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한 달간 우리 선학원은 만해 스님 추모사업을 치르느라 무척 분주했다. 8일 서울 성북동 정법사에서 열린 학술제를 시작으로, 18일 국립극장 내 KB 하늘극장에서 열린 예술제, 29일 AW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추모재와 전국 청소년 문예공모전에 이르기까지 네 가지의 행사를 한 달 사이에 다 치러냈다. 이번 주제는 ‘거짓의 시대, 만해를 생각한다’였다.

정의가 사라지고, 진실이 가려진 슬픈 시대-
절망에서 희망을 건진 선각자,
만해! 그의 향기가 그립다!

이 시대를 ‘거짓의 시대’로 규정하고 만해 스님의 가르침을 상기해 보자는 의미에서 우리 선학원이 올 행사의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암울한 시대의 선각자 만해 스님이라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사자후를 토해낼까, 생각해 보자는 의도이다.

아마 지금 이 시대가 ‘거짓의 시대’라는 데는 어느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거짓’이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봤을 때, 안팎은 상응(相應)한다. 한 번 살펴보자. 불교계는 청정한데도 사회 전반에 부정부패가 넘쳐난다? 반대로 사회가 아름답고 깨끗한데도 불교계만 썩었다? 그럴 리가 없다. 각 분야가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서로 물려 돌아가고, 세상이 인드라망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세상일은 놔두고 불교계에 한정해 보자. 그럴 경우엔 멀리 볼 것도 없다. 우리 <불교저널>만 펼쳐도 불교계의 갖가지 거짓과 추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난 신문 1면에는 동국대학교 새 이사장이 선출된 기사가 장식하고 있다. 그의 이력을 보면, 특별한 것 없이 평범하지만, 지난해 호계원장으로서 94개혁으로 멸빈된 서의현 전 총무원장의 징계를 감면함으로써 ‘반개혁’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그런 스님이 이사장으로 낙점된 이유가 현 권력자와 ‘깊은 인연관계’ 때문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그 권력자가 자신의 앞길을 닦아주는 소임을 맡기기 위해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많은 사부대중은 의심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국대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불교학교’가 아니라 권승들의 ‘전리품’이나 ‘먹이’라는, 슬픈 현실을 본다.

전국비구니회가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제도 논의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는 보도도 있다. 비구니 스님들은 지역사부대중 100인 대중공사를 통해 모인 의견을 보며 “종도로서의 기본적 권리마저도 제약받는 소외된 존재”라는 점을 안타까워하면서 “종단의 참종권은 기본 권리로서 반드시 존중되어야 하며, 종단개혁의 연장선상에서 실현되어야 할 중대한 사안”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전국비구니회 스님들은 우리 절집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지만 그건 그냥 한 번 해보는 말일 뿐 절박함도 없고, 그런 왜곡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다. 그저 권력자의 ‘하해(河海)와 같은 성은(聖恩)’을 기다릴 뿐이다. 극소수(極少數)의 눈뜬 비구니들이 있다는 걸 확인하는 정도가 다다. 오직 그것뿐이다.

종회 소식도 있다. 지난 6월 21일에 열린 조계종 중앙종회에서는 총무원장 선출제도 혁신특별위원회가 제안한 ‘총무원장 선출에 관한 법’ 제정안을 차기 회의로 이월하는 한편 직선제 여론을 수렴할 ‘총무원장 직선 선출제 특별위원회’ 구성도 결의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혁신특위와 직선제특위가 각각의 안을 마련한 후 종회에서 다시 논의하게 된다고 한다.

혹자는 선거인단을 706명으로 제한하는 ‘염화미소법’에 바탕을 둔 ‘총무원장 선출제도 혁신특별위원회’의 안(案)을 내면서 ‘총무원장 직선 선출제 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킨 것을 두고 희망을 말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그런 걸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다. 두고 보라. 현재 종단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은 어떤 경우든 직선제를 수용하지 않는다. 여론에 밀려 선거인단을 확대하는 안을 내놔봤지만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마지못해 내민 카드가 직선제특위라는 걸 알만 한 사람은 다 안다. 물타기용이고 여론 호도용일 뿐이다.

그만하자. 이런 사례를 하나하나 열거하려면 끝이 없을 테니까 만해 스님이 만약 이 시대에 다시 오셔서 이런 상황을 맞닥뜨렸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그걸 유추해 보기 위해서는 먼저 만해 스님이 살았던 시대를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한다. 고은 시인은 《한용운 평전》에서 그 시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선 후기는 상류 계층의 사류(士類) 사회가 관료의 타락으로 부식되기 시작한다. 더구나 조선 당쟁은 한말의 외척 정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온 악덕의 순환이었다. 왕은 허수아비였다... 이런 사회를 따라 산간의 불교계인들 독자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들 역시 삼계도사(三界導師)를 입으로 지껄일 뿐 세속의 양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하층 무뢰한, 구걸(求乞) 집체(集體)를 이루고 있거나 몇 승려의 이재력(理財力)은 사재(寺財)와 정재(淨財)를 횡령하는 일이 헤아릴 수 없었다. 거기에 작첩(作妾)의 풍속이 늘어나고... 송주(誦呪) 암송이나 할 줄 아는 무식한 계층이 증가했다.”

오늘날 한국불교계의 이야기라 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만해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통해 다음과 같이 탄식(歎息)하고 있다.

“오늘의 세계는... 학술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정치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종교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그밖에도 각 방면에서 유신을 부르짖는 소리가 천하에 가득하여 이미 유신을 했거나 지금 유신을 하고 있거나 장차 유신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잇따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조선의 불교만은 유신의 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으니, 모르겠다. 과연 무슨 징조일까. 조선 불교는 유신할 것이 없는 탓일까, 아니면 유신할 만한 것이 못되는 까닭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만해 스님이 쓴 ‘유신(維新)’이라는 용어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연상케 하는 표현이라는 이유로 적잖은 논란이 있다. 《조선불교유신론)》이 1913년에 간행되었으니 일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은 자명(自明)하다. 만해 스님이 이 표현을 쓴 것은 아쉬움이 크지만, 당시의 유행어 정도로 이해한다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무튼 만해 스님이 썼던 ‘조선불교의 유신(維新)’을 ‘한국불교의 개혁(改革)’으로 바꾼다면 오늘날의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만해 스님이 만약 거짓과 기만(欺瞞)으로 점철된 이 시대로 다시 오신다면 저 권승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一喝)하지 않을까.

“온 나라가 개혁의 화두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유독 불교계만은 개혁의 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는다. 모르겠다. 과연 무슨 징조일까. 한국불교는 개혁할 것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개혁할 만한 것이 못되기 때문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6월 만해의 달을 보내며 만해 스님을 생각한다. 한국불교를 생각한다.

-본지 편집인 · 재단법인 선학원 교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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