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국은 야마토 정권 또는 북큐슈 후쿠오카 일대의 나라
일본서기에 보이는 모마리질지, 김제상으로 추정하기도


여하튼 아내와 이별한 김제상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얼른 귀국하고 싶었지만, 귀국해도 또 다른 업무가 부과될 것 같은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일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린 그는 왜국에 도착하자마자 거짓으로 “계림왕이 아무런 죄도 없이 제 아비와 형을 죽였으므로 도망하여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 이게 거짓인 듯하지만, 실제로 죽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고구려에 다녀오자마자 보낸 걸 보면 어차피 죽이려 사지에 보낸 것인데 살아서 돌아온 것은 아닐까? 역적의 아들이고 동생이었을텐데, 살아 있는 것을 보면, 김제상이 아버지와 형을 죽이는데 협조한 것은 아닐까?

왜왕은 이 말을 믿고 제상에게 집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였다. 이때 제상은 항상 미해를 모시고 해변에 나가 놀았다. 그리고 물고기와 새와 짐승을 잡아서 매번 왜왕에게 바쳤다. 왜왕은 매우 기뻐하여 조금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제상이 “지금이 떠날 만합니다.”하자 미해가 “그러면 같이 갑시다.” 하였다. 제상이 “만일 신이 같이 떠난다면 왜인들이 깨닫고 추격할까 염려됩니다. 바라건대 신은 이 곳에 남아 그들이 추격하는 것을 막겠습니다.”라고 했다. 미해가 “지금 나는 그대를 부형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나 홀로 돌아가겠소.”라고 하였다. 제상이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써 왕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하고는 술을 따라 드렸다. 이때 계림 사람 강구려(康仇麗)가 왜국에 와 있어서 그로 하여금 미해를 모시고 떠나보냈다.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서 이튿날 아침까지 있었다. 미해를 모시는 사람들이 들어와 보려 하였으나 제상이 나와 그들을 가로막으며 “미해공이 어제 사냥하느라 몹시 피로해서 아직 일어나지 못하십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저녁 무렵 좌우 사람들이 그것을 이상히 여겨 다시 물었다. 그제서야 “미해공은 떠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라고 하였다. 좌우 사람들이 왜왕에게 달려가 이를 고하자 왕이 기병을 시켜 그를 쫓게 하였으나 따라가지 못하였다.

이때의 왜국은 야마토 정권 또는 북큐슈의 후쿠오카 일대의 나라라고도 한다. 어디였을까? 《일본서기》 권49 ‘신공황후 5년(205)’ 조에 등장하는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를 제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제상의 기록과 약 200년의 시간차가 있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일본서기》 등이 몇 백 년씩 착란이 있었다고 보면 괜찮을 듯하다.

여하튼 김제상은 왜왕을 모시듯이 미해를 동생이나 아들처럼 잘 대해주고, 친해진 후 눌지왕의 다음을 기약했을지도 모른다. 낌새가 이상한 것을 안 눌지왕이 강구려를 보내서 시찰하게 한 것은 아닐까? 결국 이도 저도 안 되게 된 김제상이 아내와 딸들이라도 잘되게 하려고 스스로를 희생하려고 기도한 걸까?

이에 제상을 가두었다. (왜왕은) “너는 어찌하여 너희 나라 왕자를 몰래 보내었느냐?” 하자 (제상이) “나는 오로지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닙니다. 나는 단지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게 했던 것뿐입니다. 어찌 당신에게 보고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왜왕은 노하여 “이미 너는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감히 계림의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모두 쓸 것이다. 다만,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을 한다면 필히 후한 녹을 상으로 줄 것이다.” (제상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겠다.” 하였다.

오형은 중국 고대의 5가지 형벌로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나온다. 피부에 먹물로 자자(刺字) 하는 묵, 코를 베는 의, 발뒤꿈치를 베는 비, 성기를 절단하는 궁, 목을 베어 죽이는 대벽을 오형이라 하였다. 《사기》를 쓴 사마천이 궁형을 받은 것은 매우 유명한 일이다. 여하튼 이 다섯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충분히 힘든 일인데 모두 하겠다니, 참으로 무지막지한 일이다. 정말 왜왕이 화가 났나보다. 그런데 왜국의 신하라고 하면 용서한다고 한다. 왜 그럴까?

왜왕은 김제상을 좋아했을까? 정말 총애했고, 하루가 지나서 미해가 사라진 것을 보고 매우 배신감을 느꼈던 것일까? 실제로 김제상이 왜왕에게 “전 영원히 왜왕의 신하이옵니다”라고 했으면 살려줬을까? 아무리 봐도 그럴 것 같지 않다. 미해와 강구려가 떠난 이상 김제상은 살 길이 없다. 아무리 살려준다고 해도 목숨을 애원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일편단심 같은 충심을 보이면 살길이 더 많지 않았을까? 그것까지 생각할 여념이 없었을지도 모르며,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김제상은 더 이상 참신하고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수 없었을 듯하다. 그래서 왜왕에게 ‘막말’을 한 것인 듯하다. 물론 사료가 전하는 내용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서 하는 말이다. 개돼지 소리까지 듣고 살려줄 왕은 거의 없다. 만약 살려줬다면 그 왜왕은 정말 무서운 왕일테고, 그런 왕이 그 당시 일본에 만약 있었다면 정말 생각하기도 끔찍하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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