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의 미래라는 말은 세기말에 이를 때마다 단골처럼 회자되곤 하는 익숙한 개념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길목에 과학기술과 군사력으로 무장한 서양세력에 맥없이 무너져야 했던 우리 지식인들에게는 그 미래가 곧 국권회복이었고, 그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한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길목
에서는 지속가능성의 과제와 여전한 성장의 추구라는 갈등상황 속에서 어떤 대안이 있을지를 모색하는 과제와 직면해야 했다.

그런데 세기말이 아닌 요즈음 인류 문명의 미래라는 화두가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철학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학이나 교육학 같은 학문 영역에서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단골주제가 되고 있고, 언론 매체들은 식상할 만큼 자주 이 주제를 입에 올리고 있다. 그 배경은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석유자원의 고갈과 그것이 야기하고 있는 공기와 물 오염 같은 환경위기이고, 원자핵무기와 발전소, 지진 같은 극심한 자연재해 또한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주요 배경으로 지목받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이런 위기 유발 요인들은 이제 막연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 파고드는 구체적인 것이 되고 있다.

인류가 처한 이런 위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린피스 같은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각자의 주제를 중심으로 노력하고 있고, 학계에서도 이 주제를 토론회 제목으로 삼아 현상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필자도 참여하고 있는 ‘경희대학교 인류문명사업단’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총체적인 위기 분석과 대안모색을 위한 지속적인 논의의 장은 물론 책 출간을 통한 공유 노력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삶의 의미 물음을 중심에 두고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고민한다는 우리 종교계가 이 화두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로 상징되는 우리의 제도종교계에서 이 절박한 화두에 대한 총체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기는 더 어렵다. 모든 종교는 현재의 삶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삼아 보다 나은 미래의 삶을 기획하고 제안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 종교계는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 문제를 소홀히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과 관련하여 다른 종교를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 불교계의 현황부터 분석해볼 필요성을 느낀다. 불교야말로 삶의 고통에 대한 직시(直視)를 근간으로 삼아 그 해소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현재와 이어지는 미래의 삶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인류 전체를 송두리째 없애버릴 수 있는 핵무기와 당장이라도 터져서 주변의 모든 유정물(有情物)을 숨 쉬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원자핵발전소. 그런 것들을 계속 소유하고 확대시킬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체념을 정당화하는 탐욕과 어리석음[無明]의 그림자를 직시해야 할 우리 불교계의 전반적인 무관심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일들 말고도 얼마나 관심을 가질 일이 많은 줄이냐 아냐고 힐난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일 말고 정말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를 생각해보았는지 되묻고 싶다. 요즘 유행하는 ‘뭣이 중헌디’라는 말을 자신과 불교계 모든 구성원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인류 문명의 미래에 대해 불교는 잠시 멈추고 서서 현재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 불교의 지혜를 우리 불교계가 헤아릴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미래는 물론 지구촌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미래 또한 빛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 말고 현재 집중하고 있는 다른 관심사들은 한 줌 모래알이거나 잠시 일어난 뜬구름 같은 것일 뿐이다.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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