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의 풍수지리사상에 관한 문제 역시 그의 선법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이고 문헌적인 증거가 전무하다. 역시 당대의 시대사조와 더불어 유추해석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도선을 전후한 나말여초의 선승들이 풍수지리설을 겸수하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 풍조였다. 왜냐하면 선사들이 산문을 개창할 때 풍수지리설에 따라 사원의 자리를 결정한 예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굴산파의 3조 낭공 행적이 신덕왕의 추천으로 경주 남산 실제사에서 머물다가 다시 시주인 명요 부인의 요청에 따라 신덕왕 4년(915) 석남산사에 머물렀는데, 그 뛰어난 지세를 보고 마침내 삶을 끝마칠 장소로 삼아 머물렀다는 예뿐만 아니라, 봉림산파의 2조 진경 심희와 봉림사, 사자산파의 2조 징효 절중과 홍령사, 실상산파 2조 수철 화상과 심원사, 진감 혜소와 쌍계사, 법경 경유와 오룡사, 그리고 지증 도헌과 봉암사 등에서도 그 유사한 경우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나말여초 선종사찰의 기지 선정에 풍수지리설이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었던 것은, 대개 한편으로는 당시의 선문들이 대개 수백 명 단위의 대집단을 형성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란기에 처하여 도적들의 사찰 침입이 빈번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그 지세가 한편으로는 수백 명의 대집단을 수용할 만큼 광활한 것이어야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도적들의 침입을 방비하기에 편리한 조건을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풍수지리설은 당시 선문들에게는 현실문제 해결 방책의 하나이었던 것 같다.1)

뿐만 아니라 선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지방호족들에게도 선종을 매개로 하여 풍수지리설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신라 중대 이전의 풍수지리설 이해의 주역은 불교 교학승려이며, 그 이해 범위도 경주의 중앙귀족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대로 접어들면서 풍수지리설은 선종의 지방 전파와 아울러 각 지방에 광범위하게 유포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각 지방에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성정하고 있던 호족세력들은 경주 진골 귀족들의 지역적인 폐쇄성에 대한 반발과 아울러 그에 대한 독립적인 세력 형성을 합리화하여 주는 이론적 근거로서 풍수지리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민족 역사의 주인공이 경주의 진골 귀족에서 지방의 호족으로 옮겨지고 있던 전환기에 처하여 그 새로운 주인공들인 지방호족들이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자신들의 근거지를 새 역사의 중심무대로 내세움으로써 그들의 세력 형성을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이다.2)

일반적으로 선종과 풍수지리설은 그 신앙 형태에 있어서 전연 다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심성도야를 통한 안정인 자각을 중시하는 선종과 자연지리적 위치와 조건을 미래의 길흉화복과 연관시키는 풍수지리설은 서로 그 사유 형태에 있어서 판이하다고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선종과 풍수지리설의 관계는 사실상 선종의 성립 초기부터 밀접하게 맺어져 있었다. 중국 선종의 사실상 창립자인 혜능이 조계산에서 산문을 개창할 때에 진아선(陳亞仙)의 풍수지리설을 좇아서 보림사의 자리를 선정했으며, 백장 회해도 풍수지리사 사마두타(司馬頭陀)와 소주처로써 위산(潙山)에 대해서 논의했던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3)

선종과 풍수지리설은 그 믿음의 형태면에서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과거와 미래를 지금 현재의 시점으로 끌어오는 선종에서의 심성이나, 가시적인 지세(地勢) 속에서 지기(地氣)라는 무형적인 것으로 현재에서 미래와 타계를 지배하려는 풍수지리설에서의 심성은 사회적 전환기였던 나말여초의 불안한 세태에 처한 당시인들에게는 모든 미래적인 것과 타계적인 것 또는 초월적인 것을 이 지상의 현세적인 것으로 비논리적으로 집약시키려는 경향을 띠고 나타났다. 따라서 당시 새로 성장하고 있던 호족들이나 선승들에게 이 양자는 아무 모순 없이 받아들여졌고 나아가 양자 모두 혼란한 사회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되었던 것이다.4) 이 점 비문에서 “이것(풍수지리설)도 역시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고 인간을 제도하는 법입니다”고 한 바와 같이 선(불교)과 풍수지리설은 아무런 모순 없이 이해되고 있었으며, 선승들의 경우 풍수지리설은 대중 교화의 한 방편으로 이용되었을 것이다.5)

또한 선과 풍수 모두 ‘분석(分析)’ 보다는 ‘직관(直觀)’을 중시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고, 수행 방법에 있어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나말여초의 선승들은 대개 《화엄경》을 비롯한 교학을 수년간 공부한 다음에 선종으로 개종한다. 이후 선지식을 찾아 다시 수련을 쌓고 인가를 받는다. 그 후 전국 각지의 명산대찰을 찾아 고행과 선문답을 통하여 깨달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6)

풍수의 단계에도 3가지가 있으니 우선 범안(凡眼)이라고 하는 것으로 산수의 형세를 매우 상식적으로 이해한다. 다음 법안(法眼)이 있는데, 이는 이론에 밝은 풍수사를 지칭한다. 최종 단계인 도안(道眼)은 개안(開眼)으로 이론적인 정법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산봉(山峰)을 보면 대세(大勢)를 짐작하고, 대세를 보면 진용(眞龍)을 발견하며, 용신(龍身)을 보면 기류지처(氣留止處)를 점(占)하고, 기류지처에 이르면 혈형((血形)이 완연히 눈앞에 들어오며, 따라서 전후좌우 사세팔방(四勢八方)의 기운이 완연히 눈앞에 들어오고, 종합 통일적으로 그 용신혈형(龍身穴形)과 배합 비교되며, 사수득파(砂水得破)의 호불호(好不好)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는 경지이다. 그런 것들은 정법에 대조해 볼 때 조금도 이론에 위배됨이 없는 상태가 바로 도안이다. 법안에서 도안에 이르기 위해서는 ‘문지방’을 넘어야 한다. 어제까지 돌과 흙이라는 물질의 덩어리로만 보이던 산이 살아 꿈틀거리는 용으로 바뀌어 눈에 들어와야 한다. 바로 이 문지방을 넘는다는 일이 선에서의 깨달음에 들어가는 과정과 유사하다.7)

이제 도선과 풍수지리설과 관계를 비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처음 스님께서 옥룡사(玉龍寺)에 자리 잡지 아니하고, 지리산(智異山) 구령(甌嶺)에 암자를 짓고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떤 이상한 사람이 찾아와 좌하(座下)에서 스님께 여쭈어 이르기를, “제자(弟子)는 물외(物外)에서 깊이 숨어서 살아온 지가 벌써 수백 년에 가깝습니다. 조그마한 기술(技術)이 있어 높은 스님에게 올리려 하오니, 만약 천술(賤術)이라 하여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면 다른 날 남해(南海)의 바닷가에서 마땅히 알려 드리겠사오니, 이것 또한 대보살(大菩薩)이 세상을 구제하며, 중생을 제도하는 법(法)이옵니다”라 하고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스님께서 기이(奇異)하게 여겨 약속했던 곳으로 찾아가서 과연 그 사람을 만났다. 그는 곧 모래를 끌어 모아 산천(山川)에 대한 순역(順逆)의 형세(形勢)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돌아다보니 그 사람은 이미 없었다. 그 곳이 현재의 구례현(求禮縣) 경계 지점이니, 그 지방 사람들이 사도촌(沙圖村)이라고 일컫는다. 이로 말미암아 스님은 스스로 활연(豁然)히 깨닫고, 더욱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술(術)을 연구하였다. 비록 금단(金壇)과 옥급(玉笈) 등의 깊고 오묘한 비결들을 모두 흉중(胸中)에 담았다. …… 스님께서 전하신 음양설 수편이 세상에 많이 유포되었는데, 후세 사람으로서 지리를 말하는 자 모두 스님을 조종(祖宗)으로 삼았다.8)

비문에 의하면 도선은 37세 전후에 옥룡사에 들어가기 전에 지리산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그때 수백 살이나 된 어떤 이인(異人)9)이, “이것도 역시 대보살(大菩薩)이 세상을 구제하고 인간을 제도하는 법입니다”고 하면서 도선에게 풍수지리설을 전한다. 이후 도선이 전한 음양설 수편이 세상에 많이 유포되었는데, 후세 사람으로서 지리를 말하는 자 모두 도선을 조종(祖宗)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불교의 경우 풍수지리설은 정법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을 구제하는 하나의 방편은 될 수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선은 선사이지만 풍수지리설을 여기(餘技)로 하여 세상에 보살행을 행하였고, 그 결과 그는 오늘날 한국 풍수의 비조로 추앙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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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외에도 부도 터와 새김돌 터 선정에도 풍수지리설을 이용한 예가 보인다. 자세한 것은 다음 논문을 참고. 최병헌, <도선의 생애와 나말여초의 풍수지리설 - 선종과 풍수지리설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도선국사》, 불교전기문화연구소, 1997. pp.157~162.
2) 위의 논문. pp.168~169.
3) 이능화(李能和),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하. pp.252~253.
4) 최병헌, <도선의 생애와 나말여초의 풍수지리설>. pp.129~130.
5) 물론 이 경우 지나치게 신비적인 요소나 후세에 와서 미신적으로 변한 풍수도참사상과 인문지리적인 입장에서의 풍수지리설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6) 최병헌, <도선의 생애와 나말여초의 풍수지리설>. p.130.
7) 최창조,<한국 풍수지리설의 구조와 원리>, 《도선국사》, 불교전기문화연구소, 1997. pp.195~196.
8) 이지관(李智冠) 교감역주(校勘譯註),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 탑비문(光陽 玉龍寺 先覺國師 證聖慧燈 塔碑文)>,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고려편(高麗篇) 3>, 가산문고(伽山文庫), 1996. pp.436~441.
9) 최병헌은 이인(異人)을 혜철(慧徹)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최병헌, <도선(道詵)의 생애(生涯)와 나말여초(羅末麗初)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 11, 한국사연구회(韓國史硏究會), 1975. p.120.〕 김두진도 역시 최병헌의 견해에 동의한다. 〔김두진, <나말여초의 동리산문(桐裏山門)의 성립(成立)과 그 사상(思想)>, 《동방학지》 57,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8. p.33.〕 최창조는 이인이 지리산 언저리에서 공부한 이름 없는 자생풍수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승인 혜철에게 배웠다면 그 이름을 명기하지 아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최창조, <한국 풍수지리설의 구조와 원리>, 1997. p.305.〕 정성본은 이인의 존재 자체를 의심한다. 〔정성본, <선각국사 도선 연구(先覺國師 道詵 硏究)>, 《도선국사와 한국》, 대한전통불교연구원, 1996. pp.148~164.〕

이덕진 |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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