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0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본지는 부처님 재세 당시로 돌아가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시대적 현안에 대해 부처님께 해법을 물었다. <부처님께 시대현안의 해법을 묻다>라는 주제로 이루어진 이 ‘가상 인터뷰’는 선학원 교무이사 한북 스님과 재무이사 정덕 스님을 내세워 불교계 문제와 사화문제를 아우르는 주요한 현안문제들을 간추려 질문한 뒤 초기경전의 내용을 토대로 그 해법을 모색한 것임을 밝힌다. <편집자주>

▲ 정덕 스님(사진 왼쪽)과 한북 스님.

 각종 재해 방지 대책은?

한북 스님 일본 구마모토 시와 남미 에콰도르에 지진이 발생해 이재민들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국가 네팔에서도 대지진이 발생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재해를 방지할 수 있는 대책은 무엇인가요?

- 내가 왕사성 죽림정사에 주석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아자타사투 왕이 내게 찾아와서 정중하게 예배하고 여름 안거를 왕사성에서 보낼 것을 청했다. 나는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왕은 때에 맞춰 의복과 음식과 침구와 의약품을 공양하였다.
그 해 여름 이웃나라인 베살리에서는 귀신의 재앙이 일어나서 하루에도 죽는 사람이 수백이 넘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돌림병에 걸려 얼굴과 눈이 누렇게 되어 3~4일 만에 죽었다. 사람들은 이 사태를 매우 두려워하며 한곳에 모며 의논하였다.

“베살리는 크고 번성해서 사람도 많이 살고 물자도 풍성해서 제석천왕이 사는 궁전과 같다고 했다. 그런데 귀신의 해침을 받아 많은 사람이 죽어서 쓸쓸하기가 산이나 들과 같다. 누가 이 재난을 구할 수 있는가?”

그들은 논의 끝에 나를 모셔오기로 했다. 그들은 내가 자비로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분이므로 어려운 사정을 말하면 베살리로 오실 것을 믿고 최대(最大)라는 장자를 뽑아서 보냈다. 그가 나를 찾아와 급박한 사정을 아뢰자 이 소식을 들은 아자타사투 왕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래서 나는 베살리의 사자를 아자타사투 왕에게 보내 이렇게 설득하라고 일러줬다.

“왕은 죄 없는 부왕을 죽였으므로 장차 지옥에 가서 1겁을 보내야 하는데 그 허물을 뉘우치고 불법에 귀의했으니 죄가 조금 감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선행을 베풀면 더 빨리 죄업을 소멸할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베살리로 보내주시기를 청하나이다.”

결국 왕은 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안거 중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베살리로 갔다. 베살리에 도착한 나는 성문에 이르러서 게송으로써 설했다.

여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분이시며
그 가르침은 우리를 열반의 세계로 인도하며
비구들은 여러 수행자들 중에 가장 훌륭하니
이 거룩한 삼보에 진심으로 귀의하면
베살리 성에는 모든 재앙이 없어지리라.
두 발 가진 사람은 안온을 얻고
네 발 가진 짐승도 그러하리니
길을 가는 이도 행복하고
길을 오는 이도 또한 그러하리라.
밤이나 낮이나 안온을 얻고
귀찮게 구는 이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자 질병이 성안으로 더 들어오지 못하고 병자들은 차츰 병이 낫게 되었다.
내 일화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느냐? 호주(護呪)를 외우면 재앙이 극복된다는 데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자연재해나 창궐하는 질병의 재해는 막을 수 없다. 인간사에서 선업과 악업에 따른 과보는 피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연변화에 따른 재앙 또한 물리적으로 막을 길이 없다. 하지만 재난에 빠진 이웃들을 긍휼(矜恤)히 여겨서 자비심을 낸다면 그 재난의 피해는 금세 줄어들 것이다. 목숨 탄 모든 생명체를 자식처럼 여기는 마음을 지닌다면 그 어떤 재난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

 모범적 총무원장 선출제도는?

한북 스님 최근 우리나라 불교계는 ‘총무원장 선출제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직선제로 총무원장을 뽑아야 한다는 의견, 현행 간선제를 확대하자는 의견, 후보자 3명을 간선제로 뽑은 뒤 최종 1명을 추첨하자는 의견이 맞서고 있습니다. 어떠한 총무원장 선출제도가 가장 좋은 것인지 해법을 말씀해주십시오.

- 내 재세 시에는 총무원장이라는 직위가 없었으므로 총무원장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모른다. 다만, 총무원장이 종단의 행정 수장의 역할을 한다고 들었다.

내 재세 시에는 승가공동체에 의견이 충돌하면 대중공의를 모아 해결하였다. 그리고 그 방법은 단백갈마(單白羯磨), 백이갈마(白二羯磨), 백사갈마(白四羯磨) 등 갈마법이었다. 단백갈마는 사안이 가벼울 때 시행하는 것으로 갈마를 받을 비구가 다른 비구를 향해 고백하는 방식이다. 백이갈마는 율에 밝은 스님을 뽑아 참주로 정하고 갈마를 받을 스님이 참주에게 고백하면 참주는 대중에게 그 사실을 한 번 공표(公表)하는 방식이다. 백사갈마는 사안이 중할 때 시행하는 것으로 갈마를 받을 스님이 참주에게 고백하면 참주가 대중 스님에게 세 번 공표하는 방식이다. 이 세 가지 갈마를 통해 결계와 해제, 안거와 수계, 자자와 포살, 징계와 사면, 생필품의 대중 배부 등 승가공동체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직선제는 일정한 승랍의 모든 승려가 총무원장을 뽑는 것이라고 하니 그나마 가장 대중공의에 부합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으나 선거 결과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가려질 것이다. 승자의 측근들은 아만(我慢)에 도취할 것이요, 패자의 측근들은 분한 마음[瞋心]을 가질 것이다. 그러면 승가공동체의 화합은 소원해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제도가 더 좋은 지도자를 뽑는 데 적합한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왜 승가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가 없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 승가공동체를 이끌 참된 지도자가 있다면 승가공동체는 반목하지 않고 화합하면서 바른 길로 갈 것이다.

나는 재세 당시 이렇게 비유했다.
“우두머리 소가 바로 가야 뒤를 따르는 소들도 길을 잃지 않는다.”
이 말을 명심했으면 한다.

 마약 유혹에서 벗어나는 길은?

정덕 스님 현대사회에서도 인류는 마약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약은 인간의 정신을 황폐화합니다. 마약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 환(幻)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불법도박사이트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청소년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도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어떤 사회적 노력과 개인적 의지가 필요한 것인지요?

- 마약을 마약(痲藥)이라고 하는 부르는 까닭은 신체적 감각을 마비시킴으로써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의지하면서 살아간다. 눈, 귀, 코, 혀, 몸, 생각 등 육근(六根)이 대상을 접촉하면 좋다, 나쁘다, 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이 판단으로 말미암아 욕심(貪)과 분노(嗔)와 어리석음(痴)이 생기는 것이다.
마약은 육근을 마비시켜 아지랑이처럼 실체가 없는 헛된 망상에 빠트리는 물질이다.
마약에 벗어나는 길은 마약에 취해서 겪는 경험이 환(幻)임을 아는 것이다.

도박이라는 것도 마약과 마찬가지로 육근이 대상에 접촉해 만들어 내는 허깨비 놀음에 지나지 않다.
환락에 빠져 살면 행복할 것 같지만, 육근의 탐욕이 지극하다보니 오히려 고통스럽고, 더 얻고자 하나 얻지 못하는 데서 괴로움이 일어난다.
나는 ‘화살의 비유’를 들어서 아래와 같이 설한 바 있다.

“불법(佛法)을 배우지 못한 이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게 되면, 근심하고 상심하며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결국 그는 이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즉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화살에 맞은 뒤 곧바로 두 번째 화살에 맞은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사람은 두 화살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모두 다 겪을 것이다.”

육체를 타고난 이상 사람은 첫 번째 화살, 즉, 육체적 고통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두 번째 화살, 즉, 육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정신적 고통은 피할 수 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간단하다.
인간의 고통은 아만(我慢), 아애(我愛), 아견(我見), 아치(我癡), 즉, 과도한 자기애에서 비롯된다. 과도한 자기애는 대부분 남과 비교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지혜의 눈으로 보자면 ‘나(我)’라는 것도 ‘내 것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무상함을 깨닫고 나면 일시적인 모든 쾌락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참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정진하고 또 정진하라.

 팔경계법은 존속해야 하나?

정덕 스님 최근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비구니 팔경계법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부처님께서 정하신 계율이니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의견과 부처님 재세 당시와 사회상이 많이 달라졌으니 사회변화에 맞게 계율도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습니다. 비구니 팔경계법은 존속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시대변화에 맞게 수정해야 하는 것인지 지혜의 말씀으로 가르쳐 주십시오.

- 비구니 팔경계법은 내가 정한 것이 맞다. 그러나 비구니 팔경계법은 정해진 지 256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나는 그 계율을 계속해서 따르라든지, 그 계율을 어떻게 수정해야 한다든지, 하는 말을 할 수 없다.
나는 초전법륜(初轉法輪)에서 ‘갈대다발의 비유’를 들어서 연기법(緣起法)을 설했고, 연기법이 곧 무상(無常)임을 일깨워줬다. 인간사 세상은 연기법에 따라 끊임없이 바뀔 수밖에 없으니 시대변화에 따라 계율도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어찌하여 대부분의 다른 계율들은 시대변화에 맞게 바뀌었는데, 비구니 팔경계법만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승가공동체를 꾸리면서 가장 기본적인 계율로 사의법(四依法)을 정했다. 사의법이란 출가자는 걸식으로 살아야 하며, 분소의(糞掃衣: 세속사람이 버린 헌 천을 주어다가 빨아서 지은 가사)를 입어야 하며, 수하좌(樹下座: 나무 아래나 동굴에서 생활하며 수행하는 것)에 힘써야 하며, 진기약(陳棄藥: 소의 변을 만든 약)에만 의존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의법은 무소유의 실천 계율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승가공동체에서 얼마나 사의법을 따르고 있으며,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기 바란다.
내가 궁금한 것은 가장 기본적인 계율인 사의법을 지키지 않는 상황에서도 왜 비구니 팔경계법만은 존속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대목을 곰곰이 생각하면 해법이 있을 것이다.

 다양한 문화소통과 화합은?

한북 스님 세계에는 여러 다양한 문화들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 사실이고 인류는 이로써 형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네스코는 2010년 “문화 다양성은 인류 창의성의 표현이자 인류 노력의 결실이며 인류의 집단적 경험의 총체로서 미적, 도덕적, 도구적 가치를 지닌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문화들은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이 가져올 수 있는 갈등을 넘어서 인류의 풍요로운 자산으로 공유되고 향유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갈수록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인류는 과연 어떻게 해야 다양한 문화 속에서 소통과 화합을 이뤄갈 수 있는지요?

- 불제자들아, 나는 재세 당시 이렇게 설하였다.

“연꽃은 진흙 속에 살면서 진흙에 더럽히지 않듯이, 보살은 세속에 살면서도 세속의 일에 때 묻지 않는다. 사방에서 흐르는 여러 강물도 바다에 들어가면 모두 짠맛이 되듯이, 여러 가지 일을 통해 쌓은 보살의 선행도 중생의 깨달음에 회향하면 해탈의 한 맛이 된다.”

‘다르다’와 ‘틀리다’라는 말은 의미가 다른데도 간혹 혼용하여서 사용한다. ‘틀리다.’라는 말은 ‘그릇됐다’, ‘옳지 않다’, ‘잘못했다’라는 뜻이다. 이런 말실수를 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나와 남은 다르다. 그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라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오해는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타인의 처지는 고려하지 않고 제 생각만 하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다름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다양성은 여럿이 어우러질 때 더 빛이 난다. 이는 마치 꽃과 꽃이 어우러져 꽃밭을 이루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종교간 화합 도모 방법은?

정덕 스님 연장선상에서 우리 사회는 다종교 사회여서 종교간 갈등이 빈번합니다.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간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 나는 《디가니까야》 제3품 제27번 ‘세계기원에 대한 경’을 통해 이렇게 설하였다. 이 세계에는 칠흑 같은 암흑만이 가득했다. 태양과 달, 별도 나타나지 않았고, 밤과 낮의 구분이 없었으며, 한 달이나 보름이라는 세월도 없었고, 여자와 남자의 구분도 없었고, 그저 중생은 중생이라 여겨졌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문득, 우유를 끓이다 식으면 생기는 얇은 막과 같은 것이 땅에서 저절로 생겨났다. 이 땅의 막을 본 한 중생이 욕심이 일어나서 한입 떼어 맛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중생들도 땅의 막을 맛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생들의 몸에서 빛이 사라지고 태양과 달과 별이 나타났다. 계절이 생기고 1년이 생겼다. 중생들은 땅에서 생겨난 것을 먹으면서 살았다. 그것을 먹을수록 중생들은 생김의 차이가 생겼다. 그러자 서로 잘 생겼네, 못 생겼네, 하며, 교만을 떨었다. 그런 뒤에 땅의 막, 즉, 흙이 사라지고, 버섯이 생겼다. 중생들은 버섯을 따먹으면서 여전히 교만을 떨었다. 이후 버섯이 사라지고 풀이 생기고, 다시 풀이 사라지고 벼가 생겼다. 그럴 때까지 중생들은 계속해서 교만을 떨었다. 이렇게 거친 음식을 먹다 보니 중생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게 되었다. 급기야 중생들은 벼를 더 차지하기 위해 땅에 금을 긋기 시작했다. 그리고 토지의 주인이 생겨났고, 법으로 통치하는 통치자가 생겨났다.

과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내가 말한 우주창조의 기원이 황당할 것이다. 이는 비유적인 언어이다. 우주 창조 이전에 중생이 있었다는 것은 불성(佛性)이 만물의 씨앗임을 밝힌 것이다. 우주 창조가 시작된 시점을 중생이 땅의 ‘맛을 본’ 행위라고 본 것은 어느 부분 《성경》 〈창세기〉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맛 본 행위와 유사하다. 탐욕으로 인해 분별심이 생겨났다는 것 역시 〈창세기〉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분별심을 없앤다면, 종교간 반목은 종교간 화합으로 바뀔 것이다.
“하나의 진리를 가지고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리드 베다》의 이 구절을 명심하길 바란다.

 자연과 인류가 상생하려면?

한북 스님 환경오염으로 인류의 미래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기상이변의 속출, 오존층의 손상, 지구 온난화와 사막화의 가속 등 인간생명을 위협하는 현상들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지난 200년간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 산업화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과학 문명이 발달하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생활이 편리하게 되었지만 이와는 반대로 자연환경은 크게 훼손되어 왔습니다. 사회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훼손이었다고 하더라도 자원의 남용 때문에 빚어지는 재난은 인류가 공통적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일 것입니다. 자연과 인류가 조화와 상생의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 지혜로운 삶을 일러주십시오.

- 내가 재세 당시 정한 율장의 열 가지 조항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잉여(剩餘)를 금지한 것이고, 둘째는 무소유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욕망의 충족은 더 욕망을 낳는 반면, 금욕은 지족을 낳기 때문이다.
나는 《숫따니파타》를 통해 이렇게 설하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 평안하라. 편안하라. 어떤 살아 있는 존재들이건, 동물이거나 식물이거나 남김없이, 길거나 크거나 중간이거나, 짧거나 조그맣거나 거대하거나,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사는 것이나 가까이는 사는 것이나, 태어난 것이나 태어날 것이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 어머니가 자신의 외아들을 목숨을 걸고 지키듯이, 그처럼 모든 존재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비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자연의 구성원을 개발의 도구가 아닌 상생의 존재로 여긴다면 환경문제는 절로 해결될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해 한량없는 자비심을 가져라.

 체제 다른 남북문제 해결책은? 

정덕 스님 우리나라의 경우 한민족인데도 질곡의 근현대사 내내 남북한이 각기 다른 체제로 나눠져 있습니다. 특히 최근 북한의 핵개발과 남한의 개성공단 철회 등으로 남북 관계가 냉각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남북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 나는 제자들에게 살생을 금할 것은 물론이고 살생을 위한 도구를 만드는 것조차 금하였다. 핵무기는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살생도구인데, 이를 개발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한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체제 속에서 살아간다는 이유로 헐벗고 굶주린 동족을 외면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내 종족인 석가족은 코살라국의 왕이 침략했을 때 죽임을 당할지언정 불살생의 계를 어기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내 종족은 모두 포로가 된 후에도 자신이 석가족임을 부정했다면 처형당하지 않았을 텐데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에 몰살되었다. 세상의 모든 민족애는 내 종족이 그랬던 것처럼 민족의 자긍심과 업보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법(佛法) 아래서는 인종도, 민족도, 국경도, 이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사람을 자신의 민족처럼 여길 줄 알아야 한다.

 화목한 가정을 위해선?

정덕 스님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어떻게 하면 가정이 화목할 수 있을지 말씀해주십시오.

- 나는 성도 후 전법교화의 길을 나섰는데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내인 야소다라와 아들인 라훌라와 어릴 적 대모(代母) 역할을 했던 이모인 마하파자파티도 수행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아내 야소다라와 현세에서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은 수많은 과거 전생의 인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야소다라조차도 열반의 길로 인도하였던 것이다. 나는 아들 라훌라의 방만함을 꾸짖어 아라한의 경지에 오르도록 안내하였다. 이모이자 대모인 마하파자파티의 장례도 내가 직접 봉행하였다. 나는 마하파자파티의 몸 위에 꽃과 향을 뿌리고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일체의 현상은 덧없는 것 한 번 나면 반드시 다함이 있네. 태어나지 않으면 죽지 않나니 이 열반이 가장 큰 즐거움이네.”

가족은 한 사람이 가장 먼저 만나는 인연이다. 자비란 타자를 사랑하고 가엾어 하는 마음이다. 가족애 없이는 인류애도 있을 수 없다.
내 제자 목련은 지옥에서 신음하는 어머니를 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가족 간의 사랑은 생과 사, 극락과 지옥의 경계마저도 허물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오신 참뜻은?

한북 스님 부처님께서 이 땅에 나투신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 나는 이 사바세계에 나오기 전부터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생애를 통하여 피보다 뜨거운 구도의 길을 걸었고 연꽃보다 고귀한 자비를 베풀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공덕을 쌓았다. 과거 전생의 끊임없는 수행정진과 수미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은 공덕을 쌓은 선연(善緣)으로 도솔천에 태어나 일생보처의 보살이 되었다. 그러니 불제자들은 알라. 법을 보는 자는 여래를 보고, 법을 실천하는 자는 여래와 가까이 있는 것이니라. 내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탄생게를 설한 까닭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고귀하다는 것을 알림은 물론이고 인간은 누구나 다 평등하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불제자들은 알라. 나는 중생들을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라 본래 누구나 불성을 구족하고 있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온 것이다.
누구나 마음을 깨끗이 하여 불법(佛法)을 따르면 부처(覺者)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누구나 불성의 씨앗을 갖고 있다. 너희는 모두 미완(未完)의 부처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불성(佛性)을 볼 줄 알면 바로 부처인 것이고, 그러지 못하면 중생인 것이다.
불법(佛法)은 내가 이 땅에 오기 전부터 있었거니와, 내가 떠난 뒤에도 항상 세상에 두루 편재(遍在)하느니라.

정리= 유응오/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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