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의 가르침을 남긴 법정 스님이 좋아하는 소설 중 한 권이 바로 프랑수아 를로르의 《꾸뻬 씨의 행복여행》이다. 이러한 사실은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문학의숲)에 수록된 50편의 책 중 《꾸뻬 씨의 행복여행》이 포함돼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꾸뻬 씨의 행복여행》에 대해 법정 스님은 《일기일회(一期一會)》에 실린 ‘행복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라는 제목의 여름안거 해제 법문에서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엊그제 행복에 대한 책을 한 권 읽었다. 지난여름 읽은 여러 책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기에, 이 자리에서 같이 음미하려고 한다. 실제로는 불행하지 않은데도 불행하다 여기는 환자들을 날마다 대해야 하는 한 프랑스 정신과 의사가 쓴 책이다. 무엇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가를 알기 위해 세계 여행을 떠난 그의 이야기는 마치 《화엄경》의 선재동자가 선지식들을 찾아 구도의 길에 나섰던 것과 같다.

이 정신과 의사는 새로운 교훈을 얻을 때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수첩에 메모를 한다. 이렇게 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난 덕에 그의 수첩에는 행복의 비결이 하나씩 기록되어 간다. 그 가운데 몇 가지 행복의 비결을 소개해 드리겠다.

행복의 첫째 비결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행복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라. 각자 자기 몫의 삶이 있는데 남과 비교하니까 기가 죽고, 불행해지고, 시기심과 질투심이 생긴다. 어떤 개인이라도 그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독립된 존재이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둘째, 행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사람은 행복해진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개체를 뛰어넘어 전체와 연결될 수 있으면 좋은 일이다.

셋째, 행복은 집과 채소밭을 갖는 것이다. 채소밭을 갖고 흙을 가까이하며 살아 있는 생명을 가꾼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자신의 땅은 아니지만 공터에 채소를 가꾸는 사람이 더러 있다. 무척 좋은 일이다. 자기가 뿌린 씨앗에서 싹이 트고, 떡잎이 나와 펼쳐지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뿌듯해진다. 주부들도 아파트 베란다에 상추나 쑥갓 등의 채소를 얼마든지 길러 먹을 수 있다. 그러면 늘 보살펴야 하니까 부지런해지고, 자연에 대한 고마움과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신비를 느낄 수 있다. 이는 닳아져 가는 우리 마음을 소생시키는 계기가 된다.

넷째, 행복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한 개인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유용해야 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사는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사람이기 때문에 관계 속에서 한몫을 하는 것이다.

다섯째, 행복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달려 있다. 같은 장미꽃을 바라볼 때 어떤 이는 ‘왜 이렇게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돋아 있나.’하고 불만스럽게 생각할 수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시에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달려 있네.’라고 고맙게 여길 수도 있다.

여섯째,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나 자신만의 행복은 근원적으로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나눌 때 행복은 몇 배로 깊어지고 넓어진다.

그가 수첩에 적어 놓은 행복의 비결은 이 밖에 더 있지만, 장황한 것 같아서 하나만 더 소개하겠다. 이 사람이 한번은 아프리카에서 친구의 초대를 받았다가 노상에서 강도를 만나 차를 빼앗긴다. 강도들은 의사 일행을 지하실에 가두고 어떻게 처리할까 옥신각신한다. 그런데 강도들의 우두머리가 의사의 몸을 수색하다가 주머니에서 의사가 적은 쪽지를 보고 그를 풀어 준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행복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우리는 늘 많은 시간 속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놀라운 가능성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만난 노승은 그에게 말한다. ‘진정한 행복은 먼 훗날에 이룰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항상 지나온 과거나 미래 쪽으로 달려간다. 지금 이 순간의 현장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이 순간을 회피하면 자기 존재가 사라진다. 늘 확실한 미래 쪽으로 눈을 팔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선택이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법정 스님의 다소 긴 문장을 이 글에 그대로 인용한 까닭은 이 글만큼 《꾸뻬 씨의 행복 여행》에 담긴 불교적인 교훈을 소개하는 내용도 없기 때문이다.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을 쓴 프랑수아 를로르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정신과 의사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육화가 잘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학적으로 정신병의 증세나 임상 결과는 늘어놓은 것은 아니다. 그저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정신병적 징후가 실은 마음의 병이고, 그 마음의 병은 탐욕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아주 쉽게 이야기 속에 용해시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와 유사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은 행복의 비결을 찾기 위해 주인공이 전 세계를 떠도는 로드로망 형식을 빌리고 있는 반면, 《공중그네》는 정신과 의사가 각 환자들의 이야기를 치료하는 옴니버스 형식을 빌리고 있다는 것이다. 법정 스님이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을 읽으면서 《화엄경》 〈입법계품〉의 선재동자를 떠올리는 것도 바로 로드로망의 형식을 빌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환자들의 심적 고통을 덜어주고 행복의 길로 인도해야 하는 정신과 전문의가 ‘자신은 행복한가?’ 하고 자문한 뒤 진정한 행복의 길을 찾기 위해 세계 여행을 떠나고, 그 여정에서 주인공은 식견 높은 전문가가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사를 통해서 행복의 길을 찾는다는 점에서 분명히 선재동자의 여정을 떠올리게 한다. 선재동자가 찾아다니는 선지식 중에는 불보살이나 비구, 비구니 스님만 있는 게 아니라 뱃사공 같은 노동자나 심지어 몸 파는 여자까지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소설 내용 중 인상적인 장면은 행복을 측정하는 연구의 전문가의 일화다.

행복을 측정하는 연구의 전문가는 꾸뻬 씨에게 행복을 측정하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해 들려준다. 첫 번째는 사람들에게 하루에 몇 번이나 즐거운 감정을 느끼는 지를 묻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삶이 만족스러운가를 묻는 것이고, 세 번째는 몰래카메라 등을 통해서 얼굴의 표정을 관찰하는 것이다.

전문가의 얘기를 듣고 꾸뻬 씨는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행복은 사물을 보는 방식에 있다.’라는 글귀를 수첩에 적는다.

꾸뻬 씨가 궁극적으로 깨닫는 것은 지족(知足)의 가르침이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남과 자신을 비교하기 때문임을 깨닫는 것이다.

불교의 유식학에 따르면 제7식인 말나식에는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네 번뇌가 있어 모든 고통을 만든다고 한다. 이 네 가지 번뇌는 기실 과도한 자기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는 《에고 트릭(Ego Trick)》에서 “당신이라는 사람은 이런 생각들이나 이런 생각들을 가진 그 무엇과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은 이런 생각들의 모음에 불과하다. 것이 바로 ‘자아의 속임수(Ego Trick)’의 핵심이다. 중앙통제소 따위는 없는 뇌에서, 실제로는 뒤죽박죽되어 혼란스럽게 이어지는 단편적인 경험과 기억들로부터 단일한 통합체라는 강력한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자아의 속임수이다. 자아를 이루는 단일물은 없지만 우리는 마치 그런 것이 있는 양 기능해야 한다.”라고 비꼬아 말했다.

줄리안 바지니의 주장인즉슨,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 교리가 현대 철학의 자아 연구와 놀라우리만치 일치한다는 점도 간파한다. 그래서 줄리안 바지니는 “우리가 세계 안의 어느 위치에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줄리안 바지니의 주장은 무상(無常)함을 알게 되면 절로 이 세상이 연기적 관계에 있음을 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현대인들이 앓는 정신병적 증후도 연장선상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소설 속 꾸뻬 씨가 깨달았다시피 많은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이유는 남과 자신을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는 과도한 자기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하는 자기라는 존재가 실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의 행복감은 59점으로 조사대상 143개국 중 118위를 기록해 거의 밑바닥을 기록했다. 행복은 경제성장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지족감과 비례한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한국인들의 행복감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프랑수아 를로르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행복해지는 방법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인간은 가까운 사람들과 누리는 좋은 관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자유로움, 사물에 대한 긍정적 인식, 건강한 신체상태가 유지될 때 지속적인 행복감을 느낀다.”

나와 남을 비교하는 삶은 경쟁사회를 조장하게 된다. 그럴 경우 결국 사회는 부처님께서 어릴 적 농경대전에 갔다가 목도했던 지렁이를 물총새가 쪼아 먹고, 그 물총새를 매가 낚아채가는 약육강식의 세상이 될 것이다.

이러한 약육강식의 세상을 벗어나기 위해서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룬 것이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상생과 순환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한다. 사바세계란 ‘인토(忍土)’ 즉, ‘인내하지 않고는 못 사는 곳’, ‘인내로써 고난을 극복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고락(苦樂)이 공존하지만 낙은 순간이고, 고(苦)가 훨씬 더 많은 곳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고(苦)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던 것이다.

고통의 삶에서 행복의 삶으로 전환하는 길은 부정적인 마인드에서 긍정적인 마인드로 전환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 속 꾸뻬 씨가 현대화된 중국의 한 광장에서 만난 다른 나라에서 온 가정부들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 이 여인들은 다른 중국인들과는 사뭇 표정이 달라 시간에 쫓기지도 않았으며 특히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꾸뻬 씨는 그들에게 다가가 왜 행복한 미소를 짓느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오늘은 우리가 쉬는 날이거든요!”
“우리가 행복한 건 친구와 함께 있기 때문이에요.”

이 여인들처럼 그저 하루의 휴일에 만족할 줄 알고,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하는 순간에 만족할 줄 안다면 그 순간순간이 어떻게 행복하지 않겠는가?

유응오 | 소설가, 전 주간불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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