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원

돌아가자 歸去來兮
전원이 황폐해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는가 田園將蕪胡不歸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는 이렇게 단호한 의지를 드러내며 시작한다. 고향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이 유명한 시에 얽힌 고사가 전설처럼 전한다. 도연명이 평택(平澤) 현령(縣令)을 하고 있을 때였다. 몇 번이나 관직에 드나들다가 41살에 겨우 현령 자리를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마침 군에서 파견한 감독관이 도착하자 아전이 도연명에게 의관을 갖추고 영접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자 도연명이 “내 어찌 쌀 다섯 말 때문에 시골 애송이에게 허리를 굽히겠느냐.” 하고는 즉시 현령 자리를 내놓고 귀향길에 나서며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옛날의 귀족들이 그렇듯 도연명도 먹고살만하니까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도 해봤다. 도연명의 증조부는 진(晉)나라의 명장인 도간(陶侃)이며, 외조부는 당대의 명사였던 맹가(孟嘉)라고 하니, 물려받은 재산 또한 많았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는 정말로 가난했다. 호기롭게 현령의 인끈을 집어던졌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지난날 오랜 굶주림에 괴로워 疇昔苦長飢
쟁기 내던지고 벼슬길에 나갔다 投耒去學仕
가족 부양하느라 절개 지키지 못하니 將養不得節
춥고 배고픔이 참으로 나를 얽매었다 凍餒固纏己

〈음주(飮酒)〉란 연작시 중 19번째 시의 일부이다. 이 시에 따르면 도연명은 젊어서부터 매우 가난했고, 벼슬은 호구지책이었던 것 같다. 그의 시 곳곳에 가난이 넘치다. 아마도 삼국시대(三國時代)와 위진 시대(魏晉時代)라는 난세를 지나며 집안이 몰락했거나, 혹은 본가에서 멀어지며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여튼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명분을 내걸고, 쌀 다섯 말에 절개를 꺾었는데....... 타고난 성격을 누가 고치랴. 사표 내던지고 다시 벼슬하기를 되풀이하였다. 그러다가 평택 현령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낙향한다. 이후 가난은 이 고집 센 시인의 분신처럼 죽을 때까지 따라 다녔다.

2. 마음 밭

이제껏 마음은 육신의 부림을 받아 왔다 旣自以心爲形役
어찌 애처롭게 홀로 슬퍼하고만 있는가 奚惆愴而獨悲
지난 잘못은 탓할 수 없지만 悟已往之不諫
앞으로 올 일은 좇을 수 있다 知來者之可追
실로 헤맨 길이 아주 멀리 간 건 아니다 實迷塗其未遠
이젠 알겠노라 지금이 옳고 어제가 틀렸음을 覺今是而昨非

마음이 육신의 부림을 받았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그저 등 따습고 배부르기 위해 자존심 버리고 살았다는 말인가? 그러기에는 결기어린 귀향 선언이 너무 거창하다. 조선의 허균(許筠)은 이 시를 화운하며, “비록 높은 처마와 높은 기둥, 좋은 음식과 화려한 자리라도 마치 형틀에 사지가 매여 있는 것 같고, 몸은 지옥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적어도 고대광실(高臺廣室) 산해진미(山海珍味) 정도를 포기할 수 있어야 폼 나지 않겠는가.

초(楚)나라 위왕(威王)이 장자(莊子)가 현인이라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후한 예물로 맞으며 재상(宰相)을 삼으려 하였다. 장자는 웃으며 초나라 사신에게 말하였다.

“천금(千金)은 큰돈이고 재상은 높은 자리입니다. 그대는 큰 제사를 지낼 때 희생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하였소? 몇 년간 잘 먹이고선 고급스런 수가 놓인 옷이 입혀져 제사지내는 태묘(太廟)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때를 당하여 차라리 하찮은 돼지가 되고자한들 어찌 그럴 수 있겠소? 그대는 속히 돌아가시오. 더 이상 나를 모욕하지 마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거워할지언정, 나라를 가진 자들에게 재갈을 물리지는 않을 것이오. 생을 마칠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뜻을 즐길 것이오.”1)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 임금 아래 가장 높은 자리. 부귀와 영화, 명예와 권력.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그런 자리가 되어야 거절이 거절답지 않은가. 은자(隱者) 중엔 이은(吏隱)도 있는데 말이다. 이은이란 낮은 벼슬자리에 숨어 사는 사람이다. 화광동진(和光同塵). 빛을 숨기고 세속과 섞이는 경지.+ 이은이야말로 진정한 은자의 풍모를 엿보게 한다면, 평택 현령 자리는 너무도 좋은 자리이다.

도연명이 이 시를 썼을 때가 41살임을 다시 상기해 보자. 40살을 불혹(不惑)이라고 하는데, 41살에 지난 인생이 모두 잘못되었다면, 분주히 마음고생만 하며 살았다는 얘기겠다. 재갈이 물리고 고삐에 꿰인 채,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생을 이 자존심 강한 시인은 견디기 어려웠으리라. 지위가 높고 낮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안 누리고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내 마음이 어디에서 언제까지 헤매어야 하는지가 문제일 따름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심전(心田, 마음 밭)이라고 한다. 수행을 밭갈이에 비유한 말이니, 마음을 밭갈이하듯 잘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겠다. 허균의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화답하다〉에도 “집 뒤뜰 마음 밭 다스려 밤낮으로 부지런히 가꾸리라”고 하였다. 그렇게 본다면 도연명이 그토록 돌아가자고 외쳤던 전원은 곧 마음이다. 잡풀과 쑥대 걷어내고 국화며 솔이며 가꾸고 싶은 마음이다.

3. 어미

돌아가기를 좋아한 사람이 시인 중에 도연명이었다면, 철학자 중에는 노자(老子)이다. 《노자》에는 돌아간다는 뜻의 복(復)이나 귀(歸) 자(字)가 자주 나온다. 《노자》는 《도덕경(道德經)》이란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 책 또한 세상에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노자가 세상이 혼탁해짐을 알고 은거하고자 함곡관(函谷關)으로 향했다. 때마침 함곡관을 지키던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노자에게 “선생님께서 이제 은거하시려고 하는데 저를 위해 글을 남겨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자, 노자가 상하 두 편의 책에 도(道)와 덕(德)의 뜻을 오천여 글자로 남기고 떠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최후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사마천이 《사기》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훗날에는 여기에 살이 붙어 노자가 푸른 소를 타고 함곡관으로 오는데 윤희가 자기(紫氣)가 서림을 보고 현인의 은거를 알았다는 등등의 내용이 첨가되며 시인묵객들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만물이 뒤섞여 있으니 천지에 앞서 생하였다.……천하의 어미가 될 수 있다.2)

유물혼성(有物混成), 만물이 뒤섞여 있다는 이 말은 아직 만물이 분화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만물이 고하장단(高下長短) 선악미추(善惡美醜)로 구별되지 않고 한데 뭉뚱거려 있는 상태를 우주의 시초, 즉 천지에 앞서 생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시원을 천하의 어미라고 표현했으니 그 상상력은 시인을 능가한다.

이 우주의 시작은 어머니에 비유할 수 있다. 어머니가 있으면 반드시 자식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만물의 어머니에게 돌아가3) 지키면 몸을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으리라. 입을 막고 귀를 닫아라. 외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는 게 곧 어머니에게 돌아가 지키는 길이다. 온갖 감각기관을 열어놓고 판단한다면 죽을 때까지 구제할 수 없다.

어머니가 유물혼성을 비유한다면 자식은 분화되는 만물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청홍백흑(靑紅白黑) 도레미파, 삼라만상의 들쑥날쑥한 모습에 우리는 눈과 귀를 빼앗긴다. 결국 그 아름다움에 미혹되고 그 맛에 빠져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길을 잃고 만다. 그래서 노자는 돌아가라고 외친다.

그 뿌리로 돌아간다 復歸其根
소박함으로 돌아간다 復歸於樸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復歸於嬰兒
만물의 구별이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 復歸於無物
무극으로 돌아간다 復歸於無極

뿌리, 나무토막, — 소박함을 뜻하는 박(樸) 자는 본래 아무런 가공이 되지 않은 나무토막을 가리키는 말이다 — 어린아이 등등의 말은 인공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를 나타낸다. 시비선악(是非善惡) 장단미추(長短美醜)로 분화되지 않는 원시 그대로의 이미지. 바로 모두를 품어주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무물(無物)은 만물의 차별상이 없다는 말이고 무극(無極)은 끝이 없다는 말이니, 이는 어떤 자식이라도 차별하지 않는 어머니의 무한한 포용력, 그 큰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겠다.

계곡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러 현묘한 암컷이라고 한다. 현묘한 암컷의 문, 이를 일러 천지의 뿌리라고 한다.4)

계곡 신, 현묘한 암컷은 의심할 바 없이 어머니의 다른 표현이다. 어머니의 문을 통해 만물이 나오니 어머니는 우주의 시원이며, 뿌리이다. 이런 표현들로 해서 노자철학을 모계사회(母系社會)의 전통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다. 틀린 주장은 아니다. 노자 철학은 분명히 모계사회의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노자가 계곡, 현묘한 암컷, 어미 등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말하고자 하는 건 다름 아닌 생명력이다. 생각해 보면 이 우주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끊임없이 낳고 또 낳으며 생명이 이어진다. 지구환경 자체를 생명현상으로 이해하려는 가이아 이론도 노자 옆에 가면 그 빛을 잃는다. 놀라운 일 아닌가. 그 엄청난 생명력을 과학이라는 이름의 보잘 것 없는 숫자로 환원시켜 놓고는 큰일을 해낸 것처럼 으스대는 우리가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 메마른 의식이 두려울 뿐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돌아가자. 눈과 귀를 감고 조용히 마음 속 깊이 들어가 보자. 2500년 전에 이미 전수받은 가르침인데..... 어차피 안 될 줄 알고 노자는 은거했는지도 모르겠다.

4. 새들은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 안다

이 철학卍행 시리즈 제4회 〈어머니 신에서 아버지 신으로〉에서 어떻게 여신의 시대가 저물고 남신의 시대가 열리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5회 〈영웅시대가 열리다〉에서는 신화 속 괴물들, 예컨대 메두사, 히드라, 키마이라, 스핑크스 등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이들 괴물들은 대개 이종합체(異種合體)로, 인간과 동물, 날짐승과 들짐승 등이 한 몸에 뒤엉켜 있다. 흉측한 모습은 여자의 음욕이나 질투 같은 부정적인 여성성을 나타내며, 그 결과의 부산물인 괴물들은 영웅 — 물론 남자 영웅이다 — 에 의해 퇴치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본격적인 남성 중심의 문명사회로 진입하면서 여성성이 부정되고 왜곡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알레고리였던 것이다.

복희씨 신농씨 떠나간 지 오래되어 羲農去我久
세상은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이 적었다 擧世少復眞
노나라 공자 성급히 서둘러 汲汲魯中叟
그 순후함으로 미봉하니 彌縫使其淳
봉황은 비록 이르지 않아도 鳳鳥雖不至
예악이 잠시 새로워졌다 禮樂暫得新
노(魯)나라 강가에 미약한 울림은 멎고 洙泗輟微響
진(秦)나라 광기에 천하가 표류해서는 漂流逮狂秦
시서(詩書)가 무슨 죄가 있다고 詩書復何罪
하루아침에 잿더미를 만들었다 一朝成灰塵
구구절절 여러 노성한 이들이 區區諸老翁
참으로 부지런히 노력했는데 爲事誠殷勤
어찌하여 성인에게서 멀어진 세상이 되어 如何絶世下
육경(六經)과 친한 이 하나도 없나 六籍無一親
종일토록 수레를 몰고 다녀도 終日馳車走
나루터 묻는 이 볼 수가 없다 不見所問津
만약에 흔쾌히 술 마시지 않는다면 若復不快飮
머리에 쓴 건(巾)을 부질없이 저버리는 것 空負頭上巾
다만 한스러운 건 잘못 살아온 지난 인생 但恨多謬誤
그대는 마땅히 취한 사람 용서하시라 君當恕醉人

〈음주(飮酒)〉의 마지막 20번째 시이다. 여기에서 도연명은 먼 상고시대의 소박하고 순수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세상은 광포해지고 진리를 찾는 이 적어짐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세상은 더 풍요로워졌어도 마음 밭엔 잡풀만 우거졌다. 세상은 더 화려해졌지만 생명력은 고갈되어 갔다. 문명의 이름으로 어머니인 자연에 말뚝을 박고 기둥을 세웠다. 그러니 이젠 그만 접고 돌아가자고 읊을 만하다.

구름은 무심히 산굴에서 나오고 雲無心以出岫
새들은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 안다 鳥倦飛而知還

조금 힘 있다 싶으면 영웅호걸을 자처하는 무리들이 부귀영화를 쫓고 권력을 탐하며 세상을 혼란 속으로 몰고 갔다. 도연명이 살던 위진 시대는 더욱 심하여 자고 일어나면 황제가 바뀌어 있었다. 지금이라 하여 다를 것도 없다. 많이 가진 자든, 조금밖에 못 가진 자든, 치열한 경쟁 속에 지쳐가긴 마찬가지다.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그만둘 때쯤이며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다. 고군분투하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우리는 늙어간다. 이제 어디에 가서 쉴 수 있을까? 어디로 가야 지친 날개를 접을 수 있을까? 마음 밭의 잡초는 더 황폐해지는데, 돌아갈 고향은 보이지 않는다.

주) -----
1)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
2) 《도덕경(道德經)》
3) 돌아가 : 《도덕경(道德經)》 원문의 ‘복수기모(復守其母)’에서 ‘돌아갈 복(復)’ 자를 많은 학자들은 ‘다시 부(復)’로 보아 ‘부수기모(復守其母)’, 즉 ‘다시 그 어미를 지키다’로 해석한다.
4) 위의 책.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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