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위한 시간>(벨기에, 2014)은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입니다. 이들은 유럽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칸느영화제에서 <더 차일드>와 <로제타>로 두 번이나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해고된 여성 노동자가 복직을 위해 주말동안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의 단순한 이야기지만 조금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흥미롭지 않은 소재를 갖고 이렇게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감독의 역량이 놀라웠습니다.

다르덴 형제 감독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사회적 약자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함과 아울러 휴머니즘이야말로 인간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르덴형제 감독의 영화가 대체로 그런 것처럼 카메라는 느닷없이 주인공의 일상으로 침투했습니다.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주인공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는 낮잠을 자다가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해고를 알려주는 친구 줄리엣의 전화였습니다. 산드라는 태양열 전지회사에 다니다가 우울증으로 휴직한 상태였는데 복직을 사흘 앞둔 시점에서 해고 통보를 받은 것입니다. 사장은 직원들에게 산드라의 해고와 보너스 1천 유로 중 선택을 강요했고, 동료 중 2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보너스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산드라는 매우 실망했습니다. 1천 유로를 선택한 다른 직원들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 대출금을 갚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임대아파트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습니다. 갑자기 닥친 불행한 뉴스는 산드라의 신경을 과민하게 만들었고, 산드라는 부랴부랴 신경안정제 한 알을 삼키고는 침대에 누웠습니다. 복직을 앞두고는 있었지만 산드라가 아직 완전히 치유가 된 상태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산드라는 작은 자극에도 금방 무너져 내릴 만큼 나약한 상태였습니다. 산드라에게는 도움이 필요한데, 그 도움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울증이라는 증상 자체가 타인에 대한 연대감이 부족해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산드라는 다른 사람의 애정이 정말 필요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함께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이 기껏 1천 유로 때문에 자신을 배신했다는 진실에 상처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우울증이 악화된 것인지 산드라는 수시로 알약을 먹었고, 남편의 만류에도 끊임없이 약을 먹으면서 현실로부터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장 임대 아파트로 내쫒기고 싶지 않으면 직장이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산드라는 주말동안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은 14명을 만나 그들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월요일 아침 재투표를 하는데 그때 과반수 이상이 산드라의 복직을 원한다면 다시 복직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말동안 이들 14명을 만나 자신의 복직을 구걸하는 상황이 산드라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산드라의 남편은 어렵지 않은 일인 것처럼 말하지만 산드라는 자신의 처지를 ‘거지가 된 것 같은 기분’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과반수 이상의 표를 얻어 자신이 복직되더라도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일도 몹시 걱정스러웠습니다.

영화는 산드라가 직장 동료 14명을 만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과 나누는 대화는 대체로 반복되는 편이지만 동료들의 반응과 상황은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영화에서 긴장감을 만들었습니다.

14명 중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윌리였는데, 그는 산드라에게 투표하는 걸 거부했습니다. 아내는 휴직했고, 아이들은 대학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돈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너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보너스를 선택하는 것 뿐”이라고 했습니다. 주말이지만 그는 타일을 주워 팔고 있었습니다. 그는 산드라의 복직을 돕고 싶지만 그의 상황이 선뜻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주말이지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히샴 또한 윌리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또한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으며, 얼마 전 아기가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돈이 많이 필요해 보였고, 그래서 산드라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이외에도 몇몇 동료들이 이들과 마찬가지로 산드라를 돕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남에게 마음을 쓸 수 없는 안타까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었고, 산드라도 이들을 이해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가장 친하게 지냈던 나딘은 현관 초인종 뒤에 숨어서 문조차 열어주지 않았으며 줄리앙은 산드라를 비난했습니다. 왜 사람들을 괴롭히냐고, 그녀가 자신들을 분열시키고 또 자신들에게서 1천 유로의 보너스를 빼앗아간다고까지 했습니다. 또 같은 직장에 다니고 있던 부자(父子) 중 아들은 아버지가 산드라의 복직에 투표하겠다고 결정하자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했습니다.

미안해하면서 거절하는 사람이나 화를 내면서 거절하는 사람이나 다들 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년치 전기요금 내야 하는 돈이거나 아이들의 등록금이고, 앞마당을 고쳐야 하고, 남자친구와의 새살림을 시작할 돈이기도 했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꼭 필요한 돈이기 때문에 산드라는 그들을 원망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이런 처지로 내몰린 자신의 신세가 한심해서 견디기 어려울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알약을 삼켰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제로섬게임처럼 누군가가 차지하면 다른 사람은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물질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성을 잃어가고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도록 만드는 못된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시스템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선한 본성을 따르는 꽤 용기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영화의 매력은 사람들에게서 이런 아름다운 면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주말이지만 쉬지 않고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티무르는 산드라를 보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렇게 찾아와줘서 너무 고맙다고 하면서 산드라에게 투표 안한 것 때문에 내내 마음이 무거웠었다면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안느도 꽤 감동적이었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페인트칠을 하느라 초인종 소리를 못 들었다면서 뒤늦게 나온 안느는 산드라에게 투표하지 못해 마음이 찜찜했다고 했습니다. 남편과 의논해서 될 수 있으면 산드라에게 투표하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계약직 직원도 다소 감동적이었습니다. 계약직이기에 불완전한 처지에 놓인 이 남자는 산드라에게 투표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투표했다가 사람들의 미움을 사는 게 걱정되고 또 자신은 계약직이기 때문에 9월 재계약이 되지 않을 걸 두려워해서 산드라에게 투표하는 게 망설여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신은 도움을 원하는 사람을 도와주라고 했기 때문에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결정을 유보했습니다.

마침내 월요일이 되고 투표가 실시됐습니다. 표는 동수였습니다. 한 표라도 더 얻어야 복직할 수 있는데, 산드라의 복직은 결국 무산됐습니다. 산드라는 회사를 떠나기 전에 자신에게 투표했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곳엔 신과 재계약 사이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줬던 청년도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정말 큰 결심을 한 것이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논리가 아니라 신의 뜻을 따르는 삶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 뿐 아니라 산드라를 선택했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양심과 자비심을 선택한 것이고, 또 자기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인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대단한 결정을 한 사람이 무려 8명이나 된다는 사실에 산드라는 감동 받았습니다.

그들과 작별을 하고 나왔을 때 사장은 다시 산드라를 시험에 들게 했습니다. 그녀에게 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투표했기에 9월에 재계약할 남자를 대신해 복직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산드라는 단호히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고, 그녀 또한 자신에 투표했던 그 8명처럼 자신을 희생시키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 산드라는 남편에게 복직에는 실패했지만 무척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따뜻함을 경험했고 그래서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사장은 인간애와 돈 중 양자택일을 하도록 사람들에게 강요했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에게 던진 화두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돈을 선택하지만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고 불행하고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지만 휴머니즘으로서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감독은 평범하고 단순한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거장의 호흡이 느껴지는 따뜻한 영화였습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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