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후명 작가

윤후명의 《삼국유사 읽는 호텔》(랜덤하우스중앙)의 서사는 극히 단순하다. 1인칭 주인공인 ‘나’가 3박 4일의 평양 여행을 다녀온다는 내용이다. 분단 이후 최초로 서울에서 평양까지 육로를 이용한 여행에 참가한 주인공은 평양의 양각도 호텔에 머물면서 낮에는 평양 시내나 묘향산 등지를 여행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북한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북한 관광명소를 소개하는 내용이 주를 이뤄야 하는데, 《삼국유사 읽는 호텔》은 옛 애인인 M과의 회고담과 《삼국유사》에 대한 소개가 주를 이루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대부분의 윤후명 작품이 그러하듯 작가 자신으로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작가가 독자들에게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 역시 주인공과 M의 관계, 그리고 두 사람의 인연과 《삼국유사》의 관계를 통해 유추할 수밖에 없다.

먼저 M에 대해서 알아보자. 서점을 하다가 빈털터리가 된 M은 《문학예술사전》처럼 팔리지 않은 책을 싣고 주인공을 찾아왔고, 주인공은 M과 사랑에 빠지는데, 둘의 연애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게 고작이다. 그리고 첫 번째 겨울에는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다. 그리고 M은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소재한 인도의 다람살라로 떠난다. 주인공은 M과 자신의 관계가 잎과 꽃이 함께 할 수 없는 상사화와 같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의 M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이별로 인한 그리움이 아니라 시원의 향수로 이어지는데, 그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허왕후에 대한 전설이다.

그런데 문득 아름답고 신비하고 거룩한 노래들이 내 넋을 사로잡았어. 그 노래들이 이 산하의 허공을 맴돌고 있는 한 우리는 살아 있음에 경탄해야 하지. 꽃과 나무와 물과 달들이 어우러져 인간의 사랑과 믿음을 노래하는 세계이기도 해. 영원함을 일깨우는 그 속에 우리의 사랑이 자리하지 못하면 우리는 모든 희망을 잃을 거야. 그래서 나는 언젠가 돌아올 너를 기다리기 위해 지금 서울로 가고 있다고 굳게 믿어. 기다림이야말로 그 노래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빛나는 뜻, 사랑의 진정한 뜻이니까.
- 245쪽

이처럼 주인공은 옛사랑을 떠올리면서 ‘꽃과 나무와 물과 달’의 대자연, 그 영원의 세계가 인간의 사랑을 노래한다고 믿는다. 영원성은 윤후명 작가의 영원한 화두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윤후명의 작품은 시간론에 대한 탐구가 돋보이는데, 이 시간론은 ‘찰나에 깃든 영원성(無量遠劫卽一念)’, ‘영원이 깃들어 있는 찰나(一念卽是無量劫)’를 간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엄학(華嚴學)적이다.

게다가 《삼국유사 읽는 호텔》의 세 번째 단락은 양각도 호텔 셋째 날인데, 그 부제목이 ‘불교의 발자취’이다. 그런 까닭에 《삼국유사 읽는 호텔》은 불교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불교의 발자취’ 내용을 살펴보자.

묘향산으로 가는 날, 주인공은 한국의 5대 사찰 중 하나인 보현사(普賢寺)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보현사는 고려 광종 때인 968년에 세워졌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 대사가 의병을 일으킨 절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일행 중 한 사내가 “평양 개고기가 유명하다는데 말야.”라는 말을 하고, 이 말을 들은 북한 안내원이 “개고기가 이나라 단고깁니다.”라고 대꾸한다. 김일성 수령이 먹어보고 맛있어서 그렇게 부르도록 했다는 게 안내원의 설명이다.

이 순간 주인공은 묘향산의 이름난 보현사를 찾아가는 아침에 개고기 타령은 웬 말인가 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조주선사의 무자(無字) 공안에 대해 떠올린다. 보현사를 둘러보면서 주인공은 《삼국유사》에 명시된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내용을 떠올린다.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순도 스님에 의한 불교 전래, 384년 백제 침류왕 때 마라난타에 의한 불교 전래, 그리고 417년에 왕위에 올라 458년 세상을 떠난 신라 눌지왕 때 묵호자에 의한 불교 전래 등 삼국의 불교 전래를 차례차례 설명한 뒤 다시 이차돈의 순교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다.

이러저런 생각 끝에 주인공은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쓴 인각사(麟角寺)에 K와 함께 다녀온 것을 떠올린다. 인각은 ‘기린의 뿔’이라는 뜻이다. K와 헤어지고 나서 어느 날 문득 주인공은 기린의 뿔에 생각이 미쳤을 때 애기똥풀꽃이 가득 피어 있는 인각사 뒤란이 바로 기린의 뿔이라는 엉뚱한 믿음을 갖게 된다. 자취 없는 자취는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지나치는 사람마다 함부로 두드리는 종소리, 그 고철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주인공은 마음이 상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하는 수 없이 《삼국유사》에 실린 자장, 원효, 의상 대사의 일대기를 떠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자장, 원효, 의상 대사 모두 분황사와 인연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언젠가 M과 함께 분황사에 가서 네 마리 사자가 에워싸고 있는 전탑 앞에 나란히 섰던 것이 떠오른다. 그러자 분황사에서 상사화를 보면서 “잎이 먼저 돋았다 진 다음 맨땅에서 꽃대만 올라와 피는 꽃. 잎과 꽃이 서로 만날 수 없어서 그리워하기 때문에 지었다는 상사(相思)라는 이름. 그 꽃을 보며, 비록 서로 만날 수는 없을지라도 상대방을 그리워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도 사랑의 완성에 값하는 길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던 것마저 떠올리게 된다.

저녁에는 개고기를 먹고 나서 양각도 호텔로 돌아와 양의 뿔〔羊角〕과 기린의 뿔〔麟角〕, 그 호응이 우연 같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린의 뿔은 외뿔, 즉, 한자는 독각(獨角)이 되고 이것은 홀로 깨닫는다는 독각(獨覺)이 된다는 일종의 언어유희를 즐긴다. 깊은 밤은 술에 취한 주인공은 M에게 편지를 쓴다.

우리 함께 들었던 신라의 범종소리를 듣는 거야. 그건 언제나 내 귓속에 담겨 있으니까. 부석사에서 우리는 범종이 울리는 소리에 부끄러워 했었지. 우리가 이기심의 나날을 보내는 동안에도 종은 피안의 소리를 울린다고 말야. 그런데 보현사의 종은 깨진 소리로 울면서 대동강을 건너오고 있어. 깨져서는 안 될 게 있다는 거야. <중략> 우리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상사화처럼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고. 그러나 궁극적으로 깨져서는 안 된다는 게 종소리의 가르침이야. 여기는 평양이야.
M. 티베트의 범종소리가 다람살라에서 들려온다. 그곳에도 네 마리 사자가 바라보는 세상이 있을까. 네 마리 사자가 지키는 분황사 같은 집을 짓자던 우리의 꿈을 되새기고 있을까.
- 207~208쪽에서

윤후명 작가 특유의 몽환적인 문체미학으로 마무리되는 양각도 호텔 셋째 날 이야기는 《삼국유사》는 사(史)가 아닌 사(事)의 기록임을 일깨워준다. 여정의 첫 머리에 주인공이 M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역사의 향기를 우리의 만남 안에 불어넣으려는 욕심을 가졌다”고 고백하는 것도 연장선상에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주인공과 M의 사랑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자연의 찬탄을 받는 영원한 사랑이 될 수 있는 것은 단군시대에서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삼국유사》라는 시원의 세계를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의 일〔事〕들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리라.

유응오 | 소설가, 전 주간불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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