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글의 ‘종교’라는 용어는 영어 ‘religion’을 일본인들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宗敎’라는 한자로 번역했고, 그것을 다시 우리말로 ‘종교’라고 읽은 것이다. ‘종교’라는 용어의 발생이 서양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
용어에는 ‘기독교’가 전제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라는 큰 우산을 펼쳐 놓고 그 범위 속에서 ‘불교’를 논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게다가 ‘불교’라는 용어는 ‘佛敎’를 한글로 표기한 것인데, 이 용어는 엄밀하게 말하면 ‘부처의 가르침’이다. 여기에는 ‘부처의 체험’이 전제되어 있다. 즉, ‘내적으로 일어난 체험’과 ‘겉으로 드러난 가르침’ 사이의 철학적 해석의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과거의 학승들은 이 문제를 집요하게 다루었다. 과연 언어나 문자의 형상이 ‘겉으로 드러난 가르침’인가? 아니면 의식이 ‘겉으로 드러난 가르침’인가? 더 나아가 본성이 그렇게 드러난 것인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매우 분석적이고 사변적인 철학적 논증을 벌여왔다. 당나라 시대의 화엄학승이자 선불교이론자인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스님도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2.
이런 엄청난 문제가 담겨 있고 긴 역사적 논의를 담보하고 있는 주제임을 알면서도 필자가 ‘종교로서의 불교’라는 제목으로 본 칼럼을 쓰는 이유는, 현재 한국불교의 현실 때문이다. 서양 기독교의 배경에서 나온 ‘종교’라는 의미가 아무리 편협하다 하더라도, 또 교학에서 사용되던 ‘불교’라는 용어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불교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한국에서 불교가 종교임에는 분명하다. 또 다른 나라를 보아도 그렇다. 일간지 신문 지면에서 정치면, 경제면, 사회면, 종교면, 문화면, 연예면을 나누어 보도하듯이, 이런 정도의 의미로서 종교 속에 불교가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면 대체 현재의 한국불교가 어떻다는 말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종교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문기자들이 지면을 활용하여 ‘세상일’을 논하자니, 필요와 편의에 의해서 무슨 면 무슨 면하고 나눈 것이지만, 즉 방편으로 정치-경제-사회-학술-종교-문화-연예 등등으로 나누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 각각의 고유 영역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종교라면 종교 고유의 영역이 있고, 그러면서 여타의 영역과 유기적으로 관계한다.

종교라고 깃발을 내걸고, 정치를 하자는 것인지? 경제적 재화를 관리하자는 것인지? 사회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인지? 문화 활동을 하자는 것인지? 연예 행사를 하자는 것인지? 학문적 연구를 하자는 것인지? 도대체가 구별이 가지 않는다. 위에서도 분명 말했지만 이런 구별들은 어디까지나 방법적이고 방편적이다. 그렇다고 고유의 영역이 없을 수는 없다.

3.
그러면 불교의 고유 영역은 무엇인가? 적어도 대승을 표방하는 불교 학승들은 인도와 중국과 한국과 일본과 월남을 막론하고,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고유의 영역으로 꼽았다. 부처가 왜 이런 저런 말을 많이 남겼느냐? 교(敎)가 생겨난 이유 즉 ‘교기인연(敎起因緣)’으로 ‘일대사’를 꼽았음은 긴 역사 속 여러 지역에서 무수한 학승들이 논하고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 부처와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본질적으로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번뇌로 인해서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니, 어떻게 해서든지 이 사실을 제대로 알게 하여, 저들 스스로 지혜를 발휘해서, 체험해서, 그렇게 누려보라고, 그래서 이런 저런 교설을 펼치셨다는 것이다. 부처의 제자라면 이런 일대사인연으로 사바에 오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업[佛事]을 도와야 할 것이다.

요즘 종단 정치승들이 이러한 불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떼쓰고, 법정에 소송하고, 집단적으로 시위하고, 정치에 줄대고, 돈줄 찾아다니고, 종학과 철학도 구별 못하고, 절간에 살면서 글씨다 그림이다 조각이다 다도다 사찰음식이다 예술하고, 연예인 불러다 판 벌이고, 자기와 입장 다르다고 내쫓고. 咦.

-연세대 철학과 교수 ·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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