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남북조시대 때 혜원(慧遠, 334~416)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강서성(江西省) 여산에 들어간 뒤 30년 동안 산문을 나서지 않아서 스님을 산 이름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초나라를 건국한 환현(桓玄)이 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사문이라도 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혜원 스님은 “불법(佛法)은 왕법(王法)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며, 환현의 주장과 요구를 반박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이다.

허운(虛雲, 1840~1959)이라는 스님도 있다. 아편전쟁이 발발한 1840년 태어난 스님은 120세에 입적할 때까지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종의 법맥을 지켜낸 근·현대 중국불교의 선지식이다.

허운 스님이 입적하기 전해인 1958년의 일이다.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모택동은 주은래가 스님에게 불법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나보고 싶다며 불러달라고 했다. 그러나 허운 스님은 모택동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자고로 법왕이 인간의 왕보다 높다. 귀의할 생각이 있으면, 당신이 나에게 오면 될 일이다”라면서 말이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도 비슷한 일화를 남겼다. 1978년 구마고속도로 개통 때 시간을 내 해인사를 찾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스님을 뵙고 가야겠다며 큰절까지 내려오시라고 백련암에 연락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대통령은 세상의 어른이지만, 총림(叢林)에선 방장이 어른이다. 대통령이 나를 만나 삼배를 안 할 바에야 서로 안 만나는 게 낫다”며 거절했다.

4·13 총선이 끝났다. 국민은 새누리당의 실정을 심판하며 더불어민주당을 원내 제1당에 올려놨다. 그런데 4·13 총선의 뒷맛이 씁쓸하다. 한국불교의 장자 종단이라는 조계종의 수장 자승 스님이 총선 기간 내내 여야 유력 정치인들을 무더기로 만났다는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의혹의 진원지는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와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다. 나경원, 박영선, 권영세 등 후보자들이 자승 스님과 함께 유세하는 모습을 SNS에 올린 것이다. 순천의 이정현 후보는 TV토론회에서 자승 스님을 만났다고 밝히기도 했다.

의혹이 불거지자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이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선거 개입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는 논평을 내는 일까지 벌어졌다.

조계종은 “지역 사찰을 방문했다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후보자들과 인사를 나눈 것뿐”이라고 해명했지만,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별로 없는 듯하다. 오히려 “국가의 행정작용 및 예산 심의, 입법 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라는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번 총선에서 개신교는 기독자유당과 한국기독당을 통해 국회 입성을 노렸다. 그러나 기독자유당은 2.63%, 한국기독당은 1.07%의 정당 득표율로 국회 입성에 실패했다. 헌법에서 정한 정교분리 원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종교와 정치의 유착은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 못한다는 반증이다.

종교의 권위는 권력이나 재물, 명예에 있지 않다. “행정부와 입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라는 비아냥을 듣지 않으려면, 불교 지도자들은 정치권력과 더욱 거리를 두어야 한다. 권력에 아부하고 빌붙은 승려들은 ‘권승’이라는 오명만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권력을 멀리하고 출가 사문 본연의 자세를 굳건히 지킨 승려들은 역사에 큰스님으로 기억된다.

출가 사문의 본분을 지키면 권력자들을 찾아다니지 않더라도 스스로 찾아와 무릎을 꿇고 예경할 것이고,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불교계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다. 한국불교가 머지않은 미래에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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