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강자의 기록이다. 역사의 전면에 기록되는 것은 남성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남성의 전유물일까? 그럴 리 없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내어 보이는 시도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 자체에 고려 후기 일연 스님이 편찬한 사서 《삼국유사》에 나타난 다양한 여성상을 전면에 이끌어내고 주체적인 여성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책 《삼국유사, 여인과 걷다》가 출간됐다.

이 책을 쓴 정진원 교수는 동국대에서 《삼국유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삼국유사》전문가이자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 연구교수로 한글과 삼국유사 세계화에 애쓰고 있다. 그는 ‘《삼국유사》는 얼핏 남자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성인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는 점에 착안, ‘잘 나가는 우바새 뒤에는 그보다 열 배 훌륭한 우바이가 있다’는 해석을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불교여성개발원 ‘우바이 예찬’과 통도사 사보 <보궁>에 연재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저자는 ‘삼국유사 삼대 미녀’와 ‘삼국유사 속 개국 시조 어머니들’, ‘성모와 국모’, ‘킹 메이커’, ‘어머니들과 관세음보살’ 등 책의 주제를 크게 다섯 가지로 설정했다. 그는 “선덕여왕도 지금에나 ‘여왕’으로 강조하지 《삼국유사》에는 ‘선덕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며 “우리보다 남녀평등에 익숙하고 공동 통치에 대한 편견이 없었던 시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시점”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고조선에서부터 고려까지 내려오는 역사 속 삼대미녀로 수로, 도화, 선화를 뽑고, 단군을 낳은 어머니인 웅녀의 이름을 추적한다. 가냘프고 유약한 이미지로 표현되어온 주몽의 어머니 유화를 해모수에게 버림받은 비련의 여인이 아니라 고구려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농업의 신으로 우뚝 서는 모습을 찾는 한편, ‘향기 없는 꽃, 모란’으로 조롱받았던 선덕여왕이 어떻게 신라의 위기를 삼국통일의 기회로 삼았는지 조명한다.

특히 일연 스님이 참고한 고승전이나 역사서 그 어디에도 없으나 그가 쓴 《삼국유사》에는 들어있는 ‘효선편’에 주목했다. 저자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8살에 출가한 일연 스님은 노년기 약 30여 년간 비슬산 자락 지근거리에서 어머니를 모셨으며, 국사 자리를 마다하고 어머니가 입적하는 96세까지 봉양했다”면서 “홀어머니나 편부·편모, 슬하의 아들딸들이 보이는 지극한 효도 이야기들을 담은 ‘효선편’을 보면 인간 냄새가 물씬 나는 일연 스님의 일대기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 11월 15일 출판간담회를 연 《삼국유사, 여인과 걷다》저자 정진원 교수.

선덕여왕 이후 1300년 만에 첫 여성통치자가 탄생한, 종국에는 극심한 분노와 혼란에 휩싸인 오늘에 《삼국유사, 여인과 걷다》가 시사하는 바 무엇일까. 저자는 “내가 촛불집회에 나간다면 김유신으로 나가는지 김춘추로 나가는지 아니면 비담으로 나가는지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라고 언질한다.

그는 “선덕여왕은 당태종으로부터 ‘향기 없는 꽃’이라고 조롱받는 등 여성으로서 공격받는 일이 많았지만 그가 여자라서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영민하고 지혜로웠으나 풍전등화의 위기를 겪었던 그녀는 비담이 내란을 일으킨 와중에 사망하지만, 통일신라를 이끌어낸 것 또한 선덕여왕에게 조력했던 김춘추와 김유신과 같은 인물들”이라고 설명했다.

저자는 “단지 여성성을 비하하면서 침을 뱉고 욕할 수도 있지만, 통일신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국민”이라며 “김춘추나 김유신으로서 할 수 있는 나만의 역할은 무엇일까 고민해보는 시간이 있었으면 한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답이 《삼국유사》 안에 있고 또한 이 책 《삼국유사, 여인과 건다》에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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