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아버지는 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임종시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주사까지 맞았다고 합니다. 적당한 임종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서였다고. 큰아들과 손자가 아직 병원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과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약이 환자에게는 고통을 주는지 식은땀을 흘리면서 힘든 표정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친구 아버지는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2달여 중환자실에 있었습니다. 그동안 병원 규칙상 가족들도 못 만난 채 온갖 생명유지장치를 매달고 연명치료를 받다가 마지막에는 심장까지 억지로 뛰게 하는 주사를 맞고, 그리고 약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친구 아버지의 죽음의 모습은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죽음의 모습입니다. 죽음과 끝까지 싸우는 이 상황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일본, 2014)는 우리가 처한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죽음을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아름다운 죽음과 아름다운 삶에 대한 시와 같은 영화입니다. 죽음은 축제와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죽어가는 사람은 춤을 구경하고 노래를 들으면서 손으로 리듬을 탔습니다. 행복한 에너지를 안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주인공 소녀 쿄코(요시나가 준)의 엄마는 죽음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병원에 있다가 임종이 가까워지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서 죽음을 맞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임종이 다가오면 집으로 보냈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병원에서 죽고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는 게 관행이 됐습니다. 환자에게는 결코 좋은 시스템은 아니라는 걸 쿄코 엄마를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임종을 맞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 쿄코 엄마는 먼저 쪽마루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자연을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집 앞마당에 있는 보리수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올려다보고 손을 들어 바람을 느끼면서 엄마는 행복해했습니다. 자연을 느끼면서 죽음을 맞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사벽이 콘크리트인 병원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임종이 닥쳤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쿄코 엄마를 찾아와 노래를 불러주고 춤을 추면서 엄마를 배웅했습니다. 엄마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딸에게 “너무 행복하다”, “고맙다”는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엄마의 작별인사처럼 행복하고 고마운 죽음이었습니다.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주의 감독인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작품입니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첫 장편 영화인 <수자쿠>로 제50회 칸 국제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고, <너를 보내는 숲>으로는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감독은 그동안 ‘삶과 죽음’에 대해서 주로 다뤄왔는데 이번 작품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에서도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이 죽음을 경험하면서 삶에 대해 배워가는 성장드라마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쿄코의 엄마처럼 평화로운 죽음을 맞을 수 있을까요? 삶에 대한 애착이 있다면 절대로 이렇게 평화롭게 죽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기꺼이 수용했을 때야 가능한 죽음인 것입니다. 엄마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육지에선 병에 걸려도 계속 살고 싶어 한다니 참 힘들겠어.”

병원에서 죽어가는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쿄코 엄마가 말한 육지 사람에 해당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친구 아버지처럼 대부분 사람이 병원에서 온갖 생명 유지장치를 매단 채 약에 취해 정신없이 죽어갑니다. 3개월 시한부판정을 받은 환자를 10개월 더 살게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진통제가 필요한데, 진통제는 오래 쓸수록 내성이 생겨 나중에는 더 많은 진통제를 써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사실 몇 개월 더 살지만 그 동안 고통만 경험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환자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왜 이렇게 끝까지 버티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사회에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가치관이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터부시하기 때문에 죽음과 끝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모습과 달리 쿄코 엄마는 죽음에 대해서 초연했습니다. 엄마는 무녀였습니다. 사방이 바다인 섬마을에서 무녀의 역할은 중요한 편입니다. 신과 인간의 가교역할을 하면서 인간의 안녕을 기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반은 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엄마와 같은 무녀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친구 카이토(무라카미 니지로)는 말했지만 태어난 모든 것은 죽는다는 법칙에 따라 엄마도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엄마는 죽음을 매우 순응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엄마가 이렇게 죽음에 대해서 초연할 수 있는 이유는, 죽음에 대해 체념적이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싸우려 않는 것입니다. 죽음은 자연의 이치고, 인간은 자연에 대해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죽음 앞에서는 버둥거려봤자 소용없으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죽어, 신도 죽어.”

엄마가 죽음에 대해서 초연한 이유입니다. 매우 단순한 진리이지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을 엄마와 가족들은 너무나 잘 받아들였습니다. 임종을 앞둔 사람답지 않게 엄마와 가족들은 사소한 얘기를 나누며 즐겁게 웃고, 행복한 저녁식사를 하고, 또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 다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처럼 영화에서는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훨씬 낫다는 논리로 설명했습니다.

영화의 오픈닝에서 보면 한 할아버지가 마을의 보름 축제에 쓰일 염소를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염소 다리를 묶어 매달고 경동맥을 끊고 양동이에 피를 모으는 장면입니다. 소녀는 염소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영혼이 빠져나갔다고 말했습니다. 염소의 영혼이 가는 곳을 엄마는 신이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신이 있는 곳을 알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보내는 사람도 나름의 좋은 이유를 찾아내며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서핑은 말이지 먼 바다에서 생긴 파도의 마지막 부분을 받아들이는 거야. 그것과 하나가 된다고 할까. 마지막이니 엄청나게 큰 에너지이긴 하지. 그래서 그 에너지를 온 몸으로 받아들일 때 순간적으로 무의 상태가 돼. 고요의 상태랄까, 어쨌든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고요해지는 느낌이야. ‘이사’는 떠나버렸지만 그녀의 에너지는 최고였지. ‘이사’라는 파도는 내 속에서 내 인생 안에서 최고의 파도였어.”

소녀의 엄마가 떠난 후 아버지는 엄마에 대한 생각과 온기가 여전히 자신에게 남아있기 때문에 엄마가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죽음을 긍정했습니다.

소녀 엄마의 죽음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섬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도쿄에서 온 소년 카이토는 성장했습니다. 소년의 성장은 삶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죽음을 터부시할수록 삶에 집착하게 되고, 집착은 자유나 행복과는 거리가 먼 감정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수용하게 되면 삶에서 보다 열린 태도를 보이게 되고, 타인에게 관대해지고 자신도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누구나 죽는다는 엄연한 진리 앞에서 더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정리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엄마와 함께 섬마을 아마미에 온 카이토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비록 헤어졌다 하더라도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는 엄마에게 ‘더럽다’는 말도 했습니다. 카이토는 도시 아이답게 분별의식이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친구 쿄코 엄마의 죽음을 보면서 카이토는 엄마의 삶을 수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두려워하던 바다에서 수영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분별의식이 사라지고,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리고 행복해졌습니다. 죽음을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인다는 건 결국 잘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음’ 이라는 단어에 대해 쉬쉬할 것이 아니라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가 더욱 건강한 문화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는 이런 진리를 알려준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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