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국 차(茶)의 전래(傳來) 와 티베트인의 음차(飮茶) 배경

티베트에 차가 전래된 시기와 그들의 음차 기원에 대해서는 상세한 역사문헌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당나라 문성공주가 티베트왕국으로 출가한 시기를 통상 중국 차의 전래 시기와 티베트인들의 음차 기원으로 삼고 있다. 물론 각종 문헌의 서로 다른 기록으로 말미암아 학자들 간에 이론(異論)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아직은 정확한 고증(考證)의 방법이 없으므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시기(문성공주가 티베트로 출가한 시기)를 잠정적인 정설(定說)로 삼고 있다.

티베트고원 지대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티베트인들에게 있어 차(茶)는 매우 절실한 생활필수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생명(生命)의 약(藥)처럼 중요시되어 왔다. 그 이유는 대략 다음의 세 가지로 집약해 볼 수 있다.

첫째, 티베트인들은 유(乳)・육류(肉類)를 주식(主食)으로 하는 유목민족(遊牧民族)으로서 고원의 환경적 문제로 인해 야채나 과일의 재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채소나 과일을 섭취하는 것은 아주 요원한 일이었다. 티베트 고원의 대부분 지역은 해발 3,000미터 이상인데다가 평균 온도가 0℃ 이하기 때문에 농업보다는 목축업이 비교적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야채나 과일 대신 차(茶)를 마심으로써 인체(人體)에 필요한 식물성의 영양소를 대신 섭취하게 되었다.

둘째, 티베트 고원은 공기(空氣)가 매우 희박한데다가 기압이 낮고 기후가 건조하며 연평균 상대 습도가 40%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인체에 충분한 수분을 별도로 공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수분 섭취와 과일이나 야채 등을 대신해서 비타민을 섭취하는 방법으로 차를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티베트인들이 마시는 하루의 음차량(飮茶量)은 거의 30~40그릇에 달하는데, 이 양은 약 5~7리터 정도에 해당하는 양으로서, 하루 세 끼 식사 때마다 거르지 않고 마시는 음차의 양을 제외하고라도 평소 얼마나 많은 양의 차를 마시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차(茶)는 여러 가지 생리(生理) 활성분 및 비타민、아미노산 등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의약(醫藥)이 비교적 낙후된 티베트 지역의 티베트인들에게 있어서는 잡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약품과도 같은 것이다. 실제로 티베트의 의약전적(醫藥典籍)에는 차(茶)가 감기, 풍한(風寒)과 설사, 복통 등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좋은 양약(良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 대략적으로 살펴본 이 세 가지 주요 원인들은 마침내 티베트인들을 하루도 차(茶)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불가일일무차이생(不可一日無茶以生)’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이러한 티베트인들의 차(茶)에 대한 절실한 요구는 때마침 군마(軍馬)의 수요가 시급했던 중국과 그 조건이 잘 부합되었다. 이러한 서로의 필요성에 의해 한장(漢藏) 차마무역(茶馬貿易)은 당대(唐代)로부터 송(宋), 원(元), 명(明), 청(淸)에 이르기까지 수대에 걸친 왕조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천여 년 동안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4) 강압과 회유의 명대(明代) ‘차마무역’ - 명대의 ‘차발마제도(差發馬制度)’와 ‘조공호시(朝貢互市)’

명조(明朝)는 당(唐)・송(宋)・원(元)을 이어 새롭게 등장한 강력한 중앙통치왕조이다. 특히 원(元)나라가 티베트〔당시의 우쓰장(烏思藏)〕를 중국의 영토 내에 정식으로 귀속시킨 후, 명나라의 중국 내지와 변강지역(邊疆地域) 간 무역은 방식과 제도 그리고 그 내용에 이르기까지 전대에 비해 매우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당시 명나라는 비록 원나라 때 영토를 그대로 계승하지는 못했지만 차마무역(茶馬貿易)을 통해 정치·경제·문화 교류 등 다방면(多方面)에서 티베트를 자신들의 세력권 안으로 귀속시키려는 통치 의지를 집중적으로 구현시켜 나간다. 명대에 계속 이어지는 한 장 차마무역의 관계는 얼핏 보면 일종의 단순한 경제활동에 불과하지만, 사실 그 배경 속에는 명(明) 황제가 티베트를 통치·지배하려는 정치적 의도(意圖)와 야심(野心)이 더욱 짙게 깔려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명대의 한장 차마무역 진행 과정에서 가장 특이할 만한 점이라면 바로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차마무역 제도인 ‘차발마제도(差發馬制度)’의 시행이다. 각종 문헌기록에 의하면 ‘차발(差發)’은 부렴(賦斂), 즉 부세(賦稅)를 의미한다. 명나라는 바로 이 ‘차발마제도’를 통해 티베트인들에게 말(馬)을 세금으로 상납하게 하고 그 대가로서 차(茶)를 하사품으로 주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명나라가 세금으로 말을 받고 대가로서 차(茶)를 지불했다는 것이다. 이는 차발마제도가 표면상에 있어서는 분명 부세제도(賦稅制度)였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이차역마(以茶易馬)의 무역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명대(明代)가 전대의 당(唐・송(宋)과 현저히 다른 점은 그것을 부세의 형식으로 제도화시켰음은 물론, 차마무역(茶馬貿易)의 주동권(主動權)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이다. 이는 명나라 전기(前期)의 차마무역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무역의 방식이 되며, 역대 차마무역의 획기적인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문헌에 기록된 당시의 교역량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차발마제도’가 막 시행되었던 명 태조(太祖) 25년(1392년), 티베트에서 ‘차발마’ 1만 340여 필을 상납하고 하사받은 차(茶)는 고작 30만여 근에 불과하였다.1) 이를 환산해 보면 말 1필과 차 30근을 맞바꾼 것이며, 이는 차발마제도가 아직 시행되기 전인 명 초기에 말 1필에 차 1,800근을 지불한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2) 이것이 바로 명나라가 바라는 차발마제도 시행 목적이었다.

그러나 차발마제도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던 실행 초기(初期)라 변방의 관리들은 직권을 남용하고, 조정(朝廷)의 명의(名義)을 내세워 티베트의 말을 개인적으로 착복하는 등 부정부패(不正腐敗)가 빈번히 행해지곤 하였다. 그래서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를 방지하고 차발마제도의 정상적인 운영과 공정성을 위해 홍무(洪武) 26년(1393)에 드디어 동질(銅質)의 ‘금패신부(金牌信符)’라는 것을 제작하여 티베트 각 부족의 수령과 승려들에게 발급해 주었다.3) 이것은 우리나라 조선시대 마패(馬牌)의 성격과 흡사한 것으로서, 티베트의 각 부족들이 변방으로 파견된 관원들에게 말을 상납하거나 차를 하사받을 때 자신의 금패와 관원의 것을 반드시 대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탐관오리에게 속아서 말을 상납하는 일을 방지함은 물론 티베트의 말이 탐관들에 의해 내륙으로 밀수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封鎖)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헌에 의하면 금패신부(金牌信符)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상단 일행에 ‘황제성지(皇帝聖旨)’, 하단의 좌측 일행에는 ‘합당차발(合當差發)’, 그리고 하단의 우측 일행에는 ‘불신자사(不信者死)’”라고 새겨져 있다. 또한 문헌에는 여기에 덧붙여 “ ‘호시(互市)’라고 이르지 않고 ‘교역(交易)’이라고도 이르지 않으니 이를 일러 ‘차발(差發)’이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4) 이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자면, 명대에 황제의 성지로 개정된 한장 다마무역은 ‘차발(差發)’이라 함이 합당하다. ‘차발(差發)’이란 곧 ‘부렴(賦斂)’을 뜻한다. 다시 말해 티베트의 말을 의무적인 세금의 명목으로 거둬들인다는 것이다. 이를 의심하여 믿지 않고 제멋대로 차와 말을 교역하거나 밀반출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는 뜻이다. 실지로 차발마제도의 차법(茶法)은 매우 엄격하여 황족 및 그 인척이라도 이를 어길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태조 주원장의 부마(駙馬)였던 구양윤(歐陽倫)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법을 어기고 몰래 차 거래를 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에 처해졌다.5) 그리고 금패신부의 명문(銘文)과 문헌에서 부연(敷衍) 설명한 기록 속에서 우리는 명나라가 차(茶)를 이용해 티베트를 자신들의 통치권 아래로 완전히 귀속시켜 군신(君臣)의 관계를 확립하려는 철저한 정치적 의도와 목적을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다.

주) -----
1) 《明太祖實錄》卷215, (洪武25年5月甲辰條).
2) 《明史》卷80〈食貨志,茶法〉, 214쪽.
3) 《明太祖實錄》卷225, (洪武26年2月癸未條).
4) 明․張縉彦,《菉居封事》卷2,〈馬政疏第四(復金牌)〉, 42~43쪽.
5) 《明太祖實錄》卷235, (洪武30年6月己酉條).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p-chon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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