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의 일이다. 일제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당한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호소한다. 이 일로 고종이 일제로부터 폐위 당하고 순종이 즉위하나, 뭇 민초들로부터는 반일의 소용돌이가 그 위세를 키워갔다.

반일 감정이 고조되는 분위기를 타개하려는 듯, 순종과 함께 구성된 이완용 내각은 그 해의 법률 제1호를 제정·공포한다. <신문지법>이다. 광무 11년에 실시된 법령이라 하여 ‘광무신문지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은 부칙까지 총 38개의 조항으로 이뤄져 있는데, 눈에 띄는 조항을 살펴보면 이렇다.

제1조 신문지를 발행하고자 하는 자는 발행지를 관할하는 관찰사를 경유하여 내부대신에게 청원하여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6조 제호, 기사의 종류, 발행인·편집인을 변경하고자 하는 때에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10조 신문지는 매회 발행에 앞서 내부 및 관할관청에 각 2부를 납부한다.
제11조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하거나 혹은 국제문의를 저해하는 사항을 기재할 수 없다.
제12조 ①기밀에 관한 관청의 문서 및 의사는 해당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아니하면 상략을 불구하고 기재할 수 없다. ②특수한 사항에 관하여 당해 관청에서 기재를 금지한 때에도 같다.
제21조 내부대신은 신문지가 안녕 질서를 방해하거나 풍속을 괴란한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그 발행, 반포를 금지하고 이를 압수하거나 발행 정지 혹은 금지할 수 있다.
제25조 제11조를 위반한 경우에는 발행인, 편집인, 인쇄인을 3년 이하의 역형에 처하며 범죄에 이용된 기계를 몰수한다.
제26조 사회의 질서 또는 풍속을 괴란하는 사항을 기재한 경우 발행인, 편집인을 10개월 이하의 금옥 또는 50환 이상 300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앞서 소개한 8개 조항은 언론이 관할 권력기관으로부터 허가를 받을 것을 명시함과 함께, 보도할 내용을 사전에 검열하고, 허가를 얻지 않은 내용은 보도할 수 없도록 한 대표적인 내용이다. 이 외에도 광무신문지법에서는 신문 발행을 어렵게 하려는 보증금에 관한 법률과 정정보도에 대한 의무(판단은 관할청의 몫이다), 이 같은 법률을 지키지 아니했을 때 받게 되는 행정 및 사법처분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신문지법> 제정 이후 그 해 법률 제2호로 정치 집회와 결사를 금지한 <보안법>이 공포됐다는 사실은 굳이 더 언술하지 않되, 광무신문지법이 이듬해 전문 41조와 부칙으로 강화됐다는 점과, 한국과는 차별을 둔 <신문지규칙>이 새롭게 제정되어 해외에서 들어오는 신문에 적용됐다는 사실은 주지할 가치가 있다. 더욱이 광무신문지법은 이승만 정부 이후인 1952년까지 약 반백년간 통치자들의 입맛에 따라 ‘쓴 소리’와 ‘직언’을 막는 프레임으로 작동해왔다는 사실까지.

이와 같은 언론의 역사를 일부 되짚어 보는 것에 ‘일제’이라거나 ‘독립신문’이라는 개념으로 단순 치환하려는 의도는 없다. ‘저항하는 자’와 ‘통제하려는 자’라는 선악 구도로 눙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만 하나의 금기 조항을 만드는 일에 얼마큼의 위험 요소(금기의 확장, 처벌, 후대의 평가 등)가 내포되어 있는지, 과거의 일에서 비춰보는 계기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 않은가 생각한다.

기실 <신문지법>은 1898년 고종 재위 당시 한 차례 제정 움직임이 있었으나 흐지부지됐다고 전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신문들이 반대 의견을 개진했는데 <독립신문>의 1899년 1월 10일자 논설을 다시금 상기한다. “언권자유를 억압하면 공론이 없어지고, 공론이 없어지면 정부관리들이 인민을 압제하여 국가가 위태롭게 된다. 동서양의 역사를 보면 언권자유를 허용하는 나라는 성하고 입을 틀어막아 시비를 못하게 하는 나라는 위태롭다. 언권자유는 나라를 다스리는 큰 강령이다.”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