것인지……. 실상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데이아네이라를 향한 네소스의 욕망만큼은 분명하였다.

데이아네이라를 등에 업고 도망치던 네소스의 가슴에 헤라클레스가 쏜 화살이 꽂혔다. 히드라의 맹독이 묻어 있는 그 화살이 심장을 뚫었다. 죽음의 고통을 참으며 네소스는 데이아네이라에게 자신의 피에는 사랑을 되살리는 힘이 있으니 남편의 사랑이 식으면 그 피를 옷에 발라 입히라는 말을 남긴다. 데이아네이라는 네소스의 피를 병에 담았다.

헤라클레스 가족은 트라키스에서 한동안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헤라클레스는 오이칼리아에 쳐들어가 이올레를 데려온다. 이올레는 본래 헤라클레스가 활쏘기 시합에서 이기고 신부로 맞이해야할 여인이었다. 그러나 오이칼리아의 왕, 이올레의 아버지이며 헤라클레스의 활쏘기 스승인 에우리토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자신의 아내와 세 명의 자식을 죽인 헤라클레스의 광기를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헤라클레스는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오이칼리아를 떠나 데이아네이라와 결혼하였던 것이다.

데이아네이라는 불안하였다. 남편의 사랑을 빼앗길 것만 같았다. 남편이 새로운 사랑에 푹 빠졌다는 소문이 들릴 때, 그녀는 하염없이 울었다.

내가 왜 울지? …… 다른 여자가 내 침상을 차지하기 전에,
항의할까? 아니면 침묵할까? 칼뤼돈(칼리돈)으로 돌아갈까? 여기 머물까?
집을 나갈까? 아니 달리 뾰족한 수가 없으니 일단 가로막고 볼까?1)

이런 저런 궁리 끝에 데이아네이라는 네소스가 남긴 말을 생각해내었다. 그리고 그의 피를 옷에 적시고 그 옷을 헤라클레스에게 보낸다. 남편의 사랑이 다시 돌아오길 기대하며…….

네소스의 피가 묻은 옷은 헤라클레스의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옷을 뜯어낸 자리엔 살점이 떨어졌고 굵은 뼈가 드러났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헤라클레스는 장작을 쌓아놓고 자신을 불살랐다. 그렇게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 육신을 태워 없앴다.

헤라클레스의 옷에는 사랑과 미움, 소망과 불안, 그리고 분노와 복수 등등이 범벅이 되어 있다. 이 옷과 관계되는 인물 모두의 욕망과 감정이 녹아 있다. 그 모두를 욕망이라고 한다면,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 사랑 하고자 하는 욕망, 복수하고 싶은 욕망 등등의 욕망으로 버무려진 것이다. 욕망이 꿈틀대면 육신은 곧 포로가 된다. 몸은 욕망을 떼어내지 못한다.

모든 육신을 가진 존재는 욕망이 있다. 욕망은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에너지이다. 모든 생명체는 욕망이 없으면 생존하지 못한다. 피 속에 스며들어 육신이 사그라지는 순간까지, 아마도 죽음이 모든 욕망을 없앨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생명 있는 자의 숙명이다. 그러므로 죽음, 그 생명이 다하여야만 욕망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죽음은 과연 해방이다. 스토아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말한다.

죽음이란 감각적 인상과, 충동에 따른 조종과, 마음의 방황과, 육신에 대한 봉사로부터의 휴식이다.2)

삶이 사랑과 욕망, 광기와 고통 속에서 헤매는 것이라면, 헤라클레스는 우리들 모두의 거울이다. 사랑하고 욕망하며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기도 하고, 그 결과에 고통스러워하는 게 보통 사람의 인생이라면 우리 모두는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인 것이다.

2. 가볍고 유쾌한 사랑이 전쟁을 잠들게 한다

아프로디테(비너스)는 사랑과 미의 여신이며 풍요의 여신이다. 그런대 가장 아름다운 이 여신이 가장 못생긴 헤파이스토스에게 시집보내진다. 헤파이스토스는 하반신불구이다. 본래 헤라여신이 남자의 도움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홀로 낳은 자식인데, 너무 못 생기게 태어나서 지상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헤파이스토스는 엄연히 올림푸스 12신의 하나이다. 대장장이의 신으로 신들에게 필요한 모든 공구를 만들어낸다. 워낙이 손재주가 좋아 그 공으로 제우스로부터 최고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아내로 받았던 것이다.

최고의 기술력과 성실성까지 갖춘 남자.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가장 아름다운 여신의 짝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겠다. 이 사랑의 여신은 강한 남자, 전쟁의 신 아레스(마르스)와 불륜에 빠진다. 올림푸스 최고의 매력남과 매력녀의 은밀한 만남. 하지만 모든 것을 훤히 아는 태양신 아폴론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 요아킴 브테바엘 ‘불카누스에 놀란 마르스와 비너스’

그 번쩍이는 빛으로 만물을 지배하는 태양신도 사랑의 포로가
된 적이 있었지요. 나는 태양신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거예요.
이 신이 베누스(비너스)와 마르스(아레스)의 간통 장면을 맨 먼저 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만물을 맨 먼저 보는 신이니까요.
그는 그들의 행동에 분개하여 베누스의 남편인 유노(헤라)의 아들에게
어디서 어떻게 그들이 밀통했는지 일러주었어요.
불카누스(헤파이스토스)는 정신이 아득해져 손질하고 있던 일거리를
손에서 떨어뜨렸어요. 그는 즉시 청동을 줄로 쓸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는 사슬과 그물과 올가미를 만들었지요.
……
그는 그것들이 가벼운 접촉에도,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반응하도록 만든 다음 교묘한 기술로 침상 주위에 쳐놓았지요.
그리하여 그의 아내와 샛서방이 함께 그 침상에 누웠어요.
그들은 불카누스의 기술과 교묘하게 준비한 사슬들에 걸려들어
서로 포옹하던 중에 둘 다 꼼짝없이 붙잡혔지요.
램노스의 신(헤파이스토스)이 즉시 상아로 만든 문짝들을 활짝 열고 다른 신들을
들여보냈지요. 두 신은 사슬에 걸린 채 창피하게 그곳에
누워 있었어요. 헌데 신들은 불쾌해하지 않았고, 그들 중 누군가는
자기도 그렇게 창피를 당해 봤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신들은 웃고 또 웃었으며, 그것은 오랫동안 온 하늘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가 되었지요.3)

이 장면은 많은 화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잘 생긴 남녀의 밀회를 바라보는 많은 눈. 그리스 로마 사람들은 이 간통사건을 불쾌해하지 않았다. 음탕한 시선에 유쾌한 농담을 섞고, 질투어린 욕망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화가 요아킴 브테바엘(1566〜1638)이 그린 〈불카누스에 놀란 마르스와 비너스〉에는 밀회현장을 들킨 벌거벗은 두 남녀의 창피와 당혹, 이들을 지켜보며 낄낄대는 신들의 고약함과 익살이 잘 그려져 있다. 아마 그리스 로마인들이 가졌던 느낌도 이런 것이었을 게다.

   
▲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와 마르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의 〈비너스와 마르스〉 하나만 더 보자. 두 남녀는 밤새 운우의 기쁨을 누렸다. 새벽이 밝아왔는데도 마르스는 깊은 잠에서 깰 줄 모른다. 장난꾸러기 사티로스들은 마르스의 무기, 긴 창과 투구를 갖고 놀고 있다. 한 사티로스가 마르스의 귀에 대고 뿔고동을 불어도 이 남자, 전쟁의 신은 깨어날 줄 모른다. 이 그림은 신혼부부에게 준 그림이라고 한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가르침. 사랑은 전쟁도 막는다는 교훈이다. 정말로 사랑으로 전쟁을 영원히 잠재울 수 있다면…….

3. 고통과 쾌락, 그 삶의 지배자

헬레니즘(Hellenism)시대는 알렉산더 대왕이 대제국을 건설하고 죽었을 때(B.C.323)부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어스 왕조가 로마에 멸망하는 악티움의 전쟁(B.C.31)까지 약 300년간에 걸친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기에 알렉산더의 민족융합, 문화융섭 정책이 이어지며 그리스 문화는 널리 인도에까지 퍼졌다. 이미 폴리스(polis)의 질서체계는 무너졌다. 그리스인들은 더 이상 좁은 도시국가 폴리스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알렉산드리아 같은 대도시, 코스모폴리스(cosmopolis)는 거대한 용광로가 되어 여러 민족, 다양한 문화를 한데 녹여내고 있었다. 세계시민주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은 그렇게 개화하였다.

이제 세계를 바라보고, 우주를 이해하고, 인생을 대하는 폭과 깊이가 달라졌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아르키메데스의 물리학 등의 자연 과학과,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등의 철학이 꽃을 피웠다. 예술은 멀리 인도의 간다라 미술까지 탄생시켰다.

〈밀로의 비너스〉와 〈라오콘 군상〉은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2미터가 넘는 8등신 미인 밀로의 비너스는 언뜻 보면 여신 같아 보이지 않는다. 삐딱한 자세. 허리 아래로 한 겹 천조각을 흘러내리고 여신은 건들건들, 걷는 건지 춤을 추는 건지……. 아무리 사랑의 여신이라고 해도 여신다운 근엄함은 찾을 수 없다. 금방이라도 엉덩이를 씰룩대며 섹시하게 걸어 나올 것만 같다. 마릴린 먼로를 섹스의 아이콘으로 만든 그 스텝으로 말이다. 가볍고 불량스런 사랑. 이 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사랑하며 살았던 건 아닌지.

트로이 전쟁을 시작한지 어언 10여 년. 병사들도 장군들도 지칠 대로 지쳤을 때, 오디세우스는 최후의 계략을 낸다. 적들이 속아주면 성공, 속아주지 않으면 참담한 실패인 도박과도 같은 계략이었다. 바로 트로이 목마.

이 때 그리스의 계략을 간파한 라오콘은 목마를 성안으로 들이지 말 것을 외치며 목마를 향해 창을 던졌다. 하지만 이 일은 신에 대한 불경의 증거가 되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거대한 바다뱀을 보내 징벌한다. 

   
▲ ‘밀로의 비너스’(왼쪽)와 ‘라오콘 군상’

뱀들은 곧장 라오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먼저
각각 그의 두 아들의 작은 몸통을 친친 감고는
가련한 그들의 사지를 뜯어먹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것들은 무기를 들고 구하러 온 라오콘을 붙잡아
거대한 똬리를 틀어 감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들은 어느새
그의 허리와 그의 목을 비늘 있는 등으로 두 번이나 감은 뒤
머리와 목을 높이 쳐들었습니다.
그동안 내내 그는 두 손으로 그것들의 똬리를 풀어 젖히려 했고,
그의 머리띠는 피와 시커먼 독액으로 더럽혀졌으며,
그동안 내내 그는 하늘을 향해 무시무시하게 소리쳤습니다.
그것은 흡사 부상당한 황소가 잘못 겨냥한 도끼를 목에서 떨쳐버리고
제단에서 도망칠 때 울부짖는 소리와도 같았습니다. 베르길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아이네이스》


극도의 공포와 고통 속에 두 아들이 죽어가고, 그 자신 또한 죽어간다. 인간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이 〈라오콘 군상〉보다도 더 잘 묘사한 작품이 있을까. 미켈란젤로는 “예술의 기적”이라고 했다.

쾌락과 고통은 이 시대를 관통하는 화두였다. 쾌락의 가벼움과 고통의 무거움, 마치 비너스 상과 라오콘 군상을 대하듯, 그들은 그 본질을 찾아 헤맸다. 에피쿠로스, 제논, 디오게네스, 그리고 로마의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에 천착했다. 그러나 이들은 ‘철학’을 하지 않았다. 철학은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않았다. 그들은 ‘철학함’을 배웠고 실천했다. 온전히 몸과 마음, 영혼과 육신이 하나가 되어, 삶의 고통을 직시했고 진정한 쾌락을 추구했다. 그들은 자기 삶의 주인이었다.

주) -----
1)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원전으로 읽은 변신이야기》
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천병희 옮김, 《명상록》
3)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원전으로 읽은 변신이야기》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meastr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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